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7화 (17/155)

17화.

“3년 뒤 결혼식장에 같이 들어 가시게 될 분의 이름 정도는 이제 그만 외우시죠."

대공은 대꾸도 하지 않고 서류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기만 했다. 아이반은 꺄악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이고, 전하! 그 중요한 서류를! 좀 소중히 다뤄 주시면 안됩니까?”

“정 소중하면 알아서 치워.”

벌써부터 저래서야 결혼해서도 1년에 며칠이나 얼굴을 보게 될는지.

아이반은 툴툴대면서도 중요한 증서를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다 끝나거든 출전 준비나 해둬라."

“예?”

아이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북부 전선 차출이 벌써 결정이 났단 말입니까?”

“그래.”

“출전 명령서는요?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개전하기도 전에 보냈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건 아직 안 왔지."

“예에?”

아이반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팍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개풀 뜯어 드십니까? 명령서도안 왔는데 무슨 출전 준비를.......”

다미언이 보랏빛 눈동자로 가늘게 웃었다.

“작은형의 속이야 뻔하지. 내가 없어야 마테오에게 손이라도 뻗쳐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거든.”

다미언을 전쟁터로 내몬다. 그리고 보호자가 부재한 사이 황태자를 손에 넣는다.

“아니 그럼.”

“다시 말하지만 클로드는 마테오를 바로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그자가.

다미언이 책상을 건드려 툭툭소리를 냈다.

“승계는 불완전하고 제후들은 술렁이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선황의 황태자를 죽인다? 반란을 일으키고 독촉하는 셈이지.”

그리고 그 반란을 일으키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여기, 다미언 루펜바인이었다.

“클로드는 반드시 마테오를 산 채로 궁정에 등장시킬 거야. 그리고 그 애의 손으로 계승권 포기 각서에 서명을 하게 만들겠지.”

그 후로 한 10년쯤만 지나면 그 애를 죽인대도 누가 신경이나 쓸까.

남의 일이라도 서술하듯 단조롭고 나른한 말투였다.

“꽤 확신하시는군요, 전하."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본디 형제란 서로 경멸해도 닮은 사고방식을 갖는 법이라서.

대공의 입가에 잘 드는 칼 같은 웃음이 스몄다. 스산하고 아름다웠다.

4. 은방울꽃 소로리티.

그로부터 또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순조롭게 깊어지고 있었다.

세드릭의 애를 먹이던 릴리엔의 선생들도 적당히 구해졌고 덕분에 릴리엔은 조금씩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으음…….”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릴리엔의 기상 시간이 늦어졌다. 뿐만 아니라 깨워도 영 맥을 못 추곤 했다.

“몸이 안 좋으시면 오늘은 수업을 쉬시면 어떨까요?”

"으음, 괜찮아요.”

쉬겠냐는 말에 칼같이 눈을 뜬다. 릴리엔은 꼭 이런 데서 그 세드릭의 동생이라는 티를 내곤 했다.

'어휴, 안 닮았으면 하는 부분을 닮으셔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헤이 워스 부인이 비몽사몽 중인 릴리 엔의 조그만 얼굴을 조심스럽게 씻겼다.

릴리엔과 세드릭이 서로 닮은 안 좋은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드시지 않고요?”

부드러운 권유에도 릴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식사량이 적은 아이에게 억지로 음식을 권하면 아이는 점점 더 음식을 꺼리게 된다.

까다로운 세드릭을 길러 본 경험으로 그를 잘 아는 부인은 더 권하지 않고 접시를 치우게 했다.

잠시 후.

“……네, 아주 좋아요, 레이디릴리에. 참으로 습득이 빠르시군요.”

배운 대로 막힘없이 화술을 피로한 릴리엔을 예법 선생인 라니 스터 후작가의 대부인이 크게 칭찬했다.

대부인은 전대 라니스터 후작부인으로 헤멘린나 대제후가 천거한 인물이었다.

부인은 대제후의 처가 쪽 인척이었는데 원래는 예법 선생을 자처할 만한 신분이 아니었다.

장성한 자식들을 죄다 시집, 장가보내고 조금 이르게 미망인이 되어 외로운 참만 아니었다면 아무리 대제후의 권유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길 잘했지.’

릴리엔은 타고난 성품 자체가 얌전했고 다소 엄하게 가르쳐도 곧잘 따랐기 때문에 금방 이 딱딱한 대부인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이만하면 예정대로〈은방울꽃소로리티>에 참석하셔도 될 것 같군요.”

〈은방울꽃 소로리티〉.

제국에는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어린 영애들이 모여 미리 친구도 사귀고 화법이나 예법을 연습하게 하자는 취지의 작은 모임을 꾸리는 관습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은방울꽃 소로리 티>는 역사가 깊고 명망이 높은 소모임 중 하나였다.

“조금 긴장되네요.”

“어린 귀족 영애들에게 좋은 소로리티에 소속된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일단 한번 소로리티에 소속되면 그 유대감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 칼만 안 든 전쟁터인 사교계 내에서도 같은 소로리티 출신끼리는 서로 돕고 사는 암묵적인 룰이 절대적으로 지켜졌다.

어떤 귀부인은 자기 소로리티출신이 아니면 며느리로 맞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딸자식을 둔 부모는 어떻게든 아이를 명망 있는 소로리 티에 속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곤 했다.

‘소로리티에 가입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릴리엔은 예전에는 그렇게 좋은 소로리티 소속은 아니었다. 아무리 가문이나 신분이 고귀해도 아무 노력이나 연줄 없이 좋은 소로리티에 소속되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은방울꽃 소로리티〉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여기 대부인 덕분이었다.

“선생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같은 은방울꽃 소로리티출신인 대부인이 후견인 자격으로 릴리엔의 가입을 직접 추천했다.

릴리에의 실수는 곧 대부인의 신용에 즉각적으로 반영되고 말것이다.

걱정하는 릴리엔과 달리, 대부인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내 앞에서 만큼만 하실 수 있다면 망신을 당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말투는 딱딱했지만 결국 칭찬이었고 안심하라는 위로였다.

정식 사교계 데뷔만큼은 아니지만 소로리티 데뷔는 귀족 여성의 일생 중에서 중요한 축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예의 티타임에서 세드릭마저도 이렇게 물어볼 정도였다.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겠지?”

“헤이워스 부인과 선생님께서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주고 계세요.”

언제나 그렇듯 당사자인 릴리엔 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더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어땠더라?'

책으로 읽었던 자신의 비참한 이야기는 이제 거의 직접 겪은 기억처럼 흡수되어 있었다.

당시의 기억은 희미했다. 유모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참석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제대로 예법을 배우지도 못한데다 사람과의 교류도 적어서 사회적 기술도 떨어지는 통에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었지.'

첫날 모임에 참석했다. 돌아온 날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며 밤새 울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릴리엔은 씁쓸하게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주님.”

알렌이었다.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뭐지, 알렌?”

“아가씨께 온 선물입니다. 대제후께서 보내셨습니다.”

세드릭의 표정이 미묘하게 차가워졌다.

예의 그 매듭 사건 이후 릴리에은 시무룩하게 토라진 오라버니를 달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 매듭은 연습작이었다. 토지나 보석을 주시겠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타당한 변명에도 세드릭은 좀처럼 기운을 내지 못했다. 결국 릴리엔이 다시 만든 매듭을 받고서야 마음을 풀었다.

“……열어 보아라, 릴리엔.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구나.”

뭔지 보고 저것보다 더 좋은 선물을 주어야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별거 아니어야 할 텐데…….'

릴리엔은 난감해하며 상자를 받았다. 열어 보니 그곳에는…

"어머, 세상에나.”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햇빛을 머금어 수천 가지 빛으로 반짝거리는 목걸이였다.

얼른 눈에 들어오는 건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한 굵은 다이아몬드 다섯 개였다.

그러나 천천히 살펴보면 줄과 세공 사이사이를 연결한 작은 보석까지도 죄다 다이아였다.

어찌나 사방팔방 빛을 뿜어내는지 눈이 산란할 지경의 귀물이었다.

“세상에……, 천사의 고리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어요.”

주인의 심기를 위해 별로 놀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헤이워 스 부인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동봉된 카드에는 유려한 필치로

“호화로운 전쟁의 서막을 기념하며 좋은 투사로 살아남길”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태후께서 소장 중이던 '빛의 눈물' 연작 중 가장 유명한 목걸이가 아닌가 싶군요.”

“네?”

알렌의 말에 릴리엔은 상자를 놓칠 뻔했다.

"아가씨!”

헤이워스 부인이 얼른 잡아 주지 않았다면 태후의 목걸이를 내동댕이치고 말 뻔했다.

릴리에이 잔뜩 당황한 눈빛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닌 것 같아요.”

줄곧 말이 없던 세드릭이 한숨을 쉬었다.

“비슷한 생각이다마는 대제후께서 보내신 선물을 거절하기는 어렵겠구나.”

“하지만 이걸 걸고 소로리티에, 데뷔하면…….”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고 말겠지.”

뭘 줘도 저것보다 거창한 선물이 되긴 어렵겠다는 생각에 세드릭은 심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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