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사안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블란쳇 공은 직접 찾아오지는 못해도 가신을 보내 정식으로 사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착한 것은 떨렁 편지 하나와 자그만 상자 하나뿐이었다.
편지의 내용 역시 지극히 간단했다.
[친애하는 튜린 후 좌하.
블란쳇은 금번 발생한 일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불초 마리앤에 대해서는 소로리 티에서 쫓겨남으로써 그 아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기회를 잃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배상조의 물건을 인편에 부칩니다.
레이디 릴리엔의 조속한 쾌유를 바랍니다.
블란쳇의 휴고 배상.]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세드릭은 침착하게 그 무도한 편지를 반으로 찢었다.
그 누구도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티어 하이, 테라 7의 거대한 분노가 마력을 타고 줄기 줄기 사방으로 뻗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의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그 상자에는 뭐가 들었나?”
“목걸이…… 가 들어 있습니다."
뿌득 하고 세드릭의 뺨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샜다.
하고 많은 물건 중에 목걸이를 골라 보낸 의도가 불순했다.
마치 마리앤이 시비를 건 일에 대해 자신들은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혹은 아예 조롱하고 있거나.
"편지에는 개소리, 상자에는 쓰레기라…….”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하다 못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블란 쳇 공의 심부름꾼을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알렌, 즉시 이 개소리를 태워버려라.”
“예, 알겠습니다. 허면 쓰레기는 어떻게 할까요?”
“성문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들개에게 걸어 줘라.”
“이자는 살려 보냅니까?”
알렌이 심부름꾼을 가리키며 묻자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잘 돌아가게끔 모셔다 주어라. 그래야 내가 어떻게 배상을 받았는지 전해 들을 수 있을 테니.”
블란쳇 공이 저지른 이 무례는 곧장 헤멘린나 대제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놈이…… 어릴 적부터 전대 튜린 선제후를 지독하게 질투하더니만 기어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제후는 즉시 블란쳇 공을 호출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자형.”
매형의 부름에 블란쳇 공은 아주 당당하게 나타났다.
“이런 몹쓸 놈이……!”
홧김에 일을 치고 반성하는 기색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헤멘린나 대제후는 덕분에 초장부터 눈이 돌아가다시피 해 버렸다.
“자형, 말이 심하…….”
“듣기 싫다 이놈아! 나이를 그만큼이나 처먹고서도 아직까지 되먹질 못하다니! 본 후의 처는 멀쩡하였는데 어찌 너만 후레자식이야!”
“아니, 고작해야 여아들끼리의사소한 다툼 아닙니까!”
이런 지경에서도 블란쳇 공은 놀랍게도 할 말이 있었다.
“그쪽 계집애가 일찍 죽은 제 아비 명줄 닮아 쓰러진 것을 왜 우리 마리앤 탓을 합니…… 악!”
대제후가 내던진 잉크병이 먹소리를 내며 블란쳇 공에게 명중했다.
순식간에 잉크를 뒤집어쓴 공작이 짜증을 냈다.
“자형!”
“감히 너 따위가!”
여든 줄에 들어섰음에도 체구가 강건한 노인의 노호는 몹시 우렁우렁했다.
블란쳇 공은 너무 놀란 나머지 찔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대제후의 분노에 비하자면 그의 화는 새끼 고양이의 앙탈체 럼 느껴질 정도였다.
안광이 형형해진 대제후가 선언했다.
“그간 본 후가 죽은 처의 노고를 생각해서 네놈에게 베푼 아량은 이만하면 됐다.”
“자형, 그게.”
“천지 분간을 못해 내버려만 두었어도 진작에 집안을 말아 먹었을 것을! 그랬다면 오늘날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인데………!”
“자형, 생각해 보니 제가 다 잘......."
“듣기 싫으니까 썩 꺼져!"
아차 한 블란쳇 공이 뒤늦게 잘못을 빌어 보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대제후가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
그 지팡이 안에 날선 칼이 숨어 있다는 것과 젊었을 적 헤멘린나 대제후의 무훈이 어마어마하단걸 잘 아는 블란쳇 공은 결국 꽁지가 빠져라 다급히 도망을 쳐야 했다.
그날 부로 헤멘린나 대제후는 정말로 처가에 들어가던 모든 지원을 싹 끊어 버렸다.
세드릭은 그런 난장판이 릴리엔의 귀에 굳이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했다.
〈은방울꽃 소로리티>는 기존 구성원의 무례를 사과할 겸, 겸사겸사 릴리엔의 병문안을 왔다.
릴리엔은 그중에서도 어른스러운 일라시아와 귀여운 솔라리아자매와 특히 친해졌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안고서 봄은 점점 짙어졌다.
그렇게 바야흐로 여름.
클로드 1세 원년, 황제가 북부 케스탈 족의 잔여 반란 세력 소탕을 명령했다.
선봉이자 사령관으로는 다미언대공이 지명되었다.
5. Childhood's End.
케스탈 족 잔여 반란 세력의 소탕은 순조로웠다.
'순조롭다니, 전쟁에 가져다 붙이기에는 좀 비인간적이군.'
아이반은 쓴 입맛을 다셨다.
이번 전쟁은 사실상 전쟁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한때 마물을 이 지상에 불러들이던 케스탈 족은 3년 전, 소년 병이었던 다미언에게 완파된 지 오래였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전투력이 남아 있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상황은 몹시 열악했다.
황제는 관문을 통제하고 예산을 배당해 주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보급품을 조달하는 것조차 엄금했다.
다미언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뜻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제기랄, 돌겠군.”
군대는 몹시 난감한 지경에 처했다.
오늘도 아이반은 민가의 창고를 턴 병사들을 군법으로 다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은 처벌을 받아도 좋으니 훔친 음식을 돌려주지 말고 부상병에게 주자며 애걸했다.
"기사님, 그 아이는 고작 열다섯입니다요. 열다섯 짜리가 봉변처럼 전장에 끌려와서 다리를 잘렸습니다. 한데 곧 죽을 놈에게는 귀중한 식량을 줄 수 없다지 않습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뭐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다는 절규에 일단 아이반은 부상병에게 자기 몫의 음식을 양보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처분에 대해서는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미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젠장, 젠장…….”
전쟁을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대에게 개전을 선언하고 아군에게는 보급품을 주지 않는다.
생각이 짧아도 정도가 있지.
군대의 절반은 다미언 휘하의 병사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황제의 백성들이었다.
'일부러 상비군이 아니라 오합지졸 백성을 뽑아서 고사시키는 주군이라니……!’
최악이다. 욕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아이반은 사령관의 막사로 향했다.
“전하, 들어가도 됩니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아이반은 한숨을 쉬며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다름이 아니라 오전에 보고드린 민가를 습격한 병사들의 건에 대해서…… 전하?”
대답이 없었다.
막사의 간이 침상 위에서 다미언은 몸을 구부린 채 미동 없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분명 자는 척인데…….’
"전하?”
미심쩍어 한 번 더 불러 보았지.
만 반응이 없었다.
'진짜 주무시는 모양인데.'
별일이었다.
서슬 퍼런 전시에는 물론 다미언은 평시에도 깊이 잠드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선잠 아니면 아예 안 자면서 눈만 감고 있는 적도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사실 다 미언은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인 선천적 마력 과잉증을 진단받은 환자였다.
육체가 적응하기도 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마력은 그에게 세상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막강한 무력과 함께 여러 가지다양한 증상을 선물했다.
두통, 이명, 환청, 환시, 작열감…….
많은 증상에 일관성이라고는 고통스럽다는 것뿐이었다.
잠결에 사지가 불에 타는 느낌에 불이라도 났는가 벌떡 일어나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게 다미언에게는 일상이었다.
한데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잠들어 있다니.
아이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거참, 컨디션이 좀 좋으신가…….’
남들은 다 당연하게 자는 잠이 다미언에게는 컨디션이 유별나게 좋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미언은 허리띠째 푼 검의 칼자루를 손에 쥔 채 이마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허리띠에 매달린 장식용 매듭수술이 하얀 얼굴 위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자네.
진짜 잔다.
거참 신기…….
"언제까지 구경할 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