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21화 (21/155)

21화.

'바로 얼마 전에 사경을 헤매신 분인데…….’

부인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혹시 혼인 동맹을 눈치챈 황제가 아가씨께 손을 쓴 거라면 어쩌지?'

황제가 릴리엔을 독살하려 시도 했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될 것이다.

'릴리엔 아가씨가 독살된다면…….'

그런 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아마 동맹의 불가피한 파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품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 아가씨가 암살당한다는 건 가주의 의문사가 주는 충격과는 결이 달랐다.

극복해야 할 여파는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훨씬 더 분노하고 말 테지.'

장담하건대 튜린의 분노는 반드시 그 흉수의 목을 잘라 성벽에 내걸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게 설사 이 제국의 황제라고 할지라도.

튜린 성의 주치의인 쇼는 거꾸로 걸친 안경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들이닥쳤다.

그는 주군에게 여동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 몇 주간의 일로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독은 아닙니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릴리엔은 새하얗게 질린 채 가슴의 오르내림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숨을 쉬고 있었다.

세드릭은 릴리엔의 머리맡에 앉아 묵묵히 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심정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끔찍했다.

'……이게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멍청한 생각만 자꾸 드는군.'

그는 곧 마른세수로 현실 부정을 쓸어내리고 간신히 이렇게 물었다.

"…독이 아니라면 무어냐?”

잠깐 사이에 초췌해진 가주의 목소리에 헤이워스 부인을 비롯한 측근들은 더욱 숨을 죽였다.

쇼는 냉정한 의사였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의식을 잃은 릴리에을 목전에 두고 처참하게 무너지기 직전인 세드릭 앞에서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단을 내리느니 차라리 철퇴로 가주님을 후려치는 게 덜 충격을 받을 것 같구먼.’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숨을 쉬며 쇼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천만다행으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지도 않으십니다……. 아직은.”

아직은.

그 한마디에 희망도 있었고 절 망도 있었다.

“일단은 그저 기력이 쇠하셨을 따름입니다.”

그제야 세드릭이 그날 처음으로 숨을 쉬는 사람처럼 거하게 숨을 쉬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그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뇌까렸다.

쇼는 눈치를 보다 가주의 석상같은 꼴에 얼마쯤 생명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안심하실 때는 아닙니다. 기력이 쇠잔했다는 건 어떤 의미로 중병보다 어렵습니다. 마땅히 치료법도 없는 데다가 작은 고뿔로도 용태가 위중해 지실 수 있습니다.”

“릴리엔이 본디…….”

마른세수를 하며 세드릭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토록 작고, 이리도 연약했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세드릭은 곱씹었다. 돌이켜보면 릴리에이 중병을 앓을 때, 그때 자신은 얼마나 무심했던가?

처음 릴리에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상을 쓰며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게 하는군."

하고 중얼거렸던 자신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가 있었지? 숨이 막혔다.

선명하게 날선 기억이 가슴을 후벼 파고 들었다.

세드릭은 천근 망치로 가슴을 후려치는 것 같은 통증을 지끈삼켰다.

멍청한 놈. 눈앞에 장중보옥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낫게 할 방법은?”

“특별한 방책이랄 건 없습니다.

그저 잘 드시고, 푹 쉬시면서 조섭을 하셔야 할 겁니다. 아마도 평생 동안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쇼는 아까보다 조금 더 망설이다 “그런데…….”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혹시 아가씨께선 티어가 어떻게 되셨죠?”

오래전부터 제국에서는 극히 희박한 확률로 강한 마력을 가진 사람들이 태어나곤 했다.

강한 마력을 가진 사람은 단련을 통해 신체를 비약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해서 대부분 검술을 익혔다.

그들 중 극히 일부는 마력을 외부로 방출하는 경지에 이르곤 했다.

문헌에 따르면 어떤 초월자들은 신체까지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는 노화조차 더디게 찾아온다고 기술되어 있기도 했다.

전쟁이 빈번한 제국에서 마력은 혈통의 한계마저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때문에 귀족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마력.

의 양을 측정했고 값에 따라 계급을 매겼다.

보통 1~3테라까지를 티어 네이쳐, 4~5테라는 티어 미들, 6~7테라를 보유한 사람은 티어 하이라고 일컬었다.

보통 네이쳐는 일반인, 미들은 수재에서 영재 그리고 하이는 천재, 혹은 초월자로 보았다.

세드릭은 7테라에 가까운 마력을 보유한 티어 하이였다.

그리고 릴리엔은…….

“아마 네이쳐일텐데, 테라는…….”

또 한 번 가슴을 쑤시는 죄책감에 세드릭은 입술을 짓뭉갔다.

“……잘 모른다. 아무래도 기록을 봐야 할 것 같군.

그랬다. 그는 릴리에의 티어조차 제대로 모른다.

이런 형편없는 인간을 오라비랍시고 그토록 위하다니. 릴리엔이 가여울 지경이다.

세드릭이 날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데 갑자기 티어는 왜?”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쇼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생명력과 마력은 일종의 불가분의 관계를 맺습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에 비해 지나치게 모자라면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나마 생명력이 모자라면 마력이 그를 보충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 곤란해집니다. 부족한 마력 때문에 생명력이 고갈되기 시작하니까요."

“그게 릴리가 쓰러진 것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아직 확실치는 않고, 추론이긴 합니다만.”

릴리에처럼 중병을 앓고 난 뒤에 비슷한 증상을 보인 사례들이 있다고 쇼는 서술했다.

“지속적으로 마력이 고갈되는 겁니다.”

“고갈?”

세드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용한 마력은 적당히 휴식을 취하면 보충이 되지 않나.”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병인 겁니다.”

마력은 피를 타고 순환하며, 인간의 심장은 마나 코어로서 기능한다.

“간혹 중병으로 생사를 넘나들다 회복한 사람들 중에서 드물게 이 코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어가 손상된다고?"

“예, 쉽게 말해 마나를 담고 있는 잔이 깨진 겁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마력 이탈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 생명력마저 고갈되는 병입니다.”

워낙에 희귀병이고 정확한 원인마저 밝혀지지 않았다고 쇼가 설명했다.

“그게 대체 릴리엔과 무슨 상관이냐?”

명확히 드러나려 하는 인과관계를 세드릭이 애써 부정해 보려 했다.

“가주님…….”

헤이워스 부인이 안쓰럽게 신음했다. 쇼는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얼마 전 극심한 열병을 앓고 간신히 회복하셨죠. 그러니 발병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세드릭은 부르르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 판별해야 하나.

분노?

두려움?

확실한 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이런 일이…….”

릴리에에게는, 릴리엔에게만은 일어나선 안 되는 거다.

이제야 이 아이의 존재를 알았다. 뒤늦게나마 릴리에이 온당히 받아야 할 귀한 대접을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쇼 윈스턴, 나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가씨의 마력의 양, 테라를 측정해 보시겠습니까?”

세드릭의 섬세한 마력 운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계측기만큼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으로 테라를 가늠할 수는 있었다.

"만약 릴리에 아가씨의 테라가 측정식 때 결과보다 현저히 줄어 있다면 그건 아가씨께서 마력 고갈증을 앓고 계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겁니다.”

“이 병은…….”

세드릭은 자꾸 마르는 입술을 축여야 했다.

“위중한가?”

“……마력이 고갈되는 속도에 따라 다릅니다만 대개는 10년 이 내에 마력을 모두 잃습니다. 그 상태를 티어 제로라고 일컫는데 그렇게 되면 생명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치유법은…….”

쇼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대로 의사로서의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게 옳은가, 아니면 다소 거짓말을 해서라도 주군을 깊은 절망에서 구해야 하나 잠깐 고민이 됐지만…….

쇼는 흘긋 릴리엔은 돌아보았다.

'작은 거짓말로 가려질 상황은 아니야.'

쇼는 그냥 솔직히 고했다.

"치유법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세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만일 릴리에이 그 병이 아니라면?”

“그럼, 아가씨가 자연적으로 회복해서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가씨의 허약함이 고칠 수 없는 천형(天刑)이 아니란 걸 기뻐하면서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