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하지만…… 저와 대공 전하의 약혼은 대외적으로 극비 사항이라고 하셨잖아요."
이 결혼이 외부에 알려지면 황제는 튜린과 황태자파의 동맹을 깨기 위해 릴리엔을 노릴 것이다.
“한데 이런 선물을 받으면……….”
태후의 보석이라 함은 대공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뜻도 된다.
누가 봐도 약혼녀나 걸고 나올 법한 보석!
세드릭은 고개를 저어 릴리엔의 염려를 일축했다.
“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소로리티에 참석하는 영애의 부모는 다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 새어 나갈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세력권 내에서 릴리에이 앞으로 어떤 위치에 오를지 확실히 알려 주는 표징이 될 것이다.
‘미래의 대공비..'
그 귀한 아가씨에게 행여 실수로라도 무례를 범하지 말라는 대제후의 준엄한 의도가 담긴 물건인 셈이었다.
이걸 걸고 나가면 예전처럼 무시당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기고 말 것만 같은 이 예감은 공연한 불안인 걸까?
* * *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침내 릴리에이 소로리티에 데뷔하는 날이 도래했다.
보통 소로리티는 기혼 여성이 소로리티 사프롱이 되어 모임을 주관하고 어린 소녀들을 돌보아 준다.
소로리티 사프롱이 되려면 해당소로리티 출신이어야 하고 소속가문이나 귀족 부인으로서 소양에 흠잡을 곳이 없어야만 했다.
소로리티의 사프롱이 되는 건 굉장한 영예였다. 현재 은방울꽃 소로리티의 사프롱은 대부인의 며느리인 라니스터 후작 부인이었다.
후작 부인은 시어머니의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번 은방울꽃 소로리티의 모임을 라니스터 가의 별택에서 직접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모임에 참석하는 릴리엔을 보다 살뜰하게 맞이하기 위한 배려였다.
봄이 깊어 장미가 사방에 만개한 계절이었다. 릴리엔은 선물하기 위해 가져온 튜린 영내의 장미 꽃다발을 직접 품에 안았다.
“선생님!”
“오셨군요, 레이디 릴리에.”
책을 덮고 릴리엔을 맞이한 대부인이 조금 인상을 썼다.
“세상에, 그 무거운 것을 직접 들다니. 하인들을 민망하게 할 생각인가요?”
“후작 부인께 드릴 것은 하인들이 들고 있어요. 선생님께 드릴 꽃만큼은 제가 직접 가져오고 싶어서요.”
“.......”
사사건건 기특하긴!
대부인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억제하고 꽃다발을 받았다.
“아주 호사스럽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큼직한 화형에 주름진 겹꽃잎.
튜린 장미는 작약만큼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건 특유의 진한 향기였다.
그 값비싼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한아름 가득 안고 와서인지 릴리에에게서도 같은 장미 향기가 풀풀 풍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저 목걸이는…….’
현명한 대부인은 릴리에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자마자 헤멘린 나 대제후의 뜻을 헤아렸다.
아무래도 그녀의 기특한 제자는 시외할아버지로부터도 끔찍할 정 도로 귀여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저 목걸이 때문에 일대 파란이 일어나겠군.'
***
대부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소로리티에 참석할 정도가 되면 소녀들은 부쩍 치장에 열과 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비슷한 또래끼리 모여 있으니 서로 장신구며 입고 있는 옷차림이 비교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들 유명한 보석에 대해서는 훤했다.
대부분의 소녀들이 릴리엔의 목에 걸린 목걸이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뜻이다.
“……여러모로 양해해 주신 덕분에 귀한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릴리엔이 무던히 인사를 마치자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잠시 의례적인 자기소개와 근황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몇몇 눈치 빠른 소녀들은 서로 의미 있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한데 레이디 릴리에, 아주 아름다운 목걸이를 걸고 나오셨네요.”
이럴 때는 과하게 쑥스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하거나 기뻐해서도 안 된다.
릴리엔은 담담히 웃으며 “데뷔기념 선물로 과분한 물건을 받았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쓸데없는 질시를 피하기 위한 신중한 어휘 선택이었다.
“그렇군요. 아주 잘 어울려요.”
“귀한 선물이네요. 축하드려요."
덕분에 소녀들도 거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저 만져 봐도 되나요? 조금만.”
개중에서도 특히 어린,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녀가 물었다.
다소 무례한 요구에도 릴리엔은 웃으며 허락했다. 용기 내 목걸이를 만져 본 소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귀여운 광경에 언니 축에 속하는 소녀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중 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솔라리아, 레이디 릴리엔께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지.”
“앗, 네! 귀한 물건을 만져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솔라 리아 라니스터예요.”
“라니스터 후의 차녀 되시는군요.”
정황상 주의를 준 소녀는 그녀의 언니인 것 같았다.
“두 분 다 선생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도 할머님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솔라리아!”
솔직하고 직설적인 동생의 어투에 언니 일라시아가 당황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솔직하고 귀여운 게 레이디 솔라리아의 장점이죠.”
“그나저나 레이디 릴리에, 라니 스터 부인께 가르침을 받다니 부럽네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편승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다들 눈치채지 못할 만큼.
“……레이디 마리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마리앤의 옆에 있던 소녀가 겨우 눈치를 했다.
“어딘가 미령하신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쏘아붙이듯 대답하면서 마리앤은 집요한 시선으로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열넷이 된 마리앤은 달콤한 금발에 매력적인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대단한 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앤은 블란쳇 공작가의 막내딸이었고 헤멘린나 대제후의 처조카뻘이기도 했다.
예쁜 데다 권력자의 비호를 받으며 자란 이 어린 소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늘 모임의 중심에 선 건 마리 앤이 아니라 릴리엔이라는 소녀였다. 그녀는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보였다.
늘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마리앤인지라 불쾌한 감정이 릴리엔에 대한 호기심을 압도하고 말았다.
'게다가 저 목걸이…….’
마리앤은 늘 헤멘린나 대제후의 위세를 자랑했지만 사실 대제후는 마리앤을 별로 귀여워하지 않았다.
마리앤이 태후가 소녀 시절 쓰던 장신구를 늘 선망의 눈길로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제후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친하게 지내던 소녀들이 그녀의 기분을 얼른 눈치채고 달래 주기는커녕 릴리에에게 관심을 보이기 바빠 더 화가 났다.
“참 예쁜 목걸이죠, 레이디 마리앤?”
그래서 옆에 앉은 소녀가 마리 앤의 집요한 시선을 잘못 해석하고 이렇게 말을 붙였을 땐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요, 레이디 소피아.”
마리앤이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저건 대공 전하 어머님의 유품이에요. 저런 선물을 주신다고 사양하지 않는 건 조금 경솔하지 않은가 생각해요.”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릴리엔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리 앤에게 닿았다.
'아.'
활활 타오르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고 릴리엔은 겨우 생각해 냈다.
'저 아이는 분명 레이디 마리앤…….’
본래대로라면 대공비가 된 후에 만나게 될 소녀였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꽤 적대적으로 구는구나.'
기억을 떠올리느라 대답이 늦는 릴리엔을 보고 소녀들은 날카로운 말에 아이가 당황했겠거니 생각했다.
“레이디 마리앤께서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그런 릴리엔을 딱하게 본 일라 시아가 나섰다.
“게다가 선물을 받은 사람이 경솔하다는 소릴 들으면 선물을 한 헤멘린나 대제후의 입장이 어떻게 되시겠어요.”
소로리티 사프롱의 딸이자 또래 중에서도 어른스러운 일라시아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감이 있었다.
얼어붙었던 소녀들이 “그래요”
하고 뒤따라 동조를 표했다.
이쯤 되면 분위기상 마리앤은 알아서 말이 지나쳤다며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소녀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일라시아와 다른 소녀들은 포기하고 분위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오늘 레이디 릴리에께서 저희에게 신기한 대접을 해주실 예정이시라면서요?"
소로리티에 데뷔하는 소녀는 기존 멤버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꽃과 작은 장신구 같은 일반적인 선물에 더해 릴리엔은 한 가지 대접을 더 계획한 참이었다.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전환에 편승했다.
“부끄럽지만 제가 동방의 다도라는 관습에 취미를 붙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