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3화 (13/155)

13화.

“그야…… 그렇지만, 릴리엔.”

“저는 오라버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딱히 불만도 없고요.”

세드릭은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사실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봤다니.’

그런 믿기 힘든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릴리엔은 조용히 알고 있는 사실을 되짚어 보았다.

현 황제는 선황의 동생이었다.

숨을 거둘 당시 선황의 나이 고작 마흔두 살. 자연사라고 보기에는 의문이 남는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다행히 나이는 어리지만 후계자는 있었다. 열다섯 살인 황태자에게는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아 줄 숙부 또한 둘이나 됐다.

바로 그 중 하나가 문제였다.

야심이 넘치기는 하나 섭정이 되는 선에서 만족하리라고 여겨졌던 황태자의 큰 숙부가 돌연제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승계를 납득시키기 위해 새 황제는 안팎으로 피를 보아야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대 튜린 선제후, 남매의 아버지였다.

전대 튜린 선제후는 선황의 충신으로 황태자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다.

'그러니 내가 황태자의 보호자인 대공 전하와 결혼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셈이지.'

그 외에도 연배와 신분이 비슷하니 정국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그와 결혼하게 되지 않았을까? 릴리엔은 막연히 생각했다.

다미언 루펜바인, 그는 선황의 막냇동생이었다.

늦둥이 막내가 태어날 당시, 이미 후계 구도는 확정되어 있었다. 노회한 부황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고 태자였던 큰형은 이미 국정 전반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막내 황자는 전장을 선택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속국을 평정하고.

모든 승리를 형에게 바쳤다.

열세 살에 전장에 나간 소년은 열일곱이 되어서야 최전방에서 돌아왔다. 아버지 슬하에서 소년 병으로 뛰쳐나가 형의 치하에서 개선장군이 되어 귀환한 것이다.

태어난 일시도 불분명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막내황자였다. 나이 열일곱이니 아직도 청년보다는 소년이라 해야 알맞을 터.

그러나 제국인들에게 그 소년은 대공 전하이자,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제국군의 비공식 공성병기로 통했다.

이립은커녕 약관조차 안 된 소년의 수많은 공적 중에서도 레옌그라드 요새를 단 열두 명으로 사수한 일을 기려, 큰형인 이도 엘 황제는 그에게 이런 칭호를 하사했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쇄금의 기사 다미언 발미에라 에른스트루펜바인.'

릴리엔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았다. 대공은 큰형이 의문사하자마자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를 구해 냈고 황제가 될 때까지 보호하게 된다.

그런 그와 결혼하는 건 튜린과 릴리에이 함께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세드릭에게 그렇게 설명할 수 없었기에 릴리엔은 이렇게 에둘렀다.

“오라버니, 저는 무작정 희생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니에요.

저도 제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다 해도, 오라버니께서 제게 아주 형편없는 사람과 결혼하라고는 하지 않으셨겠죠. 제 말이 틀린가요?”

“그건 그렇지만, 릴리에.”

“동행보다는 동맹을, 동맹보다는 혈맹을.”

이 말은 루펜바인 황가가 등장하기 이전, 제후들이 오랜 전쟁에서 살아남은 비결이자 세드릭이 아버지의 입을 통해 익히 들어온 격언이었다.

릴리엔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저는 튜린의 딸이에요, 오라버니. 이 결혼은 제 의무이자 책임이고요.”

게다가 이 혼담을 주선한 건 헤멘린나 대제후였다.

헤멘린나 대제후는 황태자의 외증조부로서 황태자파의 대들보나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제안한 혼담을 거절한다면 튜린은 황태자파에 온전히 속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에게 가담할 수도 황태자를 100% 지지할 수도 없는 튜린은 공공의 적이라는 가장 위험한 입장에 놓일 공산이 컸다.

“대공 전하와 결혼하겠어요. 튜린을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나름대로 조건을 따져 하겠다고 나선 결혼인걸.' 릴리엔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지만 세드릭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한번쯤은, 한번쯤은 그라도 다른 모든 것보다 여동생을 우위에 놓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릴리엔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나 아버지처럼 푸르지만 훨씬 다정한 눈빛을.

"훨씬 더 올곧기도 하지.”

무슨 말을 해도 뒤바꾸지 않을 결정을 내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돌아보지 못한 사이에 불쑥 어른이 되어 버린 이 아이는 아마 영영 그에게 응석을 부려 주지 않을 것이다.

서운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탓이 크니…….'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오라버니.”

“……응?”

쓸쓸한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답이 조금 늦었다.

“무슨 일이냐?”

“그게…….”

릴리엔은 보기 드물게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장차 황가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세드릭이 씁쓸하게 수긍했다.

“그때를 위해서 …… 선생을 초빙해서 교양을 익힐 수 없을까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세드릭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릴리에이 서둘러 설명했다.

“부끄럽게도 저는 아직 한 번도 예법이나 화술 같은 것들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해서요. 이대로라면 튜린과 오라버니께 누를 끼치게 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아니, 그럼 여태까지 너를 가르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냐?"

릴리엔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은 아연했다.

'대체 무슨.’

언젠가 반드시 사교계에 자신을 선보이게 될 아이에게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예법 선생 하나 붙여 주지 않았다니?

'아이를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계모는 그에게 뿐만 아니라 릴리에에게도 최악의 엄마였던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런데 대체 아버지는.

아무리 바쁘다고 하나 너무 무관심하셨던 것 아닌가. 세드릭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약간 실망감을 느꼈다.

“오라버니……?”

복잡한 감상에 잠긴 세드릭을 릴리엔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간절한 눈빛으로.

'아, 그러고 보니…….’

이건 이 아이가 처음으로 그에게 한 '부탁'이 아닌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세드릭이 황급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릴리에, 조속히네 선생이 될 만한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하마.”

“정말요?"

“그래, 정말이다. 뭐든 배우게 해 주마.”

너무 기쁜 나머지 릴리엔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저렇게나 좋아하다니…….’

진작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거였다. 세드릭은 착잡한 속내를 감추고 물었다.

“무얼 배우고 싶지? 기탄없이 말해 보아라.”

“예법이랑 화술이랑......"

릴리엔이 황급히 손을 꼽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께서 화구를 선물해 주셨으니 그림도 배우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악기랑 외국어도"

기쁨으로 뺨이 발그레하게 피어난 채 배우고 싶은 것들을 욕심껏 늘어놓는 여동생은 무척 귀여웠다.

어느새 세드릭의 입가에도 반쯤 미소가 걸렸다.

“알았다. 천천히 하나씩 해 보자. 아직 병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우선은 예법선생부터가 시급하기는 할 것 같구나.”

"네……!”

“고작 이 정도에 기뻐하다니.

좀 너무하군.”

이쪽은 마음껏 응석을 부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입장인지라 결코 만족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오라버니도 웃고 계시는 걸요.”

내가?

세드릭은 무심코 자기의 입꼬리를 매만져 보았다.

'정말이군. 올라가 있잖아.'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웃고 있었다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어리광 부려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에 비하면 확실히 기쁘긴 해.

고작 이 정도에 나란히 기뻐하는 오누이가 되는 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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