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흐억!”
낮은 목소리에 아이반이 화들짝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사람 놀라게!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던 겁니까? 아니, 애초에 안주무셨죠?”
“그런 시답잖은 장난질이나 할 상태로 보이나?”
다미언이 짜증스럽게 구겨진 미간을 하고 일어나 앉았다.
아이반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주무셨습니까?”
"용건이 뭐야.”
“아, 그게요.”
아이반은 도둑질을 한 병사들의 사정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다미언은 묵묵히 듣더니 잠깐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병사들은 군적에서 말소하고 고향으로 보낸다. 해당 부상병에게는 더 이상 식사를 제공하지 말아라.”
"…예, 알겠습니다.”
한쪽으론 비정하고 한쪽으로 그렇지 않은 결론.
아이반도 어느 정도 생각했던 결론이었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윗사람에게 결정을 미뤘을 뿐이다.
다미언은 생각에 잠겼는지 말이 없어졌다. 손가락만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매듭을 쥐었다가 휘감았다가 할 뿐이었다.
'……손장난을 하는 버릇이 있으셨나?'
그때 다미언이 물었다.
“용건은 그게 다야?”
“아닙니다. 사실 대제후께서 전 서구 편으로 소식을 하나 전하셨습니다. 다름 아닌 레이디 릴리엔께서 .”
“... ... ?"
다미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레이디 릴리에 이슬라르, 전하의 신부 되시는 분 말입니다."
"아.”
“그분께 일이 좀 있었다는데요,그게……."
“아니.”
다미언이 손을 내저었다.
“굳이 들을 필욘 없을 것 같군. 됐어, 얘기하지 마라.”
"예? 이거 진짜 중요한 얘기인데요.”
다미언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외조부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럼 나한테는 말하지 않아도돼.”
“전하!”
대공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아예 일어나 버렸다. 아이반은 혀를 찼다.
‘어이구, 그래..'
저런 사람한테 굳이 뭐 신부 될 아가씨 건강이 안 좋단 얘길 할 필요가 있겠나.
'이름도 못 외우는 판에.’
그러면서도 아이반은 미련을 못놓고 한마디 했다.
“선물이라도 보내시죠?"
말하자마자 아이반은 아차 했다. 분위기상 여기서 더 덤비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는 매번 이 잠깐을 참지 못하곤 했다.
다미언이 짤막하게 명했다.
“나가.”
“옙.”
경을 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 쯤에서 끝났다. 아이반은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좀 주무신 게 맞긴 맞나 보군.'
다른 사람이 보기엔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아이반은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지금 다미언은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 * *
북부의 상황은 처참했으나 그와 상관없이 여름은 아름다웠다.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워 누구든지 햇살과 신록과 졸졸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를 즐기러 나가고 싶어지는 계절.
그때 튜린 성의 릴리엔은…
“조금 더운 것 같구나.”
“기분 탓일 겁니다, 아가씨. 책을 읽어 드릴까요?”
"이불을 좀 걷어 주겠니?”
최근 튜린 성의 하속들은 릴리 엔의 명령에 전과 달리 충실해져 있었다.
슬프게도 친모가 살아 있을 적에 릴리엔은 그저 못된 계모의 딸에 불과할 뿐이었다.
돌아가신 정실 후작 부인과 그분의 아들에게 맹목적인 튜린 사람들은 릴리엔을 은근히 경원시했다.
정작 그 계모가 아들이 아닌 딸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하다시피 했는데도 말이다.
계모가 죽은 것은 그들이 릴리 엔을 멀리했던 이유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어쨌거나 고작 열두 살에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였다.
어린 소녀는 의연했다. 매정한 친모를 잃은 슬픔을 그 수족과 함께 털어 내는가 싶더니 하나뿐인 이복 오라버니를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 노력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새까맣게 죽어 가던 세드릭을 조금이나마 파릇하게 살려 놓기에까지 이른다.
사람들은 내심 감탄했다.
"자기 속도 말이 아닐 터인데.”
"보면 볼수록 참 착하신 것 같아요.”
그러나 릴리엔은 자주 아팠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희귀 불치병이 아니라 열병을 앓은 이후 크게 병약해진 걸로 알려졌지만 그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가솔들이 안타까워했다.
“또 쓰러지셨어요? 이를 어째요.”
“가주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텐데.”
“본인도 고생이실 테고…….”
“그래도 얼마나 돌보기가 편한 분인지 몰라요. 아침에 깨워 드려도 신경질 한번 내시는 법이 없고 쓴 약을 드려도 인상만 조금 쓰고 다 드신다니까요.”
사정을 알수록 릴리엔이 고맙고기특했다. 또 그만큼 안쓰럽기도 했으며…….
“아가씨가 저런 분인 줄 그동안 왜 몰랐을까?”
"팥 심은 데 팥이 날 줄 알았던 거죠, 뭐…….”
미안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미안한 마음에 앞다투어 릴리엔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약간 과하게.
“사실 보면 외모도 선대 가주님을 아주 쏙 빼셨다니까요. 세드릭 님하고 같이 계실 때 보세요.
저게 어떻게 이복 남매예요? 누가 봐도 한 배에서 나온 줄 알겠네.”
“암, 아가씨는 누가 뭐래도 튜린 핏줄이시지.”
“얼굴만 그런 줄 알아요? 말씀하시는 거나 표정 같은 것도 딱이 핏줄이라니까요. 얼마나 차분하고 결기가 있으신지…….”
“씨도둑질은 못 해요, 암만.”
싫어할 때 별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별다른 이유 없이 싫어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사람들이 릴리엔을 좋아하게 되는 건 금방이었다.
물론 아직은 다들 양심이 아파서 대놓고 릴리엔을 '우리 아가씨, 우리 아가씨’하며 어화둥둥하지는 못했다.
다들 쭈뼛쭈뼛 눈치만 보며 릴리엔이 무슨 조그만 부탁이라도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과도하게 열성을 다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여기, 리타만큼은 예외였다.
“이불을 치워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못 들었니?”
“주무시겠다면 커튼을 내려 드릴게요.”
처음 만나고 이제 막 한 달, 한 결같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소녀의 이름은 리타 헤이워스.
적갈색 머리와 이름 그리고 뻔뻔할 정도로 무감한 표정에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알렌의 동생이었다.
“그래, 리타.”
릴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약하다는 죄로 여기 마냥 갇혀 있는 나를 좀 가엾게 여겨 보면 어떨까.”
“아직까지는 그다지요."
게다가 리타에게는 알렌보다 좀 더 막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저 고지식함이었다.
오빠인 알렌은 상황을 다 알면서 일부러 무표정을 하고 뻔뻔하게 구는 편이라 세드릭으로부터 종종 음흉하다는 빈축을 샀다.
하지만 리타는 그냥 융통성이 부족하고 성실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릴리엔의 타이름도 은근한 협박도 불쌍한 척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재간이 없다니까.”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내 입으로 묻긴 좀 그렇지만 방금 그 말이 칭찬으로 들렸니?”
“제 오라비인 헤이워스 경께서 아가씨께서 패배를 인정하시거든 대강 칭찬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리타의 지위는 분명 릴리엔의 시녀였고, 나이도 열여덟 살밖에 먹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녀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고지식한 군인과 일문일답을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넌 정말 시녀답지는 않아.”
"분명 제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야 했지만.”
“그래서 전 지금 지속적으로 아가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 말에 릴리엔은 여러 모로 기가 막혔다.
“왜, 내가 좋아서?”
“아니요.”
죄송한 기색도 없이 리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시녀 자리에서 쫓겨나면 다시 알렌 헤이워스 경의 심부름을 겸한 잡일꾼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은 싫습니다.”
릴리엔은 조금 웃었다.
이런 점이 바로 리타 헤이워스의 재미있는 점이었다.
리타가 칭찬이랍시고 한마디를 했다.
“아가씨께서는 헤이워스 경보다는 모시기 쉬운 윗사람이십니다.”
“그래, 네 성격상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구나. 하지만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는걸.”
알렌 헤이워스보다 낫다니.
튜린 성의 사용인들은 알렌이라면 이를 갈거나 벌벌 떨거나 둘중 하나였다.
알렌보다 낫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었다.
따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자도 자도 졸려……. 따뜻한 곳에 마냥 누워 있어서일까, 아니면 생명력이 떨어져서 그런 걸까.’
처음 병에 관한 소식 들었을 때 릴리엔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본 '이야기'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릴리엔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희귀 불치병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오래지 않아서 죽게 될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릴리엔은 그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열병.’
원인 불명의 병으로 릴리엔은 운명을 바꿀 기억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최악의 결말을 피하는 대가로 그녀가 가진 마력 전부를 지불하게 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얼추 계산이 맞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