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사과받기를 고집하거나 마음 상한 티를 내서 모임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의연한 모습에 소녀들은 내심 감탄했다.
'과연, 미래 대공비가 될 소녀다워’
'우리 은방울꽃 소로리티에 가입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감탄은 곧 호의로 이어졌다.
"다도라니, 저도 말은 들어봤지만 실제로는 처음이에요.”
“직접 차를 끓여 주신다고요?
너무 과분한 대접인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사실 다들 릴리에에 대한 호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마리앤이 망친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과장되게 기대를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마리앤은 자신이 모두에게 외면을 당했다고 받아들였다.
'짜증나, 저 애……!'
아까까지는 단순한 질투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미움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릴리엔을 미워할 이유가 생겨 버렸다.
물론 릴리에도 그를 눈치챘다.
'모른 척할 수밖에 없겠는걸.'
아무래도 레이디 마리앤과의 사이는 개선이 안 될 모양이었다.
대다수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한 명의 적의 어린 시선을 받으며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차를 내렸다.
워낙 자주 해 본 탓에 동작이 능숙했다. 들고 있는 도구가 죄다 금보다 귀한 도자기여서인지 하녀나 하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머, 향기가 아주 좋네요"
“찻잎을 숙성시켜 좋은 향기를 배게 한 거예요. 다들 드시기가 어떨지 모르겠어요."
릴리엔은 어린 소녀들을 위해 차에 설탕을 추가했다. 소녀들은다들 한 모금씩 차를 마셨다.
‘음.'
'이건 좀……'
첫맛은 씁쓸하고 달았다. 생소했다.
하지만 일단 목으로 차를 넘기자 코 안쪽으로 화악 좋은 향기가 올라왔다.
“어머나.”
세드릭이나 헤멘린나 대제후 같은 무딘 남자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의 매력이었다.
더해 솔직한 대부인을 만나 요근래 릴리에의 차 끓이는 솜씨가 약간이나마 발전을 이룩한 참이기도 했다.
“향기가 정말 좋아요……!”
"입안이 깔끔해지는 느낌이네요.”
“과자랑 같이 먹으면 정말 잘 어울려요. 목도 안 메이고요.”
“이런 날씨에 레몬에이드를 마시자니 좀 추웠는데 이건 따뜻해서 좋아요.”
호평이 쏟아졌지만 마리앤은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나마 옆에 앉은 착한 소피아가 망설이다가 작게 주의를 주었다.
"…레이디 마리앤, 대접해 주신 것에 손도 대지 않으면…….
저는 당신의 평판을 해칠까 걱정이 돼요.”
“.........”
안 그래도 소녀들이 마리앤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 차도 마시지 않을 건가?'
'고집이 센 줄은 알았지만, 참……'
은근한 비난이 섞인 눈빛에 마리앤은 마지못해 차를 한 모금마시고 말았다.
"읍.”
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터라 그녀에게 차는 쓰고 텁텁하고 달기까지 한 괴상한 액체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마리앤이 인상을 쓰자 소녀들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왜 저러나 몰라.'
'여기서 자연스럽게 칭찬 한마디만 해도 분위기가 풀어질 텐데.’
‘마리앤은 옛날부터 저랬어.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니까.'
결국 그녀의 태도는 소녀들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던 마리앤에 대한 불만까지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
마리앤을 향한 분위기가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결국 이번에도 일라시아가 나섰다.
“레이디 릴리에, 차에 대한 답례로 정원을 안내해 드리고 싶네요.”
“저도 같이 가요.”
“저도요.”
대다수의 소녀들이 우르르 일어 섰다. 다들 마리앤이 망친 분위기를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
그 중에서도 솔라리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 기까지 했다.
'이게 뭐야……!’
결국 자리에 남은 것은 마리앤과 옆에 앉아 있던 마음 착한 소녀 한 명뿐이었다.
모욕감을 느낀 마리앤의 뺨이 이 붉어졌다. 옆에 남아 준 소녀, 소피아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가 났다.
'내가 이런 애한테까지 동정받는 처지가 됐단 말이야? 그 계집애 때문에?’
마리앤은 평소 가문도 비교적 한미하고 착하기만 한 소피아를 은근히 무시해 왔던 것이다.
“저기, 레이디 마리앤…….”
“시끄러워요!”
앙칼지게 소리치자 소피아가 놀라 딸꾹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마리앤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까짓…….’
테이블 위에 차려진 다기를 보고 더욱 화가 치솟은 마리앤은 손을 뻗어 단숨에 테이블을 쓸어버렸다.
“꺄악!”
다기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소피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쩜 좋아!’
마리앤은 그러고도 분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래요, 저희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맞아요, 레이디 마리앤도 뭔가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소녀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전말은 이랬다.
분위기를 망쳤다고는 하나 마리 앤이 모임에서 배제되는 걸 본 릴리엔은 마음이 안 좋았다.
'은근한 따돌림이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게다가 앞으로 한 소로리티 소속으로 계속 마주쳐야 하는데 첫 만남부터 계속 불편한 사이로 남을 순 없었다.
게다가 홀로 마리앤 옆에 남은 착한 소녀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릴리엔은 소녀들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레이디 마리앤도 함께 산책을 갔으면 좋겠다는 릴리엔의 말에 소녀들은 당황하면서도 반성했다.
'그래, 첫날부터 이러면 얼마나 불편하겠어.'
'당사자도 아닌 우리가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모두 마리앤과 소피아를 찾으러 돌아온 거였다.
하지만 소녀들을 맞이한 건 예상외의 난장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겁에 질려 있는 소피아, 차로 얼룩진 드레스를 입고 씩씩대는 마리앤, 엉망진창이 된 릴리엔의 다기들.
정황은 아주 명백해 보였다.
“레이디 마리앤, 대체 왜…….”
“이런 괴팍한 짓을 저지르시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웅성웅성, 다들 한마디씩 할수록 비난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리앤도 아차 했다. 그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거짓말이라도 해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
“당장 레이디 릴리에에게 사과 하세요, 레이디 마리앤.”
집주인으로서 나선 일라시아의 싸늘한 명령조가 마리앤을 툭 건드렸다.
“싫어! 내가 왜?"
마리앤은 다시금 부들부들 떨며 릴리엔에게 삿대질을 했다.
“다 저게 보기 싫게 잘난 척을 해서 이런……….”
바로 그때였다.
“레, 레이디 릴리엔!"
풀썩 하고 릴리엔이 쓰러졌다.
* * *
라니스터 후작저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애석하게도 대부인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릴리에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후작 부인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대공비가 되실 귀한 분을 초대 했는데 쓰러지시다니!!
모두가 너무 놀라 기절초풍한 나머지 그때까지는 전후 사정을 설명하거나 들을 겨를이 없었다.
일단 후작 부인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온 의사가 릴리엔을 진찰했다.
“일단 열은 없습니다. 다른 병의 징후도 없군요. 다만 기력이 매우 떨어져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거나 뭔가 충격을 받으면 쓰러질 수도 있다.
고 의사는 설명했다.
후작 부인과 대부인은 그제야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승마나 크로켓 경기 같은 격한 스포츠를 즐긴 것도 아니니 무리를 했다는 건 아닐 터.
후작 부인과 대부인이 그제야 난장판이었던 응접실의 상황을 떠올렸다.
“일라시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게…….”
창백해진 장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였다.
“레이디 마리앤이 레이디 릴리 엔에게 아주 꼴사납게 굴었어요!”
눈물 젖은 얼굴로 솔라리아가 버럭 외쳤다. 어른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솔라리아, 제대로 설명해 보아라!”
그러나 솔라리아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일라시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최대한 중립적으로, 사견을 배제했음에도 마리앤의 도 넘은 행동은 덮어지지 않았다.
“기가 막히는구나.”
가장 먼저 대부인이 대노했다.
“레이디 마리앤은 어디 있느냐?”
“저, 그게…….”
일라시아가 우물쭈물하다가 털어놓았다.
“집에…… 돌아간 걸로 압니다.”
놀란 영애들을 달래서 일단 돌려보내는 정신없는 틈을 타 마리 앤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부인이 부르르 입술까지 떨었다.
“이런 짓을 벌여 놓고 집에 가?”
무례한 게 아니라 상식이 없는 수준이 아닌가!
"내 이제까지는 그 아이가 다소 건방지다 싶기만 했는데 오늘 보니 아주 엉망진창이었구나.”
“진정하세요, 어머님.”
이러다 나이 든 부인마저 쓰러질까 후작 부인이 말렸다.
“제가 부인들께 편지를 쓸게요.
마리앤 그 아이를 더 이상 소로 리티에 머물게 할 순 없잖아요.”
“당연하지!”
마리앤의 만행은 서로 간의 돈독한 유대 관계를 지향하는 소로 리티 내부 정신에도 크게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내 펜도 가져와라. 아무래도 헤멘린나 대제후께도 일을 알려 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