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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26화 (26/155)

26화.

어쨌든, 그날 이후로 시작된 '릴리엔에게 뭐라도 먹이기 작전'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대로 가면 곤란하겠는데"

한번은 릴리에이 ‘식사 때마다 매번 다섯 가지 이상의 음식을 올리는 건 너무 과하다.'고 부담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엔 오라버니께서 식사 시간 내내 침통하고 슬픈 눈빛을 보내셨지…….’ 부담스러운 것도 부담스러운 거지만 바쁜 사람을 방해했다는 죄책감이 더 컸다.

'어쩌면 좋을까……?'

고민해 봤자 답은 안 나왔다.

오히려 잠만 가물가물하게 쏟아졌다.

잠시 후, 튜린 성의 공인 팔불출이 된 세드릭은 살그머니 릴리 엔의 방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자고 있구나.”

간발의 차로 릴리엔은 잠이 들어 버렸다.

세드릭이 심혈을 기울인 침실이었다.

방 안은 꼭 릴리에처럼 희거나 푸르렀다. 금장이나 보석 같은 화려한 꾸밈은 싫다는 릴리엔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방은 언뜻 소박해 보였다.

그러나 구석구석 뜯어보면 단순히 금칠을 하는 것보다 배 이상 돈을 더 쓴 티가 났다.

뽀얀 우윳빛 반투명한 커튼이 드리운 침대 안쪽, 릴리엔은 하얀 침구에 그가 선물한 곰 인형과 파묻혀 있었다.

무감하던 세드릭의 얼굴에도 기어코 벙싯 미소가 번졌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아이다."

“사랑스러우시지요.”

"음."

세드릭은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잠든 릴리에의 얼굴을 마냥 바라보았다.

손조차 댈 수가 없었다. 깨우기가 아까웠다.

“얼마나 이렇게 잤느냐?”

“퍽 주무셨습니다. 깨우셔도 될 거예요.”

헤이워스 부인의 말에도 세드릭은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은 같고 얼음 같던 청년이 절절녹아내리는 표정으로 잠든 여동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미 편안한 잠자리를 어떻게든 더 편안하게 해 주고 싶은 건지, 커다란 손끝으로 조심조심 이불을 매만지다가 아이가 눈썹을 움찔하자마자 급히 숨을 죽였다.

'참 흐뭇한 광경이기는 하지만.’

부인은 난감하게 웃으며 재차 만류했다.

“가주님, 죄송하지만 아가씨 식사하실 때가 한참 지나셔서요.”

"이런, 그러한가.”

세드릭이 당황하여 릴리엔에게 손을 뻗었다.

“릴리.”

깃털보다도 더 보드랍게 귀애하는 여동생의 뺨을 살그머니 쥐고 소곤소곤 귓가에 속삭인다.

“일어나야지. 헤이워스 부인의 말이 네가 잠을 충분히 잤다는구나.”

릴리에이 코끝을 움찔움찔하더니 서늘한 손아귀에 뺨을 포옥기댔다. 세드릭의 표정이 또 한번 허물어졌다.

'저러다간 반나절이 다 가도 못깨우시겠네.'

혀를 차면서도 헤이워스 부인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심정 같아서는 이대로 딱 한 시간만 더 재우고 싶다.”

“아이고, 아니 될 말씀이셔요.

안 그래도 아침도 허술하게 드셨단 말입니다.”

그렇다는 데야 별수 없었다. 세드릭은 다시 한번 릴리엔을 살살흔들었다.

꿈결에서는 봄바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다행히 릴리엔의 잠이 얕았다.

“음…….”

잠투정 하나 없이 졸음기 가득한 눈이 초점을 맞추느라 깜빡깜빡 하는 데서 세드릭의 애간장은 다시 한번 녹아났다.

“깨워서 미안하다. 많이 졸렸느냐?”

목으로 으음 소리를 내며 릴리 엔이 조금 도리질을 쳤다. 그렇게 다시 눈이 감기려는가 싶더니…….

"…오라버니?”

"이제 알아보는구나.”

어떻게 봐도 막 자다 일어난 모습으로 릴리엔이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었네요. 언제 오셨어요? 내일이나 오실 것 같다고 하시더니…….”

그 말이 꼭 그를 보고 싶었다는 말 같아서 세드릭은 즐거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푹 잔 것 같구나.”

“윈스턴 선생님께서 잘 자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하셔서…….”

“잘 했다는 말이다.”

못 먹는 아이가 잠이라도 푹 잤다니, 세드릭은 그 사실이 기껍기만 했다.

“윈스턴의 의술은 신뢰할 만하지. 그의 지시를 따랐다니 잘했다.”

"음….”

늘어지게 잔 걸로 칭찬을 받는 건 핀잔을 듣는 것보다 배는 부끄러웠다.

릴리엔의 얼굴은 부끄러워 뺨이 달아오른 후에야 혈색이 좀 도는 것 같았다. 세드릭이 살살 속삭였다.

“릴리, 오라비가 널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

"이런, 놀랍지는 않네요.”

“그런가.”

세드릭은 웃었다. 릴리엔은 요즘 그가 '너무 과한 선물을 한다며 슬슬 난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차였다.

돈과 권력이 넘치는 젊은 제후에게 가당찮은 말이었지만 세드릭은 릴리에이 그를 바라보며 기막혀하는 게 왠지 모르게 좋았다.

“아주 귀한 건데.”

“오라버니께서 제게 안겨 주시는 것 중에 귀하지 않은 게 있었나요?”

“없었지.”

세드릭이 뿌듯하게 대꾸하자 릴리엔이 예의 말문이 막힌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딱 이럴 때면 그가 마치 여염집의 철이 좀 덜 든 오빠고, 릴리 엔은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안살림을 맡아보는 똘똘한 여동생이 된 것 같아서 즐거웠다.

평범하고 행복했다.

세드릭이 눈짓하자 리타가 침실 밖에서 웬 그득 찬 바구니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과장 좀 보태 릴리엔의 머리통만 한 황금빛 과일이 들어 있는 바구니였다.

보송보송한 금빛 외피에 불그스레한 빛이 먹음직스럽게 감돌았다. 뿐만 아니라 바구니가 들어온 순간부터 방 안에 향기가 물씬했다.

“동쪽 교역로에서 들어온 과일이야. 복숭아라고 하더구나.”

“이게요?”

제국에서 나는 복숭아는 아기 주먹만큼 작달막하고 옹골찼다.

새파랄 정도로 하얀 열매는 씹으면 아삭하고 시큼할 뿐, 별 맛은 없었다.

헤이워스 부인이 감탄을 했다.

“세상에, 동쪽 복숭아는 거의 주전자만 하네요. 요 예쁜 것 좀 봐. 어떻게 이런 걸 다 구하셨어요?”

부인의 감탄에 세드릭은 뿌듯해졌다.

“귀하다고는 하더군.”

동쪽 교역로를 오가는 상인은 자기네 나라에서는 이 과일을 한 알 먹으면 3000년을 산다는 말이 있다며 과일이 아니라 영약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릴리엔이 생각이 났다.

세드릭은 ‘성질이 무른 과일이라 상처 없이 나르느라 고생했다.'며 너스레를 떠는 상인에게 군소리 않고 달라는 만큼 금을 쥐여 주었다.

'3000년까지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걸 먹어서 1년이라도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좋겠다.'

세드릭은 릴리엔의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절박했다. 3000년을 산다는 멍청한 헛소리도 지나치지 못할 만큼.

헤이워스 부인이 복숭아 한 알을 두 손으로 받쳐 들며 새삼 감탄했다.

“푼돈 얼마 주고서는 못 구하셨을 것 같은데. 운도 좋으셨던 것 같아요. 아가씨, 제가 이거 얼른 깎아 드릴 테니 맛이라도 좀 보세요.”

헤이워스 부인이 기쁘게 칼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칼은 거의 필요가 없었다.

과즙이 뚝뚝 흐르는 과육 위로 얇은 껍질이 미끄러지듯 벗겨졌다. 부인이 연신 감탄을 하며 샛노란 과육을 발라내 접시에 담았다. 말캉한 과육에서 즙이 뚝뚝흐를 때마다 단내가 폴폴 풍겼다.

“자, 어서 드세요, 아가씨.”

단내 덕분인지 오랜만에 군침이 돌았다.

릴리엔은 간만에 거부감 없이 복숭아 한 쪽을 오물오물 먹었다.

오매불망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릴리에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맛있어요.”

"…그러냐.”

모두가 맥이 풀리듯 안심했다.

시키지 않아도 두 번째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를 보며 세드릭은 쇼의 말을 떠올렸다.

“생명력의 기전이 까다로운 건 살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증감하는 경향성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건…….”

“의지를 보인다면 회복이 빠르다는 뜻입니다. 개중에서도 먹기 싫어도 곡기를 끊지 않는 행동은 가점이 꽤 높은 편입니다.”

야금야금 먹고 있는 복숭아가 단순히 한 끼 배를 채우고 마는 게 아니라 릴리엔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셈이었다.

그러니 먹는 것을 보기만 해도 흐뭇할 수밖에. 세드릭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런데요, 오라버니.”

약간 고민하기는 했지만 세 번째 조각을 포크로 찍으며 릴리엔이 물었다.

“이거 얼마나 주고 사셨어요?”

“음…….”

세드릭이 웃는 얼굴로 말을 흐렸다. 알렌이 충고했다.

“안 듣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아하. 릴리엔은 납득했다.

'들으면 있던 식욕도 떨어질 만한 액수를 주셨다는 말이군.'

충고대로 안 묻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날 릴리엔은 얌전히 복숭아 한 개를 해치웠다.

문제는 그날 일을 계기로 세드릭의 '희귀하고 맛있는 먹을 것 구하기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라니스터 대부인까지도 합세해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릴리에에게 무언가를 보내 주곤 했다.

그때마다 배달을 맡은 건 일라 시아와 솔라리아 자매였다.

솔라리아는 받는 것 없이 릴리 엔을 아주 좋아했고 일라시아와는 차분한 성미가 잘 맞아 떨어졌다.

릴리엔은 그렇게 소로리티 정식모임 외에도 따로 자매와 만나 사적인 친분을 다져 갔다.

물론 릴리엔을 아기 새처럼 먹이는 일에 헤멘린나 대제후도 빠질 수 없었다.

다만 그 스케일이….….

"네? 동쪽에서 복숭아나무를 수입해 오고 계시다고요?”

커도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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