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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22화 (22/155)

22화.

세드릭은 잠시 침묵했다. 곧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릴리엔의 손목을 쥐었다.

세드릭은 체구가 우락부락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형만 두고 보면 쇼가 훨씬 더 기사처럼 보였다.

젊은 가주는 늘씬한 체형이라는 약점을 타고난 마력량과 날렵한 움직임으로 보완하는 타입의 기사였다.

그런 그의 손에서조차 릴리엔의 손목은 부러질 듯 가느다랗게 보였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며 자라 와서인가, 얼마 전에 큰 병을 앓았기 때문인가.

‘작다.'

늘 생각하지만 릴리엔은 아이치고도 모든 게 너무 작고 가늘었다.

그래도 회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병을 떨치고 일어서서 전보다 더 활동적으로 지내고 있었으니까.

‘무리하고 있는 거였는데.'

겨우 살아나 있을 수 있을까 싶게 끓은 몸으로 매일같이 그를 찾아와 주었다.

멍청하게도 자신은 그게 릴리엔이 완벽하게 병을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아니, 정신 차리자.'

지금은 후회나 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조심스레 릴리에의 희미한 맥을 더듬었다.

초조해하며 숨을 죽인 끝에 그는 간신히 아주 느린 허깨비 같은 맥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세드릭은 자신의 마력을 조심스럽게 릴리엔의 손목 대동맥으로 불어 넣었다.

마력은 심장에 형성된 코어에서 피를 따라 핏줄을 타고 온몸을 순환한다.

하지만 릴리에의 혈관은 텅 빈 관 같았다. 마치 시체처럼 저항없이 세드릭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세드릭은 애써 부정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네이쳐 중에서도 둔감한 편이라 말단까지 마력이 돌지 않는 것뿐일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여동생의 혈맥을 샅샅이 뒤졌다. 강줄기에서 사금을 찾는 심정으로 터럭만큼 가느다란 모세혈관 하나까지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아주 희미한 마력의 흔적 같은 것이 엷게 흐르고 있을 뿐.

알렌이 급히 찾아온 기록에서 릴리엔은 티어 네이쳐였고 3테라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일반인 중에서는 재능 있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현재 릴리엔의 마력은 심장까지 뒤져 보아도 간신히 1테라나 될까 싶은 수준만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언제 사라질까 두려울만큼 투명하고 덧없게 느껴졌다.

'이럴 수가…….’

부정할 수 없었다.

"쇼 윈스턴.”

“예, 가주님.”

“치료법이 없다고 했는가.”

세드릭의 검사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던 알렌과 헤이워스부인이 잠깐 숨을 멈추었다.

쇼가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시간은 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죄송합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의 마력이 줄어드는 속도에 따라서…….”

"대체 왜?”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릴리엔은 아직 어렸다.

어리고 작고 이 성에 있는 그 누구보다 귀한 생명이었다.

한데 왜 하필 죽음은 고르고 골라 이 아이인가?

세드릭이 질끈 피가 비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왜, 이 아이가…….”

거센 원망이 솟구쳤다. 세드릭은 속에서 이는 천불을 가라앉히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주님.”

쇼는 그가 절망적인 선고에 분노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걸 알아챘다.

자주 죽음을 목도해 온 의사의 눈치는 정확했다. 세드릭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튜린 제후였다. 권력이면 권력, 돈이면 돈. 가진 것보다 못가진 게 적었다.

생로병사의 문제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병인가.

이제 겨우 열두 살인데.

대체 왜!

“치료할 수 있다고 대답해라.”

"…면목 없습니다, 가주님. 현재로서 정확한 치료법을 찾기 어렵습니다.”

고대의 위대한 마법은 족적만 남기고 쇠락한 지 오래.

원인을 알 수 있는 방법도 밝혀 낼 수 있는 사람도 이 시대에는 이미 없었다.

그나마 주치의인 쇼가 마력의 기전에 관심이 있어 관련 분야에 박식한 편이라는 게 천만다행일따름이었다.

마침내 세드릭은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손에 묻었다.

잠시 후, 그가 쥐어짜는 듯 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이냐?”

“가주님의 마력을 릴리에 아가씨께 나눠 주시면 됩니다.”

의사는 최대한 가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덧붙였다.

“마력을 주기적으로 채우면 고갈되는 시점을 미룰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마력을 주고받는 이들의 상성과 공여자의 마력량이 아주 중요한데…….”

“......."

“다행히 가주님께서 정순하고 강한 마력을 보유하셨으며 아가씨와는 부모 자식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혈연이시니, 상성 역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 다른 경우보다 수월하게, 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세드릭은 헛웃음을 지었다.

최선을 다해 늘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될까?

몇 년, 몇 달?

…그도 아니면, 며칠?

섬뜩하게 피가 식었다. 세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방법을 찾아라. 이 아이는 죽을 수 없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말이 아니었다.

쇼는 반론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리고 알렌.”

“예.”

얼음 칼날 같은 목소리로 세드릭이 물었다.

“릴리엔에게 모욕을 줬다던 그 아이, 블란쳇 공의 여식이라고 했나?”

* * *

블란쳇 공은 오등작 편제상 세드릭보다 한 단계 윗줄에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제국에 단 일곱 명뿐인 선제후로서 황제의 지엄한 지배권에 도전할 자격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의전 서열상으로나 제국법적으로나 블란쳇 공보다는 세드릭이 한참 더 우위에 있었다.

릴리에이 무례를 저질렀다고 해도 조용히 덮고 넘어가야 할 판에 도리어 블란쳇의 여식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릴리엔은 단순히 튜린 제후의 여동생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릴리엔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을 직감하고 이렇게 말렸다.

“오라버니, 너무 심하게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세드릭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지나치게 기특하게 구는 여동생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릴리엔은 계속해서 설득했다.

“엄밀히 말해 레이디 마리앤이 절 아프게 한 건 아니잖아요. 운이 나빴던 측면도…….”

“릴리.”

세드릭이 한숨을 쉬듯 동생을 부르며 자그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지 마라. 나는 지금………차라리 전쟁을 시작하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는 중이니까 말이다.”

분노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나직한 음성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세드릭이 진심이라는 게 더 잘 느껴졌다.

“너는 그만 회복에 전념하거라.

내 심장을 조금이라도 남아나게 하려면 말이다.”

“……네.”

오라버니를 끔찍하게 걱정시킨 죄가 있어 릴리에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세드릭은 그제야 희미하게 웃으며 릴리엔을 토닥였다.

“착하기도 하지.”

그렇게 분노를 억누른 채 세드릭은 일필휘지로 항의 서한을 작성했다.

레이디 마리앤을 지목하며 처벌을, 블란쳇 공을 지명하여 배상을 요구했다. 라니스터 후작가가 신의를 걸고 항의 서한의 증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사실 그쪽에서 돈을 보내는 고개를 조아리러 오는 거들떠보고 싶은 심정도 없습니다만."

혐오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헤멘린나 대제후가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 사과와 배상을 받은 기록은 있어야지. 그래야 그쪽에서 나중에라도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할 것이니.”

"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세드릭은 빈틈없는 손길로 서한을 봉했다. 그리고 물었다.

“혼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겠느냐고?”

대제후는 지금 막 세드릭의 입을 통해 릴리에의 불치병에 대해 전해 들은 참이었다.

“튜린 후, 혈맹은 고작 이 정도 일로 끊어질 수 없다네.”

세드릭이 들릴락 말락 하게 쳇하고 혀를 찼다. 이참에 여동생의 혼약을 청산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커흠.”

대제후는 못 들은 첫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허고, 내 집안 식구 단속에 소홀했던 것은 사과하겠네.”

"..집안 식구라니요?”

세드릭이 차갑게 비웃었다.

“언제부터 이 제국에서 처의 가족까지 한 집안으로 치는 관습이 있었습니까?”

대제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지금 세드릭의 말은 단순히 제국이 부계 사회라는 뜻이 아니었다. 대제후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너그러운 면책성 발언은 더 더욱 아니었다.

'나서서 감싸지 말라, 이 뜻이군.'

나쁘지 않았다.

'일은 이미 벌어진 것 아닌가.'

튜린과 블란쳇 중에서 선택하라면 당연히 튜린을 선택해야 했다.

물론, 그런 정치적인 계산을 배제하더라도 손자며느리를 모욕한 마리앤의 편을 들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 아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욕심이 드글드글하고 작태 건방져서 귀엽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사고를 치는구나.'

사실 블란쳇 공, 그의 늦둥이 처남부터가 소싯적부터 아주 엉터리였다. 자식을 잘못 키운 게 놀랍지도 않았다.

'뭐, 그래도 제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사과는 하겠지.'

정확히 사흘 뒤, 대제후의 이런 예상은 거하게 빗나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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