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릴리엔의 입술이 벌어졌다. 헤멘린나 대제후가 껄껄 웃었다.
“암, 우리 아기가 잘 먹는다는데 본 후가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하지만 그 나무가…… 잘……
자랄까요? 토양도 기후도 다를 텐데…….”
“걱정 마라, 안 그래도 생육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1200그루를 수입해 오라고 시켰단다.”
그제야 릴리엔은 헤멘린나 선제후가 동방교역로로 유명한 알트해를 독점한 대선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대제후가 소유한 무역선 중 세척이나 이 일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쯤엔, 릴리엔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생각해 보니 우리 아기에게 내가 소로리티 데뷔 선물은 주었지만, 혼인 증서를 교환할 때에는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지 않으냐.”
릴리엔은 그 빛의 눈물 연작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만으로 10년 치 생일 선물을 퉁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아꼈다.
“혼인 선물로 네가 좋아하는 동방 복숭아 과수원을 꾸려서 선물해 주마. 기대하고 있거라.”
"네……, 감사합니다…….”
시외할아버지의 스케일이 커도 너무너무 컸다.
더 큰 문제는 뒤에서 한발 늦었다는 표정으로 헤멘린나 대제후를 노려보고 있는 세드릭이었다.
'아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말린다고 들을 사람들도 아니었다. 릴리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사람이 이 나라에서 재력과 권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나 한 사람을 먹인다고 가산을 다 탕진했을 수도 있겠어.’
* * *
그날 밤.
간신히 홀로 남은 릴리엔은 잠드는 대신 펜을 잡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공들여 채운 도식으로 빼곡한 종이들이 놓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네모반듯한 형태의 문자로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먼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는……"
중얼중얼하며 릴리엔은 채워 나간 내용에서 빠진 게 없나 다시 한번 점검했다.
이 도식은 그녀가 기억나는 대로 정리한 원래 이야기의 타임라인이었다.
마리앤의 일을 계기로 릴리엔은 그녀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미래가 변화할 수도 있단 걸 실감했다.
'내가 언제까지 미래 일의 사소한 부분을 다 기억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고.’
최소한 원래 일어났어야 할 일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서 잘기억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음.”
이만하면 된 것 같았다. 릴리엔은 만족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깨달았다. 미래는 항상 그녀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되어 주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일까지 욕심을 내서 죄다 바꾸려고 했다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가장 절실한 것만을 바꾸어야 한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당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릴리에의 푸른 눈이 도식을 죽훑어 내려오다가 한가운데쯤에서 멈췄다.
거기에는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 알아볼 수 있는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클로드1세 7년 9월, 헤멘린나 대제후 사망.]
황태자 지지 세력의 거목이 쓰러진다.
그녀 외의 누군가가 읽는다면 기절초풍할 엄청난 내용이었다.
릴리엔은 말없이 자기 손으로 적은 구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명백했다. 먼저는 여기 이 헤멘린나 대제후, 그녀에게만은 다정한 할아버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대제후는 현재 여든 살. 7년 뒤 여든일곱 살에 죽는다. 천수를 충분히 누린 뒤에 찾아온 자연사였다.
벌써부터 마음이 아팠지만 릴리 엔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그 다음으로는……….'
[동년 9월 말, 마테오 황태자 실종(납치).]
[동년 10월 초, 다미언 루펜바인 좌안 실명. 마테오 황태자 구출 과정에서 정신적으로도 상해를 입음.]
든든한 버팀목이자 보호막이었던 헤멘린나 대제후의 죽음 직후,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테오 황태자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다미언은 황태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왼쪽 눈을 잃고 모종의 이유 때문에 정신적 상해까지 입게 된다.
'이 일은 막을 수 있어. 아니, 막아야만 해.'
아직 자신은 없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앞으로 7년의 세월이 남아 있었다.
7년,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
‘그때까지…….’
릴리엔은 헤멘린나 대제후의 이름과 7년이라는 글자를 번갈아보며 다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실 수 있도록 건강을 챙겨 드려야겠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 헤어지더라도 후회가 덜 남게끔 마음껏 사랑받자.'
앞으로는 선물을 받을 때 조금 덜 부담스러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드려야겠다고 릴리엔은 다짐했다.
* * *
그 다짐으로부터 7년의 밤이 지나고 7년의 낮이 지났다.
클로드 1세 7년 가을.
헤멘린나 대제후가 숨을 거뒀다. 향년 87세였다.
6. 그 악당이 청혼하는 법.
시간이 흐른다.
살아 있는 존재들 중 누군가는 늙고, 누군가는 병들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란다.
“세상에나, 아가씨께서도 벌써 열아홉 살이 되셨네요."
어느 평범한 날 아침.
리타가 릴리에의 시녀가 되고 하녀들의 보직이 자리를 잡으면서 헤이워스 부인은 릴리엔의 시 중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부인은 가끔 이렇게 바쁘지 않을 때 릴리엔을 찾아와 성장(盛裝)하는 것을 돕곤 했다.
부인의 취미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자라 어엿해지시다니."
감개무량한 어조가 쑥스러워서 릴리엔은 조금 웃었다.
헤이워스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하녀들이나 심지어 리타까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른둥이로 태어나 원체 허약했던 아이가 마력 고갈증이라는 희귀병까지 앓기 시작했다.
열네 살 끝물이 되도록 릴리엔의 키는 자라다가 말다가 해서 모두의 애를 태웠다.
"선대 가주님도 그렇고, 가주님도 그렇고 다들 훤칠하니 키가 크신데.….”
"필시 못 드셔서, 배를 곯아서 저러시는 겁니다.”
"안 돼요. 여기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드시면 아가씨 토해요.”
"어쩌지? 그럼 내일부터는 같은 음식이라도 버터를 조금씩 더 넣어서 나가면 어떨까요?”
"그거 좋네요! 드시는 간식에도 설탕을 좀 더 넣어요!”
모두가 섬세하고 집요하게, 각고의 노력을 들인 덕분에 릴리에은 열여섯이 되어서야 뒤늦은 성장기를 맞이했다.
너무 급격하게 찾아온 나머지 반년은 거의 잠을 못 주무시고 끙끙 앓기는 하셨지만…….'
그때는 안 크셔도 좋으니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고 빌었는데, 세상에.
'그 소원이 이뤄졌으면 큰일 날 뻔했어.'
헤이워스 부인은 무려 여자 평균키보다 손가락 하나만큼 더 자라는 위업을 달성한 릴리엔을 뿌듯하게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옥을 깎아 만든 호리병처럼 가느다란 체구라서 본래 제 키만큼 커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살만 조금 더 붙으시면 좋겠는데 그게 참 어렵단 말이야…….'
최근에는 그런 일도 있어서.'
헤이워스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해서 릴리엔은 조금 웃었다.
클로드 1세 7년, 가을의 끝물.
제국은 아직도 헤멘린나 대제후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소화해 내고 있는 중이었다.
릴리에 개인적으로도 그랬다.
가깝게 지낸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어서 더 가슴이 아팠다.
행여나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막지 못한 것은 아닌지 죄책감마저 들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여러 날을 심하게 통곡하면서 릴리엔은 다시금 깨달았다.
미래를 조금 엿본 것은 전지(全知)도 아니고 전능(全能)도 아니었다.
기억은 그저 기억, 릴리엔은 그저 릴리엔이었다.
어떤 일은 바꿀 수 없었다.
어떤 일은 그저 일어나고야 말았다.
심한 무력감과 눈물 속에서 릴리엔은 어린 시절의 결심을 떠올렸다.
'언제 헤어지더라도 후회가 덜 남게끔, 마음껏 사랑받자.’
과연 자신은 그 결심대로 행동했는가?
7년 전 알트해를 건너온 1200그루의 복숭아나무 중 600그루가 그 해 겨울을 넘겼다. 그 중 300그루가 5년을 넘게 생존했다.
대제후와 릴리엔은 매년 여름마다 그 복숭아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하나는 나이 많아 늙었고, 하나는 몸이 약하니 우리야말로 삼천년 사는 복숭아가 꼭 필요한 두 사람이라고 농담을 나누면서.
지금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그렇게 했다.
그 일을 떠올리니 조금씩 눈물이 멎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얼마 전 2월에 열아홉이 되었다. 제국인들은 열아홉이 되는 생일을 기점으로 성년이 된다.
헤멘린나 대제후도 그 특별한 생일까지는 함께 보냈다.
릴리에이 올해 복숭아도 맛있었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대제후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말없는 웃음만을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를 만나서 말년에 즐거웠다.”
그때 예감하셨던 걸까.
또르르 굵은 눈물방울이 마지막으로 흘러내렸다. 그 뒤부터는 눈시울이 젖을 적은 있었지만 통곡까지 하지는 않게 됐다.
마치 누군가가 눈물을 닦아 준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