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1화 (11/155)

11화.

그랬다. 그 여자.

죽은 계모의 시녀이자 릴리엔의 시녀를 자처했던 여자는 계모의 살아생전에 온갖 악행을 도왔던 수족이었다.

만약 릴리에이 예전처럼 유모의 꼬임에 넘어갔다면 알렌은 릴리 엔을 그대로 계모의 부속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릴리엔은 그러지 않았다.

사후에 보고받기로, 유모는 가주의 후계자마저 괴롭히던 교활함과 기세등등함을 다 잃고 맨몸이나 다름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얼이 빠진 채 성에서 내쫓겼다고 한다.

‘그 꼴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란 말이지.'

제 상전 닮아 그악스럽고 욕심많은 여자를 짐 가방 하나 들고 가지 못하게 쫓아낸 릴리에의 수완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궁금증과는 별개로 속이 무척 시원했다.

‘미치도록 그렇지..'

행여 복수하기 전에 죽어 버린다면 무덤을 열고서라도 그 얼굴에 침을 갈겨 주리라 생각했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잽싸게 릴리엔에게 빌붙지만 않았어도 그에게 진작 끝장이 났을 것이다.

절호의 타이밍을 놓친 게 속이 쓰렸다. 그래서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차였다.

한데 그 잔꾀 많은 여자가 믿는 구석에 스스로 발등을 찍혀 버리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지.'

제 손으로 복수를 한 것보다 갑절은 더 속이 시원했다. 지금도 떠올리면 등줄기에 기분 좋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제가 아가씨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성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예, 물론입니다.”

“뻔뻔한 놈 같으니.”

“과찬이십니다.”

알렌은 한 점 부끄럼 없이 인정했다. 이제까지 그는 릴리엔의 장점이라곤 그나마 계모의 성정을 닮지 않은 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틀렸다.

세드릭을 위한 마음 씀씀이와 도저히 열두 살 아이답지 않은 성숙한 배려. 게다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그 여자를 쫓아낸 걸 보면 강단까지 있다고 봐야겠지.'

자기 친어머니를 닮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주군과 한 핏줄이었던 거다.

잘못을 인정한 알렌은 곧바로 입장을 바꿨다. 그 과정이 너무도 서슴없어 뻔뻔스럽게 보였지만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틀렸습니다. 릴리에 아가씨는 명실상부한 이슬라르의 핏줄이시며 최고의 대우를 받기에 부족함 없는 분입니다.”

세드릭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알렌 헤이워스 경.”

“예, 가주님.”

“하나 잊을까 봐 해 주는 말인데, 릴리에 이슬라르는 내 동생이다.”

스물한 살 청년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좀 많이 유치한 주장이었으나 더 문제인 것은…….

“……누가 모른답니까?”

그 말이 알렌의 신경을 긁었다.

는 점이다.

신의와 충성으로 맺어진 주종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했다. 누가 봐도 유치한 꼬락서 니였지만 둘만 몰랐다.

'둘 다 좀.’

신뢰받는다는 이유로 이 자리에 동석은 하고 있다만 그게 썩 달갑지 않은 가문의 주치의, 쇼가 눈알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여기서 저 무의미한 신경전의 맥을 끊을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가 피곤한지 눈 밑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그만하시고, 가주님, 하시던 말씀이나 계속 하시죠.

혹시 릴리에 아가씨께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까?”

“문제라기 보다…….”

세드릭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 아이는 뭔가 가타부타 이야기를 하질 않는다.”

“?”

주치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지금 의사를 불러다 앉혀 놓고 할…… 말인가?'

의아한 건 그뿐인 듯 알렌은 고개를 깊이 주억거리며 공감했다.

“먼저 떼를 쓰는 법이 전혀 없으시죠. 그 나이에는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무엇을 해 달라 하는 법도 없고 이게 어찌된 일이냐 묻는 법도 없고, 그저 뭐든 알고 있다는 눈으로 가만히 웃기만 해.”

그뿐만이 아니었다. 릴리엔은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궁금한 것도 바라는 것도 없고 그저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 같다.”

릴리엔은 마치 바람 앞에서도 고요한 호수 같았다.

불가능할 정도의 의연함과 침착함. 그것이 마냥 기껍지가 않았다.

세드릭은 미간을 문질렀다.

“갑자기 너무 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지나치게 착하게 굴고 있어.”

그를 믿어 준다면 좀 더 편안하게 아이처럼 굴었으면 좋겠다는 이 마음은 욕심일까.

알렌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엔 시녀장인 그의 어머니까지 릴리엔을 '기특한 우리 아가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를 만날 적마다 어찌나 침이마르게 칭찬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걱정했다.

"너무 그 나이답지 않으셔서 말이야. 속으로 굶는 것은 아니신지…….”

알렌과 세드릭의 생각도 정확히 그랬다.

“……잘은 모르지만, 쇼. 본디 그 나이 아이가 그럴 수도 있는 건가?”

“그을쎄요…….”

릴리엔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보이는 건 실제로 그녀가 거의 모든 전후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 나이답지 않게 보이는 건 실제로 그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쇼는 모시는 아가씨에 대한 평을 요구받아 껄끄럽기만 했다.

“뭐……. 아무튼 의사 앞에서 그토록 차분하신 분은 드물기는 합니다. 그건 타고나신 거죠. 아무래도 더 나이가 든 분들도 의사 앞에서는, 죄송합니다만 추태를 보이실 적이 많으니까요.”

어쨌든 나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부는 아니었다. 쇼는 그런 일엔 원체 소질이 없었다. 실제로 릴리엔을 보고 받은 인상이 그랬을 뿐.

"타고났다라…….”

깊게 고민하는 눈치인 주군을 보던 쇼는 언뜻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아가씨께 직접 물어보셨습니까?”

푸르고 붉은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쇼를 바라보았다. 둘 다 대답은 없었다. 허를 찔린 것처럼.

“그러니까…….”

“뭘 좋아하느냐, 뭐가 먹고 싶으냐, 가지고 싶은 건 없느냐, 궁금한 건 없느냐. 지금 말씀하신 그런 것들이요.”

“물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없었다.

두 남자의 공통된 침묵에 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찼다.

'이 사람들이 대체 왜 여기서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끼고 이러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똑똑, 가지런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 선 호위가 “가주님, 릴리에 아가씨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하고 알렸다.

문 안의 세 남자는 죄라도 지은 양 화들짝했다. 마치 지금까지의 공방을 들킨 것만 같아서였다.

정신을 가다듬은 세드릭이 허락하자 문이 열렸다. 등장한 건 릴리엔의 하녀였다.

“가주님, 아가씨께서 오늘은 햇볕을 쬐며 차를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노라고 청하셨습니다.”

거두절미 본론이었다. 세드릭과 알렌은 직감했다.

기회였다.

* * *

돋아나는 신록이 햇살을 투명하게 머금었다.

뺨에 와 닿는 바람은 아직 서늘했다. 하지만 볕이 따스해서 견딜 만했다.

사용인들은 보얀 봄볕이 반쯤 드리우고 또 절반은 그늘이 드리운 자리를 찾아 절묘하게 테이블을 놓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정원으로 다가오는 소녀는 이제 막 열 살이나 먹었나 싶게 작아 보였다.

손질하지 않고 귀 뒤로만 넘긴 검푸른 머리카락. 허리도 잡지 않은 연한 병아리 색 원피스에 뜨개질로 짠 풍성한 카디건 덕분에 체구가 더 작아 보였다. 빼죽보이는 연한 아이보리색 구두코도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사용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전혀 아이 답지가 않았다.

수줍거나 들뜨거나 한 기색 없이 잔잔하게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은 낮이 차분하기만 했다.

릴리엔이 차분한 낯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뒤따라온 헤이 워스 부인을 돌아보았다. 부인이 릴리엔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소곤소곤, 소녀가 무어라고 속삭이자 부인의 입가에 흐뭇하게 미소가 번졌다.

“예, 예. 아가씨.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물론이죠.”

이윽고 부인이 허리를 폈다. 마냥 자애롭던 얼굴이 어느새 시녀장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다들 일을 아주 열심히 해 주었구나.”

“미욱할 따름입니다.”

진심이 담긴 겸양에 헤이워스부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가씨께서 오늘 수고해 준 사람들에게 아주 고마워하고 계시다. 금일봉이 있을 예정이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고.”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헤이워스 부인이 크흠 하고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제야 다들 다급히 무릎을 굽혔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릴리엔은 까딱 목례하며 다정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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