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가물가물한 시야를 비비며 릴리 엔이 작게 하품을 했다.
“아직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식사를 하시고 주무셔야 합니다.”
"으음…… 하지만 졸린데……."
“아가씨? 안 됩니다, 아가씨?”
릴리엔은 말없이 웃으며 곰 인형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이런, 안 된다니까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리타는 끝까지 만류하지 못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도 튜린 사람이었다.
게다가 막내로 태어나 열 살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생 하나만 생기게 해 달라'고 매일 같이 소원을 빌었던 아가씨였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다시피 나타난 기특한 아가씨가 좀생이 같은 큰오빠의 심부름꾼 자리에서 벗어나게까지 해 주었다.
게다가 매일매일 동화책을 보며 내 동생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던 어여쁘고 순한 얼굴까지.
'귀여우시다니까, 정말.'
“으음.”
“……하지만 매번 잔꾀를 써서 식사를 피하시는 건 좀 곤란한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릴리 엔의 숨소리가 보다 얌전해졌다.
잠든 건지 잠든 척을 하는 건지, 얌전히 속눈썹 그림자를 뺨위로 드리운 릴리엔을 보며 리타는 결심했다.
'이대로 더 봐 드리면 버릇과 건강을 다 망치겠어.'
리타는 말단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
“릴리에 아가씨, 요즘 입맛이 많이 없으시지요?”
윗사람에게 일러바치기.
헤이워스 부인의 상냥한 물음에 릴리엔은 찔끔 하고 말았다.
"그게, 부인…….”
“아무래도 봄이다 보니 아직 날씨가 서늘하지요. 제 생각에는 추워서 그러신 것 같은데 미뇽식 수프를 올릴까요? 흰 살 생선과 마늘을 넣고 담백하게 끓여 드릴 게요. 한 그릇만 드시면 몸이 거 뜬해지실 거예요.”
"으으음…….”
릴리엔은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마나. 헤이워스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면 쇠고기에 토마토를 넣고 스튜를 끓일까요? 씹을 것도 없게 부드럽고 진한 맛이 날 거예요.”
도리도리.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던 레몬파이는?”
“글쎄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이어지는 권유에 마음 약한 릴리엔은 더 이상 고개를 흔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됐다.'
헤이워스 부인이 내심으로만 쾌재를 부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아가씨, 제가 아무것이나 간단한 것을 가져올까요?”
릴리에도 마주 웃고 말았다.
“그러세요, 부인. 노력해 볼게요.”
“어마, 착하기도 하셔라.”
자신 없어 하는 릴리엔을 보며 헤이워스 부인은 아주 먹기 편한 음식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만한 것으로, 유별나거나 독특하지 않게!’
혹여나 릴리엔의 마음이 변하거나 도중에 잠들지 않도록 서둘러 주방에 주문을 내렸다.
“오믈렛! 오믈렛을 만들어요. 크림과 버터를 넣어서 아주 부드럽게. 아가씨께서 식사를 하신대요!”
“이런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데가.”
주방장이 직접 두 팔을 걷어붙였다. 숙련된 요리사는 순식간에 헤이워스 부인이 주문한 대로 크림과 버터를 넣어서, 찐 계란보다 훨씬 더 보들보들하면서 폭신한 오믈렛을 만들었다.
작은 다리가 달린 쟁반에 반짝이는 은 식기. 그 위에 담긴 황금빛 오믈렛에서 풍기는 향기는 가히 매혹적이었다.
이만하면 아가씨께서도 안 드실리가 없다며 필립이 잔뜩 콧대를 세웠다.
김이 오르는 요리가 식을세라, 헤이워스 부인은 공치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쟁반을 직접 날랐다.
식재료, 솜씨, 정성. 무엇 하나 빠지지 않은 그 접시가 릴리엔의 무릎에 곱게 놓였다.
고소한 계란과 우유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배가 터지도록 불러도 한입쯤은 먹고 싶어질 그런 음식이었는데도…….
'먹고 싶지 않다.'
지금 릴리엔의 눈에는 먹음직스러운 오믈렛이 종이를 뭉쳐 놓은거나 다름없이 보였다.
먹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는 뜻이다.
“아가씨……? 뭔가 문제라도, 어머 세상에.”
헤이워스 부인이 호들갑스럽게 다가왔다.
“세상에, 이걸 잊었네."
".......”
부인이 쟁반 한쪽에 놓인 조그마한 그라인더를 들고, 오믈렛위에 후추를 뿌렸다.
"…자, 아가씨?”
다정한 부인의 얼굴에 서린 긴장감에 릴리엔은 순간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고작 이 한 끼 식사, 제가 한 숟가락 뜨는 게 대체 뭐라고.
이 한 접시가 릴리에의 무릎에 도착하기까지 사람들이 들인 수고가 너무 많았다.
"도저히 외면할 수가…….”
릴리엔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식기를 들어 오믈렛의 귀퉁이를 썰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오믈렛 반쪽을 드시는데 한 시간이 다 걸렸나 봐요.”
'근래 들어 아가씨의 식사량이 새 모이만큼도 안 된다.'는 주제로 주치의인 쇼를 두 시간이나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헤이워스부인이 유일했다. 딸인 리타는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사실입니다”, “정말입니다”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 두 시간 동안이나.
한 번도 지치지 않고.
“예, 뭐,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지겨운 모녀 같으니. 시달린 끝에 쇼는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저더러 뭘 어쩌란 말입니까?”
"어머, 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 써요.”
헤이워스 부인이 엄한 눈초리를 보냈다.
"나야 쇼, 당신이 입만 험하지 내심으로는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망정이지만요.”
“제가요?”
툴툴거리면서도 쇼는 적극적으로 항변하진 않았다.
그래, 인정하기 민망할 뿐이지 그도 릴리엔을 좋아하긴 했다.
'아니, 나뿐 아니라 웬만한 의사라면 다 그럴걸.'
섭식 문제로 애를 먹이는 것만 빼고 릴리엔은 최고의 매너를 가진 환자였다.
의사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지시사항을 행동에 반영하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의사로서의 쇼를 철저히 신뢰하는 태도. 게다가 작위가 없는 그를 “선생님” 이라고 부르며 존중해 주기까지 한다.
대체 이런 환자를 어떻게 싫어 한단 말인가?
그런 쇼의 내심을 훤히 짐작하고 있는 헤이워스 부인이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저놈의 반골 기질이 문제라니까.”
좋은 것도 좋다고 말 못하는 한 심한 남자 같으니. 철이 좀 들어야 할 텐데 말이야.
충고해 봤자 펄쩍 뛰며 들어먹지도 않을 모습이 선했다. 헤이 워스 부인은 한숨을 쉬며 경고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릴리에 아가씨 일에 '어쩌라고' 운운했다가는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거니까 조심해요.”
“대체 어느새 다들 릴리에 아가씨라면 이렇게까지 껌뻑 죽게 된 건지.”
마치 저는 아닌 것처럼 쇼가 투덜댔다.
“뭐, 사실 아가씨께서 잘 안 드시는 거야 단순한 식욕 부진이 아니라 이 병의 증상에 가깝습니다."
“증상이요?”
“안 먹고 싶어서 안 먹는다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란 말입니다.”
생명력은 간단하게 말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심장을 뛰게 하고 혈액을 순환시켜 장기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소화기를 움직이는 아주 기초적인 단위의 힘.
“지금 아가씨의 상태는 쉽게 말해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는 데 사용할 생명력이 없는 겁니다.”
쇼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아마 지금 아가씨 눈에는 음식이 음식으로도 안 보일 겁니다.”
“세상에……,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방법 있나요, 조금이라도 입맛당기는 걸 찾아서 드시게 하는 수밖에.”
리타는 조금 생각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만약 아가씨께서 정말로 그 무엇도 음식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땐 어떡합니까?”
“큰일 나겠죠.”
리타가 한쪽 눈을 가늘게 좁히며 쇼를 바라보았다. 쇼가 “아니”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성의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짭니다. 원래 생명력에 가장 치명적인 게 안 먹고 안 자는 거 라서요. 그러니까…….”
쇼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절 좀 그만 째려보시고 나가서 아가씨에게 뭐라도 한 숟갈 먹일 궁리나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째려본 거 아닙니다.”
“아니긴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헤이워스 양도 벌써 아가씨추종자가 다 되셨는데요?"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아닙니다. 알렌 헤이워스 경의 심부름꾼 노릇이 싫을 뿐입니다.”
“아하….….”
쇼는 리타보다 먼저 탈출한 심부름꾼이 '차라리 말똥을 치우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아무튼 조언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윈스턴 씨께서는 좀 더 튜린의 가솔로서 입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요?”
“아가씨에 대해서 '큰일 나겠죠.' 이런 식으로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될 것 같다는 뜻입니다.
듣기 심히 안 좋거든요.”
평소 리타의 악의 없는 직언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니 나는…….”
“그럼 이만.”
심지어 대답을 듣지도 않고 획나가 버리기까지.
남겨진 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추종자 아니라더니, 개뿔. 거의 어미 새가 다 되셨구먼."
물론 투덜거려 봤자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