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노인의 호박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가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놀랍군, 언제부터 눈치챘느냐?”
“자연스럽게 알았어요. 대제후께서 굳이 숨기지 않으셨으니까요.”
릴리엔의 약혼 사실을 언급한 것이나 예법 선생 치고는 제후의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로웠던 점 등등.
그랬다. 대제후는 딱히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니까 그래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로 간만에 아연했다. 노인은 눈을 끔뻑이며 눈앞의 아이를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예의 허리를 조이지 않는 아이용 실내복 차림이었다.
그 위에 체온 유지를 위해 도톰한 케이프까지 둘러서 모로 보나 귀엽고 온순해 보이는 어린 소녀 그 자체였다.
것 참, 영락없는 아이인데…
“자연스럽게 알았다라.”
방심했다.
“허면 놀라지는 않았느냐?”
“조금 놀라기는 했어요.”
솔직하게 놀랐다고 대답하는 모습은 또 영락없는 열두 살 아이라 대제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다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하릴없이 늙다 보니 호기심이 늘어서 말이다. 손주며느리를 보고 싶어서 강짜를 놓았단다. 이해해 주면 고맙겠구나.”
“대제후께서 이해를 구하시다니.
당치 않으세요.”
헤멘린나 선제후는 헤멘린나의 공작이자 알트해의 대선장이며 팔미앵의 백작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경외를 담아 그를 “대제후”라 칭했다.
“재미있구나. 만일 내가 대제후가 아니었다면 어쩔 요량이었느냐?”
“음…….”
릴리엔은 자세한 대답 대신 흐리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생각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게…… 아마 헤멘린나 대제후가 아니셨더라면 이렇게 저를 보실 수 없으셨을 거예요. 제 오라버니께선 저를 귀애하시는 만큼 제 안전에 신중을 기하시거든요.”
“허?”
입술을 오물거리며 하는 말이 맹랑하고 귀여웠다.
이것 참. 대제후는 껄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웬……!”
학습실 밖에서 헤이워스 부인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대제후의 오래된 심복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별일을 다 봅니다. 생전 저렇게 웃으시는 법이 없는 분인데.”
“어머, 그러신가요?”
“예, 고명따님이셨던 태후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좀체 소리 내서 웃으시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아주 오랜만이에요.”
헤이워스 부인이 뿌듯하게 어깨를 폈다.
“그러시면 저희 아가씨가 퍽 마음에 드신 모양이시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평생 모셔 온 분의 까다로운 성미를 잘 아는 심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내심 생각했다.
어쨌거나, 다시 학습실 안.
“좋다, 내 귀여운 손주며느리를 놀라게 했으니 아무래도 대가를 치러야겠구나.”
“네?”
“사양할 것 없다. 무엇이든 요구해 보려무나.”
뜬금없는 요구에 릴리엔은 난감했다.
'오라버니도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뭘 주려고 하시는 걸까..?'
하지만 릴리에 한정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세드릭에 비해 헤멘린나 제후의 제안은 뭔가 그녀를 시험하는 성격이 강하게 느껴졌다.
“농이 아니니 안심하고 잘 생각해 보아라.”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맹랑하지 못한 구석도 있구나.”
아까보다 조금 더 아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노인은 아이를 놀릴 요량으로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원하는 게 없다니, 그럼 어디 보자. 내 땅이라도 조금 떼어 주랴?”
“네?”
“아니면 내 딸아이가 소싯적 하던 보석이라도 내주고.”
그 말에 열린 문틈으로 귀를 기울이던 보좌관이 한 번 더 기겁을 했다.
'딸아이 보석이라니!'
그 딸아이가 태후였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노인은 하나뿐인 외동딸을 금쪽같이 여겼다. 그에게서 소중한 죽은 딸의 물건을 받아 내느니 차라리 작위 중 하나를 받아 내는 게 쉬울 터인데.
'진심이신가?'
물론, 진심이었다. 그 정도로 대제후는 릴리엔이 마음에 들었다.
“자, 기탄없이 말해 보아라.”
릴리엔은 직감했다. 여기서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태후의 보석이나 토지 같은 부담스러운 물건을 떠안게 생겼다.
“그렇다면…….”
릴리엔은 잠시 생각하다가 허리에 찬 주머니를 풀었다.
노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게 무어냐?”
"여기 오기 전에 막 완성한 장 식용 매듭이에요.”
짙은 남빛 비단실 매듭.
꼬임이 제법 복잡했지만 실을 잡은 것이 고르지 못하고 조금씩 울퉁불퉁한 물건이었다.
“주신다는 것이 제겐 너무 과분해서 엄두가 안 나요……. 그러하니 차라리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받아 주시는 걸로 대신하면 안 될까요?”
“이런.”
노인이 짐짓 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나직하게 타일렀다.
“나는 네게 선물을 하겠다고 한 것인데 이런 처사는 당황스럽구나.”
타일렀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아이라면 곧장 울먹거리다 울음을 터트릴 기백이 있었다.
그러나 릴리엔은 차분히 웃을 뿐이었다.
“대제후께서 이 엉망진창인 물건을 받아 주신다면 평생에 자랑거리가 될 거예요. 그 영예를 제 선물로 삼고 싶어요. 안 될까요?”
“허…….”
기가 차다는 듯 대제후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흐, 하하, 하! 참으로 걸작이로구나, 걸작이야!"
호탕하고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학습실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사십여 년을 대제후와 함께한 보좌관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정말…… 원래는 저런 분이 결코 아니신데……."
"예, 그러실 겁니다.”
헤이워스 부인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안 그러시던 분이 저러시, 는 거, 그야말로 아주 릴리엔 아가씨다운 일이랍니다.”
"거참…….”
보좌관이 반신반의하거나 말거나, 헤이워스 부인은 흐뭇하게 콧대를 세울 따름이었다.
* * *
그로부터 약 한 시간여 뒤.
"이런, 튜린 후가 아니신가. 내 참으로 보기 힘든 얼굴을 배견하오.”
“……대제후를 뵙습니다.”
쯧쯔. 노인은 혀를 찼다.
분위기를 풀자고 한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저리 뻣뻣하다 못해 차가워서야.
“거, 성깔 참으로 여전하오.”
“굳이 먼 걸음을 오셔서 제 어린 누이를 직접 시험하신 분께 비하겠습니까.”
"어허. 시험이라니, 말이 과하오. 본 후는 그저 손주며느리 될 아이가 궁금했을 뿐이거늘.”
세드릭은 대꾸조차 안 했다. 자칫 무례할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대제후는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선대 튜린 제후와 연이 있었던 노인으로서는 이 청년이 손주만큼이나 가깝게 느껴졌다. 어지간한 무례는 같잖기만 하다는 뜻이다.
'아비가 죽고 나서는 저도 같이 말라 죽을 셈인가 싶더니만.’
다행히 지금은 얼굴이 훨씬 나아졌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왜, 보면 아니 되오?”
“불편합니다.”
대제후는 혀를 찼다. 하여간 사내놈들은 걱정을 해 줘도 이 모양이다.
'저놈이 제 아빌 닮아서 저 모양이지.’
“하여간, 내 이슬라르 혈통들이 하나같이 뻣뻣한 줄은 진작 알았지.”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한데 이 혈통에서 어찌 그리자분자분한 아이가 나왔을꼬?”
굳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세드릭은 대제후가 말하는 게 릴리엔임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굳이 만나 보실 필요도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허, 이것 봐라. 튜린 후, 지금 웃소?”
거 보란 듯 엷은 비웃음을 띤 얼굴이 이제야 좀 사람같이 보였다.
“사람 말을 안 들으시니 이리 헛걸음을 하시지 않습니까.”
대제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어찌 헛걸음을 했다 하겠소? 후의 귀애하는 동생이 앞으로 내게 편지를 써 준다고 굳게 약속하였는데.”
멈칫, 세드릭의 표정이 굳었다.
노회한 대제후는 옳거니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능글맞은 웃음을 짙게 머금었다.
"…서신 왕래를 해 준다고 했단 말입니까, 그 아이가?”
“내 말했지 않소. 이 집안 혈통답지 않게 다정한 아이더라고.”
생각해 보니 세드릭은 릴리에에게서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언제든지 보려면 볼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편지를 쓸 필요가 없어서였지만 불쑥 치솟은 질투가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 했다.
“미래의 손주며느리와 교분을 돈독히 다졌으니 내 헛걸음을 한 셈은 아니지. 아니 그렇소?”
“……좋으십니까?”
“좋다마다. 아, 내 이것을 깜빡할 뻔했군.”
불현듯 대제후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짙은 남빛 매듭 장식이었다.
“선물을 준다고 하니까 도리어 내게 이걸 다 주지 않겠나. 말은 안 했지만 그 기지에 아주 감탄을……, 튜린 후?”
세드릭의 상태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