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2화 (12/155)

12화.

곧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게 한쪽으로 물러가자 헤이워스 부인 이 “자아” 하고 릴리엔을 자리로 이끌었다.

“볕이 참 좋네요, 아가씨. 아가씨부터 얼른 볕을 좀 쬐고 계세요.”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을요."

릴리엔은 반투명한 보로 덮어둔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자그맣고 예쁜 음식들이 올망졸망하게 차려져 있었다.

릴리엔은 조금 미안해졌다. 왜냐면…….

“오라버니께서 오실까?”

세드릭이 와 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반드시 오시죠.”

“모두의 정성을 못 쓰게 만들고 싶진 않은걸요.”

"아가씨,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걸 걱정하시는 게 아니에요.”

헤이워스 부인이 다정하게 나무라며 릴리엔의 옷을 여며 주었다.

“튜린의 날개 아래 비호를 받는 이들은 모두 충성스러워요. 그러니 아가씨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겁니다.”

"알아요.”

튜린 사람들의 충성심은 유별나다. 하지만 충성심은 짝사랑과는 다르다. 모시는 가문의 명망이 드높기만 해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다.

충성심이 한결같다는 건, 달리 말해 이슬라르 일가가 한결같이 가솔들을 잘 대우해 줬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솔들의 충성심은 가문의 자산이다. 그 어떤 광산이나 토지보다 공을 들여 얻은 것이었다.

“저는 그 마음이 쓸데없이 깎여 나가지 않도록 귀하게 다루고 싶어요.”

“어쩜 이렇게 기특하실까…….”

칭찬받자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릴리엔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도련님, 아니 가주님께서 안 오실 리가 없어요.”

“하지만…….”

릴리엔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호수에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도 못 지키셨어요. 아니,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공사가 다망하신 걸 충분히 아니까.”

“아가씨…….”

“그래서 못 오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반드시 오신다고 믿었다가는 제멋대로 실망하게 될 것 같거든요.”

헤이워스 부인은 바로 그 약속을 안 지킨 것 때문에라도 세드릭은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그녀가 기른 도련님은 반드시 그럴 거라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이 소녀에게 필요한 건 부인의 설득이 아니었다.

'가주님께서 나타나 주셔야지.'

알렌의 말에 따르자면, 세드릭은 최근 스스로를 좀 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한동안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바쁜 건 어쩔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금쪽같이 귀애하는 여동생이니.’

세드릭이 안 올 리가 없었다.

헤이워스 부인은 자신했다.

그 믿음에 화답하듯이…….

“아.”

저만치서 세드릭이 나타났다.

안 와도 어쩔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릴리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마음의 상처를 예방하고자 미리 실망을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세드릭이 나타나 주니 반갑고 고마웠다.

“오라버니!”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숨김없이 내색하며 세드릭을 향해 재빨리 다가갔다. 언제나 조금씩 좋은 감정도 절제하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셨네요.”

티 없이 반가움을 드러내며 종종 다가오는 릴리에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어른스러움은 찾아볼수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딱 제 나이, 열두 살답게 보였다.

세드릭은 가만히 그런 여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릴리에의 얼굴 주변에서 나풀거리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햇살을 머금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그제야 세드릭은 깨달았다.

'햇살이 밝구나.'

봄의 초입, 선선한 공기를 따뜻한 햇살이 데우는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이걸 보여 주고 싶어서.....

숨 막히게 밀려드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는 여동생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릴리엔은 갸웃 의아해하면서도 세드릭의 팔 안으로 종종 걸어 들어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작은 병아리처럼.

이윽고 폭삭 품에 껴안긴 아이를 세드릭은 번쩍 안아 올렸다.

예고 없는 행동에 아이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꺅, 오라버니!”

비명을 지르면서도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

세드릭은 웃고 싶었고 또 조금은 울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마주 웃었다.

"아직도 가볍구나. 밥은 먹고 있는 거겠지?”

“누가 드릴 말씀을요!"

평소와 달리 조금 목소리가 높아진 릴리에이 그의 어깨 근처 견장을 불안한 듯 움켜쥐었다.

"내려 주세요. 다들 보잖아요!”

“보면?”

“보면…… 보면……."

마땅히 이을 말을 생각하지 못하는 릴리엔을 보며 세드릭은 이번엔 아주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하하, 웃는 소리에 릴리엔은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그럴수록 세드릭은 더 즐거워졌다.

“가자.”

세드릭은 릴리엔을 준비된 자리에 손수 앉혀 주기까지 했다. 사용인들이 죄다 흐뭇하게 그 상황을 지켜보는 통에 릴리에의 소리 없는 당황은 배가 되었다.

테이블 위를 점령한 음식들을 보며 세드릭이 부드럽게 웃었다.

“준비하느라 애를 썼겠구나, 릴리엔.”

“제가 한 일은 아니지만요…"

릴리엔은 곤혹스러웠지만 세드릭은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일단 앉으세요.”

“음.”

훈연 향이 깊게 밴 햄에 계절과일과 채소로 풋내를 더한 샌드위치, 크림과 라즈베리 잼을 곁들인 스콘 따위의 작고 올망졸망한 먹거리들.

튜린 성의 요리사는 소박한 음식 속에 드러나지 않게 온갖 솜씨를 부려 놓았다. 시원한 과일에이드를 만들기 위해 산에서 일부러 톡 쏘는 맛이 나는 물을 길어 왔을 정도였다.

허투루 준비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치 이 자리를 준비한 사람들 모두가 세드릭이 릴리에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 같았다. 가주로서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은 날씨, 맛있는 음식, 귀애하는 여동생.

세드릭은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삶이 이다지도 간단하게 기뻐질 수 있는 거였나?’

꼭 집안 전체가 릴리엔이라는 마법에 녹아내린 것 같았다.

행복한 바보가 되어 버린 기분.

'나쁘지 않군.'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라버니?”

마음이 풀어진 세드릭이 말없이 릴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애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가끔씩만 받아 보았던 친애의 표시.

릴리엔은 당황했지만 싫어하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세드릭은 그 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릴리엔, 네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직감적으로 릴리엔은 이 질문이 그냥 질문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녀는 양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네, 말씀하세요.”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묻고 싶구나. 네 약혼에 대해서든,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든, 뭐든.”

그랬다.

너무 철이 들어 버린 여동생에 대해 세드릭이 가장 조바심이 나는 부분이 이것이었다.

열병을 앓았다. 그러더니 철없는 행동을 반성한다며 오라버니의 뜻대로 약혼을 하겠다고 한다.

반가운 말이었다. 그 뒤로는 계를이 없기도 했거니와 릴리엔이 그의 삶에 베푸는 온기가 너무 따뜻하고 온화해서 미처 의문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불쑥 의문이 들었다.

'대체 저 아이는…….'

너무나 순순하지 않은가?

칼을 든 주인이 자기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털을 깎아 내고자할 뿐임을 알고 있는 양처럼 릴리엔은 잠잠했다.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론 릴리에이 그럴 수 있었던건 앞으로 일어날 일은 물론, 남편 될 사람의 됨됨이가 어떠한지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읽은 이야기에서 남편은 릴리에이 자살을 감행한 뒤 미쳐버리고 마는데 책에서는 ‘아내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그 죽음이 기폭제가 되었다.'고 언급되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끝장날 때까지 흑막으로서 수많은 사람의 피를 보았다.

하지만…….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는 없었지.'

릴리엔은 침착하게 손을 꼽아보았다.

사생아가 등장하지도 않았고 릴리엔이 아들을 학대한다는 걸 눈치챘을 때도 손찌검을 하지 않았으니 손버릇이 나쁜 남자도 아닐 터.

'손찌검을 할 만큼의 관심도 없었다고 하는 편이 좀 더 옳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그는 능력 있는 흑막답게 돈도 많았다.

그만큼 축재를 하려면 도박하는 습관 또한 없을 것이다.

제국의 절반을 피로 물들인 세기의 대악당을 두고 릴리엔은 태평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만하면 결혼할 만하지 않을까?'

저 세 가지에 해당하는 인간 말종만 아니면 사랑 없이도 결혼생활은 원만할 수 있다.

'내가 아이를 학대하다가 자살하지만 않으면 남편이 악당으로 변할 이유도 없을 테고…….’

즉 다시 말해서, 릴리엔이 악당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바람 안 피움(사생아 없음), 폭력 안휘두름, 도박 안 함.

딱 그 세 가지뿐이란 뜻이었다.

결혼을 통해 불행의 구렁텅이,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결혼에 대해서는 일절 꿈도 희망도 없는 그 기준과 릴리에이 미리 본 처참한 미래에 대해 세드릭이 알면 뒷목을 잡을 것이다.

안 그래도 세상에 누이를 지킬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이 가당치도 않은 진실을 모르는 게 차라리 약이었다.

아무튼, 할 말 없느냐는 질문에 이미 알 거 다 알고 애초에 결론을 내린 릴리에의 답은 이랬다.

“글쎄요. 제 결혼은 이미 결정된 사항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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