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3. 헤멘린나 대제후.
그로부터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예법 선생을 찾아보겠다고 세드릭은 말했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인선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게 아닐까.'
선생이 되어 줄 만한 사람의 약력과 신분을 검증하고 초빙해서 면접을 본다.
운이 나쁘면 반년이 지나도록 마땅한 선생을 구하지 못하기도 한다.
게다가 안 그래도 신중한 세드릭인데 릴리에의 일이라 평소보다 더 까다롭게 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천천히 기다릴 수밖에.’
그때부터 릴리엔은 넘쳐 나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몸이 약해서 장시간 야외 활동은 무리였다. 그러니 소일거리라고 해 봤자 대부분 실내 활동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릴리엔이 매진하고 있는 건…….
“네, 아가씨. 그 정도면 잘하셨어요.”
“생각보다 어렵네요.”
수공예 제품 만들기!
종목은 제국에서 흔하게 선물로 주고받는 장식용 매듭이었다.
릴리엔은 이미 완성된 매듭 장식의 대칭을 맞추려고 노렷다.
하지만 어떻게 만져 봐도 조금 어설픈 티를 벗길 수가 없었다.
'어른일 때처럼 섬세하게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야.'
이걸 이렇게 조금만 더 섬세하고 보기 좋게 만들고 싶은데
“제 생각엔 그만하시면 된 것 같은데요, 아가씨.”
헤이워스 부인이 넌지시 말렸다.
“매듭 장식을 처음 배우신 거잖아요. 3일 만에 그 정도 작품을 짜셨으니 정말 잘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가주님도 그 정도면 정말 만족해하실 거고요."
어떻게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매듭을 잡고 릴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오라버니께서 제가 뭘 드려도 좋다고 받아 주실 분이라 그러신 거죠.”
“호호, 그야 뭐.”
헤이워스 부인도 차마 아니라고는 못했다.
“그래도 아가씨 실력에 대해서는 빈말이 아니랍니다.”
장식용 매듭은 검을 차는 허리 띠에 매다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는 제국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가장 흔하게 선물하는 것 중 하나였다.
승리하고 살아서 돌아오길 기도 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매듭에 담는다는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릴리에의 것은 초심자가 만든 것 치고는 제법 선물 티가 났다.
“자, 그럼 아가씨. 이쯤에서 정리할까요. 이제 조금 있으면 예법 선생님께서 오실 거거든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오라버니는 꼼꼼하니까 시간이 더 걸리실 거라고 생각했는 데…….”
“예에,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헤이워스 부인의 말투에서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우선 준비를 할까요? 선생님을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니까요.”
'왜 말을 돌리는 걸까……?'
의아했지만 릴리엔은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부인이라면 해를 끼칠 의도로 그러는 건 아닐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거울 앞에 앉아서 해 주는 대로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쓰윽쓰윽, 머리가 빗겨지는 동안 릴리엔은 기대감으로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동안 이런 수업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릴리엔은 예비 대공비였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 찾아온 선생들에게 유모가지독하게 텃세를 부려서 제대로 교육받진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유모는 릴리에에게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게 분명했다.
‘허수아비처럼 부려 먹어야 하는데 똑똑해지는 것도 곤란했겠지.’
결과적으로 릴리엔은 대공비로서 내정을 다스리는 데 필수적인지식을 거의 배우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남편의 가솔들에게서도 외면을 받게 되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배움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이제는 방해꾼도 없으니 릴리엔은 최선을 다해 배우리라고 다짐했다.
“어디로 가나요?”
“세드릭 님이 어렸을 때 사용하던 학습실이 있는데 그쪽을 치워 두었답니다.”
방에서 나가기 전에 릴리엔은 완성된 매듭을 챙겼다. 혹시나 오가는 길에 세드릭을 만나거든 전해 줄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글쎄요, 어떤 분이 좋으세요?”
헤이워스 부인이 또 말을 돌렸다는 걸 눈치챘지만 릴리엔은 모른 척 “글쎄요” 하고 웃었다.
“딱히 바라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 분이시겠죠?”
귀족 아가씨의 교육은 보통 같은 여성이 맡는다. 그게 상식이다.
하지만 세드릭이 어린 시절 사용했던 학습실에서 릴리엔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불초소생이 오늘 아가씨에게 예법을 가르치게 될 예정입니다.”
'남자…….' 백발이 다 된 노인이기는 했지만 분명 기골이 장대한 남성이었다.
"이런,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알 안경을 쓴 호박색 눈동자가 마치 맹금류처럼 매서워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웃음을 짓자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 되었다.
“저는 정식 교사는 아니고 앞으로 황족으로 살아가게 되실 고귀 한 분께 딱 하루만 몇 가지 당부를 드리러 온 겁니다.”
'황족.’ 대외적으로 극비인 릴리엔의 결혼에 대해 알고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은 세드릭에게 상당히 신뢰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 놀랐냐는 듯 릴리엔은 얌전히 무릎을 굽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하루나마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자리로.”
릴리엔은 권해 준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못 배웠고 엉망이었다고는 하나 릴리엔에게는 대공비로서 살아본 기억이 있었다.
내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망신당하는 걸 싫어했기에 앉는 법, 걷는 법, 대화법 따위의 흠 잡히기 쉬운 외적인 부분만큼은 배워 두었다. 유모도 그것까지는 방해하지 않았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앉아 릴리 엔이 자리에 앉는 모습과 자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과연, 튜린 제후께서 자랑하실 만하군요.”
“과찬이십니다.”
쑥스러운 기색 없이 릴리엔은 차분한 미소로 칭찬을 받아 넘겼다.
“터울이 많이 지는 탓에 오라버니께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조건 곱다 하시는 버릇이 있으셔서요.”
"거참, 남매간에 우애가 퍽 깊은 모양이십니다.”
“오라버니께서 저를 귀애하시고 저는 그 마음에 간신히 화답이다.
마 하는 수준일 뿐인걸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릴리엔은 매서웠던 노인의 표정이 묘하게 다정해졌다고 느꼈다.
“이 사람이 듣자 하니 아가씨께서 동방의 다도에 능하시다고…….”
“민망합니다. 소일거리 삼는 수준이라서…….”
“상당히 특이한 취미로군요. 어쩌다가?”
릴리엔은 차를 마시게 된, 엄밀히 말해 세드릭에게 차를 타 주게 된 경위에 대해 담백하게 설명했다.
노인은 “으음”, “과연” 하고 종종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럼 저도 그 차라는 것을 한번 맛볼 수 있겠습니까?”
일일 교사가 하기엔 다소 주제넘은 부탁이었지만 릴리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지시를 받은 하녀가 가장 좋은다구와 차를 준비해 왔다. 곧 뜨거운 물과 깨끗한 다기, 간단한 간식거리가 완벽히 차려졌다.
“호오.”
노인은 감탄사를 냈다. 주전자가 테이블에 올라오다니, 생소한 차림새였다.
릴리엔은 익숙하게 다구를 다루었다. 신중하게 물을 붓고 기다리는 모습이 진지하고 차분해 보였다.
'소꿉장난이나 해야 할 나이일텐데 장난 같지가 않아. 동작이 능숙하군.'
진하게 우러난 차를 따른 릴리 엔이 물었다.
“혹시 단맛을 즐기시나요?”
"아니요, 그다지.”
“그러시다면 이대로…….”
솔솔 피어오르는 향기가 무척 좋은 차 한 잔이 눈앞에 놓였다.
노인은 기대하며 차를 한 모금마셨지만……
"으, 으음.”
'이, 이건.’ 싱글싱글하던 노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맛이 독특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어요.”
'아니…… 이건 맛이 독특한 수준이 아니라…….' 향기가 나는 와중에 쓰고 떫기까지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랬다. 여러 번 차를 내 왔지만 안타깝게도 릴리엔의 절망적인 실력은 전혀 개선된 바가 없었다. 본인이 끓인 차가 얼마나 끔찍한지 본인만 모르는 것도 여전했다.
“혹시 입에 안 맞으시면…….”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익숙지 않지만 나쁘진 않아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어쨌든 저 어린 아이가 정성껏 대접해 준 게 아닌가.'
이 노인은 상당히 비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도 유순한 릴리 엔의 눈빛을 마주하니…….
'맛없다는 말이 도로 쑥 들어가버리는구먼. 도로 물릴 수도 없겠어.'
예법 선생을 자처한 죄로 노인은 한 모금 더 차를 맛보았다.
다시 마셔 봐도 여전히 처음처럼 괴이한 맛이었다. 절로 차려진 다과에 손이 갔다.
'뭐라도 정상적인 음식을 맛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군.'
평소 그리 좋아하지 않는 간식이 절로 넘어갔다.
노인은 그렇게 차 한 모금에 다과 한 입을 야금야금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
……당연한 수순으로 카페인과 당분을 섭취하자 정신이 번쩍 나고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허, 놀랍군.'
빈 잔과 빈 접시를 보며 소녀가 보스스 웃었다.
“드시기에 괜찮으셨나요?”
“놀랍게도 그렇군요. 이것 참, 대접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병아리처럼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표정으로 릴리에 이 고개를 저었다.
“헤멘린나 대제후께 졸하게나마 대접해 올릴 수 있어 광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