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건…….”
충격으로 떨리는 푸른 눈동자가 매듭 장식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매듭 장식을 만들었다고요?”
"만들었다던데, 못 받았나?"
“……예.”
이런. 아무래도 그가 받은 이 매듭이 소녀가 만든 첫 매듭인 모양이었다.
첫 매듭은 보통 아버지 같은 가장 가까운 보호자에게 주게 되어 있었다.
설마 그 특별한 매듭을 가로챈줄은 아무리 대제후라도 예상치 못했다.
여기까지 어린 청년을 놀릴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세드릭이 진심으로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노인은 머쓱해졌다.
“거……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 튜린 후, 이건 아마 연습 삼아서 만든 물건일 거야.”
“아마 내가 선물을 준다니까 받기 부담스러워서 임기응변으로 기지를 발휘한 셈인 거지, 응?"
“튜린 후?”
틀렸다. 가망이 없었다. 세드릭은 완전히 울적해져 있었다.
'음…… 불쌍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못 주지.'
대제후는 눈치를 보며 슬쩍 매듭을 다시 주머니로 챙겨 넣었다.
* * *
헤멘린나 대제후의 귀향길.
벙벙 짓던 웃음은 사라졌지만 대제후의 주름에는 부드러운 표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고명따님 되시는 태후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보는 표정이다.
보좌관은 처음에는 너무 놀라 어이가 없었지만 곧 사십여 년을 모신 주인의 기분이 좋은 것이 그저 기뻐졌다.
“아까 그 어린 아가씨가 퍽 마음에 드신 모양이십니다."
가타부타 긴 말은 없었지만 대답 자체가 흔쾌했다.
노련한 보좌관은 더 캐묻지 않고 조금 기다렸다. 그러자 이내 주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말이야, 도로 내게 선물을 주지 뭔가. 아주 괘씸하고도 귀여웠다.”
“아이고, 그 조그맣고 여려 보이던 아가씨가 그런 당찬 짓을 하셨습니까요?”
“그래, 그뿐인가. 세드릭 그놈이 사람 꼴이 다 됐더라니까. 덕분에 아주 재미있었다."
대제후가 유쾌하게 킬킬 웃었다.
“그 아이가 생각보다도 막내 그놈의 배필 노릇을 아주 제대로 하게 생겼다. 두고 볼 일이야.”
그러면서 대제후는 주머니에서 남빛 매듭을 꺼내 보았다.
사실, 노인이 세드릭의 울적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이 매듭을 내놓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 보았는데 이걸 막내 손주 놈에게 주어야겠다. 내 나이가 이제 여든인데 칼을 찰 나이는 지나지 않았는고.”
본인의 아이디어가 만족스러워서, 대제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척하면 척인 사십년 지기 보좌관도 얼쑤 박자를 맞추었다.
“약혼녀께서 보내신 선물인 줄 모르게 말입니까요?”
“당연하다마다.”
채신머리없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음흉했다.
“마침 그놈이 곧 전쟁터에 또 불려 나가게 생겼는데 잘 되었단 말이지.”
“말이라굽쇼. 아예 전해 드리는 게 아니라 그냥 몰래 대공 전하의 허리띠에 달아 버리라고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더 재미있겠습니다.”
사십 년 동안 성격 꼬인 주인을 모시면서 상당히 물들어 버린 보좌관이 제안하자 헤멘린나 대제후가 “옳다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돌아가는 대로 속히 시행해라.”
“예에, 분부대로 합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쿵짝이 척척,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음흉하고도 흐뭇하게 웃었다.
본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들에겐 새파란 젊은이들의 연애사만큼 재미있는 것도 또 없는 법이라서 그랬다.
* * *
며칠 후,
“대공 전하, 입실해도 되겠습니까?”
딱히 대답은 없었다. 수하는 잠시 기다린 후에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서재로 쓸 법한 중후한 방이었다. 그러나 문을 마주보는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건 생각보다 나이 어린 청년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있는 선이 반듯한 얼굴. 흰 이마 위로 화사한 백금발이 몇 가닥 흐트러져 있었다.
대충 보면 청년이겠거니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하관이나 뺨에 약간 덜 자란 기색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미인이란 걸 충분히 알 수 있는 고운 얼굴이긴 했다.
“오늘 말씀이 좀 심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경.”
긁혀서 쇳소리가 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청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드러난 눈동자는 보석처럼 화사하고 섬세한 보랏빛이었다.
“우리 작은 형께서는 귀여운 마테오를 덜컥 죽여 버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니까.”
아이반 아이작은 스스로 충실한 수하라고 자부했지만 이따금 이렇게 기가 막히는 감정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얼굴이 아름다우면 뭘 해. 속에 든 게 인종 성별 나이를 초월하는 상말종인데.’
그러나 충실한 수하인 죄로 그는 내심으로만 혀를 차며 좋게 타일렀다.
“그렇다고 해서 식음을 전폐한 여덟 살짜리에게 계속 굶으면 차라리 둘째 숙부에게 도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십니까?”
다미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담은 아니었는데.”
“진담이 아니면 다행인 줄 아십니까?”
쌍말도 정도가 있다. 여덟 살 아이에게 얼마 전에 아버지를 죽인 둘째 숙부를 운운하는 건 좀 심했다. 솔직히 자다가 칼을 맞아도 싸다고 아이반은 생각했다.
“그러게 애초에 날더러 애를 좀 살펴보라고 닦달한 경이 잘못했지.”
“아, 그렇게 대형 사고를 치실 줄 누가 알았답니까!”
"아이반 아이작 경.”
다미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딱히 이렇다 할 만큼 드러난 표정이 없었으나…….
‘아차..'
아이반은 알아챘다. 선을 넘었다.
“오늘따라 내 주변에 목숨 안아까운 사람이 좀 많은가 봐.”
"실언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아이반은 눈치를 살폈다.
'짜증을 내시는 타이밍이 평소보다 좀 이른데.’
"…얼마나 주무셨습니까, 전하?”
“묻지 마라.”
아이반은 눈치챘다.
'아주 못 주무셨구나!'
도자기처럼 말끔한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다미언이 파리라도 쫓듯 손을 내저었다.
“마테오의 일은 그쯤에서 내버려 둬라. 아니면 내가 모르게 네가 신경을 쓰던가.”
회전의자에 푹 잠긴 채 위태롭게 발을 까딱거리던 대공이 불량스럽게 중얼거렸다.
“오기로라도 살겠다면 사는 것이고 이 꼴 저 꼴 다 더러워서 청청하게 죽겠다면 그도 내버려 둬. 나로서도 빨리 손을 떼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까.”
‘거참, 어떻게 혈육한테…' 이번에는 용케 속으로만 구시렁댔지만 구겨지는 표정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다행히 대공은 거기까지 트집 잡진 않았다.
“그래서 용건은 끝?”
“아니요.”
여전히 부루퉁한 채로 아이반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부터 받으십시오. 허리띠 수선이 끝났다길래 제가 받아왔습니다.”
"음.”
무심하게 쓰던 물건을 넘겨받던 대공의 손에 낯선 감촉이 스쳤다.
“……아이반, 이건 뭐지.”
뜨끔했지만 아이반은 내색하지 않고 무던히 대답했다.
“보면 모르십니까? 매듭입니다.”
“내가 이런 걸 내 손으로 단 기억은 없는데.”
“제가 달아 드렸습니다. 대제후께서 달아 드리라고 하셔서요.”
다미언은 말없이 매듭의 수술에 손가락을 얽고 있었다. 혹시나 성격 나쁜 주인이 단숨에 뜯어내버릴까 봐 아이반은 조마조마했지만.….
"뭐, 그만 됐어. 그 옆구리에 낀 건 뭐지?”
“아, 예. 이건요.”
화제 전환에 반색한 아이 반이 서둘러 끼고 온 서류를 제출했다.
“전하의 혼인 증서입니다.”
혼인 증서.
걸핏하면 영주들 간의 전면전이 잦았던 만큼 제국에서는 재혼이 상당히 흔했다. 원한다면 재혼이 아니라 혼인 무효를 통해 서류상으로는 초혼이 될 수도 있었다.
조건은 허혼 증서를 교환하고서부터 3년.
3년 안에는 신랑과 신부 혹은 양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나 혼인 무효를 청구할 수 있었다.
이 근본 없는 법이 제정된 건 딱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전쟁 통에 혈맹을 쉽게 배신하기 위하여.
혼인 관계가 무효화되었으니 우리의 동맹 관계도 무효, 따라서 내가 네 뒤통수를 치는 것은 매우 정당함. 이런 식으로 골 때리는 주장을 할 때나…….
두 번째, 누군가의 결혼 동맹이 우리의 이익에 반할 때 그 결혼을 깨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결혼 3년 전에 미리 만나서 허혼 증서를 교환하는 것.
물론 이렇게 될 경우 정작 당사자가 필요할 때 혼인 무효를 청구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대부분의 제국 귀족들은 굳이 3년 전에 증서를 교환할 필요를 못 느꼈다.
제국의 결혼은 신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할 때 결혼하고 원할 때 이혼하는 편리 성을 원했다.
굳이 3년이나 전에 만나서 증서를 교환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 뿐이었다.
첫 번째, 죽어도 헤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할 때.
두 번째, 무슨 일이 있어도 파기될 수 없는 혈맹에 준하는 결혼일 때.
다미언과 릴리엔의 결혼이야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사실 대제후가 튜린을 방문한 목적도 릴리엔을 만나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증서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다미언은 심드렁하게 증서를 다시 한번 펼쳐 보았다.
양자가 상호 신실로 혼인에 합의한다는 간단한 문구와 날짜, 기명날인만 존재하는 심플한 서류.
“이로서 비공식적으로나마 유부 남이 되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영혼의 편린조차 남아 있지 않은 축하 인사였다. 대공은 중얼거렸다.
"릴리엔 마리에스타드 이슬라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