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20화 (20/155)

20화.

"예? 그렇게까지요?”

깜짝 놀란 며느리에게 대부인이 설명했다.

“생각해 보아라. 대공비가 되실 분이 아니냐. 게다가 대제후께서 한 분뿐인 따님의 물건을 내줄 정도로 귀애하시는 분이야.”

"아, 이런…… 그렇지요.”

후작 부인도 납득했다.

“대제후께 잘 설명해서 라니스터 후작가의 실수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혀야 해요.”

“그래. 그리고 마리앤, 그 건방진 아이도 제대로 벌을 받아야 한다. 소로리티에서 내쫓기는 정도로는 벌이라고 할 수 없어.”

듣고만 있던 일라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일라시아는 정식 데뷔도 하기 전에 소속된 소로리티에서 내쫓긴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두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한데 그 정도도 벌이 될 수 없다니…….’

마리앤은 너무 큰일을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

릴리엔이 쓰러진 그때.

세드릭은 모종의 일로 황제 직할령 칸타쿤에 시찰을 나간 상태였다.

칸타쿤 제도, 제국 최남단에 위치한 황실 소유의 국유지.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형식상으로나마 황실에 충성 맹세를 하고 한 황제를 섬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같은 편으로 인정한 건 아니었다.

사병을 거느린 제후들은 황제만 공격하지 않을 뿐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서로 전쟁판을 벌였다.

때에 따라서는 일곱 선제후마저도 여섯이 되기도 했으니 말은다 한 셈이다.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와 국토의 황폐화를 견디다 못한 황실은 칸타쿤 제도를 중립지대로 지정하고 적극적으로 휴전협상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이왕 싸울 거면 전쟁보다는 차라리 말싸움을 해라!

분쟁 지역의 귀족들이 중립지에서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면 황제가 직접 신변의 안전을 지켜 주고 중재자가 되어 준다.

당사자 사이에 합의한 내용에도 특별히 국새를 찍어 주었다.

합의서의 내용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황제의 친구인 모 백작과 황제의 수호자인 모 후작이 신사적 합의를 하였으므로 황제의 이름으로 내용을 증명함.]

[황제의 이름으로 모 기사의 결백과 신실함을 보증함.]

[황제의 이름으로 모 자작의 통치권을 정당하다 인정함.]

금박을 입힌 고급스런 합의서에 황제가 서명하고 국새를 찍으면 합의 당사자들에게 합의서와 벨벳 케이스, 서명용 황금 깃펜까지 무상으로 줬다.

까놓고 말해 최저 자본을 들인 이름값 장사였다.

거의 개수작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는데도 명예욕 넘치는 귀족들에게는 이게 또 그럴싸하게 먹혔다는 게 문제였다.

귀족들은 서로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야단스럽게 황제를 찾았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황가의 지배력을 인정하는 풍조까지 형성되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황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귀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칸타쿤 제도를 휴양지로까지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왕 좋게 합의 보러 온 김에 좋은 곳에서 쉬면서 좋은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마음을 가다듬으시라.

…단, 돈을 내고,

이제 제도는 특별히 합의할 내용이 없어도 재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체류하는 귀족들로 인해 1년 내내 북적거리는 장소가 되었다.

가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지만 정작 그 거위 뱃속에 들어온 세드릭의 기분은 좋지 못했다.

매우.

“그리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몰라 묻나.”

칸타쿤에 위치한 이슬라르의 별장 서재.

세드릭이 코웃음을 치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황제의 앞마당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지배되지 않은 앞마당입니다.”

현 황제는 형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황위를 차지했지만 황태자는 처리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도에는 그가 곧 형수와 합궁할 거라는 기가 막힌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종합하자면 이런가?'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 승계.

정통성 있는 후계자의 생존.

바닥을 기는 평판까지!

새 황제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고 주도를 안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래서 아직 칸타쿤까지 손을 뻗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서 회합을 가지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황태자파 귀족들은 보란듯이 칸타쿤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 중요한 회합에 참석했던 세드릭의 표정은 현재 매우 좋지 않았다.

“릴리엔의 소로리티 데뷔를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다.”

“예, 그래서 선물을 잔뜩 사셨잖습니까.”

“생각해 보니 좀 모자란 것 같다.”

“지금 사신 것만도 일반적인 백작 영애의 지참금 정도는 되는데요.”

“릴리엔은 후작 영애지 않으냐.”

말도 안 되는 궤변에 알렌은 더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가주님, 던켈입니다. 본성에서 전서응을 보냈습니다.”

정중하게 문을 두드린 기사의 목소리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색입니다.”

"!”

튜린에서는 매의 발목에 매는 편지의 색에 따라 사안의 경중을 표시했다.

검은색은 급보, 즉시 확인 및 답장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이리 내어라.”

"예!"

세드릭의 손가락이 돌돌 말린 서신을 급하게 풀어 내렸다.

'뭐지?'

내용을 읽어 내릴수록 세드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냥 표정만 굳어진 게 아니었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오랜 경험으로 알렌은 주인이 격노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가주님?”

“돌아가자.”

편지를 단숨에 구겨 던지며 세드릭이 자리를 박찼다.

알렌은 구겨진 편지를 주워 펴 보았다.

익숙한 어머니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존모하옵는 튜린 선제후 좌하.

사안이 시급하여 몇 자 적습니다. 아가씨께서 소로리티 데뷔도중에 쓰러지셨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참석한 영애 중 하나가 대단한 무례를 저질렀다고 하는데 가주님의 대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치의께서 말씀하시길 아가씨의 상태도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조속히 귀환을 요망합니다.

헤이워스 부인 배상.]

* * *

충성스러운 기사, 던켈은 몹시 긴장한 채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몇 시간 전 본성에서 검은색 급보가 도착한 뒤로부터 가주님의상태가 이상했다.

‘기세가 흉흉하시고 다급히 몰아치시는 것이…….’

튜린 본성이 습격이라도 당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라도 일어난 걸까?

'급박하게 길을 떠나는 와중에 상인을 만난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던켈은 복잡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는 칼이지 모사가 아니었다.

“곧 마도 터널에 진입합니다!”

“속력을 내라고 전해라.”

“옙!”

“속력을 내랍신다!”

“달려!”

다행인지 불행인지, 튜린과 칸타쿤 사이에는 마도 터널이라는 게 있었다.

고대, 마도 시대에 지어진 이 터널은 일반적인 루트로는 2주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두어 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는 터널이었다.

사실상 이 터널 때문에 튜린은 대대로 황실의 침입에 항상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튜린이 제후를 잃고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주님의 복수조차 하지 못하게 막은……!’

던켈은 이가 갈릴 만큼 이 터널의 존재가 한스러웠다.

이런저런 원한 관계를 다 제쳐 두더라도, 언제든지 두 시간 안에 황실의 군대가 쳐들어 올 수 있는 통로가 본성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는 법이라고 이번에는 이 꺼림칙한 터널이 도움이 된다마는…….'

할 수만 있다면 없애 버리는 게 제일 좋겠지만 문제는 마도 시대의 유물이라 현재로서는 파괴할 방법조차 없었다.

일개 기사인 그조차 이리 심란한데 가주님은 어떤 심정이실까.

던켈은 앞서 달리는 젊은 가주의 등을 곁눈질했다.

세드릭은 그와 달리 쓸데없는 잡념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듯 줄곧 말을 앞서 달리게 하는 데만 전념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행은 그렇게 두어 시간을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튜린 외성을 통과하자마자 세드릭은 휘하 기사들에게 간신히 무장 해제를 명하고 바람같이 내성으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던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막 말에서 내린 알렌이 짐을 챙기며 대답했다.

“아가씨의 일입니다.”

"아.”

그 한마디에 충성스러운 기사가 바로 납득할 정도로 세드릭의 여동생 사랑은 이미 온 성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그토록 귀애하는 여동생이 일생에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소로리티 데뷔일에 크게 모욕을 당했다.

'게다가 직후 쓰러지기까지.'

알렌 자신도 상당히 화가 났으니 세드릭의 분노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일 터였다.

성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떠돌고 있었다.

후작저에서 쓰러졌던 릴리에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성으로 돌아 오자마자 또 한 번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헤이워스 부인이 가장 크게 자책했다.

'다 내 탓이야.'

얼마 전부터 릴리에이 유독 잠에서 못 깨고 힘들어하던 것과 식사를 깨작거리던 걸 무심히 넘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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