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상속은 대제후가 생전에 지명한 추정상속인, 다미언 루펜바인 대공에게 이루어졌다.
이제 다미언은 루펜바인의 대공전하인 동시에 헤멘린나의 선제후였으며 헤멘린나의 공작, 알트해의 대선장, 팔미앵의 백작이 되었다.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족 선제후'라는 전무후무한 입지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 황제 쪽도 만만 치 않았다.
즉위 원년을 무사히 넘기고 이후로도 1년, 2년, 3년…. 그리고 이제 7년.
세월을 이길 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형을 죽이고 황위와 황후를 차지한 패륜아 클로드보다 황제 클로드 1세에게 익숙해졌다.
치세는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에게 후계자는 생기지 않았지만 황태자파에게는 슬슬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해졌다.
다미언 대공과 릴리엔의 결혼이 수면 위로 드러날 시점이 되고 말았다는 뜻이고…….
'이제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구나.'
더불어 그녀도 행동을 시작할 때가 오고야 말았다.
* * *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쯤 뒤, 마테오 황태자는 황제 일파에게 납치당한다.
장소는 황제 직할령 칸타쿤.
7년의 세월이 지나 그곳은 이제 황제의 지배하에 완전히 속한 땅이 되었다.
현 황제, 클로드에게는 영리한 책사가 있었다.
세간에는 그의 공식 정부로 알려져 있는 레이첼 일라이저 우드부인.
황태자의 가장 큰 지지자인 헤멘린나 대제후가 사망한 혼란을 틈타 레이첼은 황태자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목적은 태자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행여나 서류를 위, 변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포기 과정은 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태자를 죽일 수도 학대할 수조차 없었다.
황태자는 완전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숙부 앞에서 계승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클로드와 레이첼은 황태자를 납치해 감금한 뒤 갖은 수를 써서 소년을 굴복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태자는 간단히 꺾이지 않았다. 차라리 죽겠다고 다짐하고 굳세게 버텼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크게 지체 되었다. 황제 일파는 결국 다미언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꾀 많은 레이첼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황태자를 미끼로 다미언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황태자를 죽이고 그 죄를 다미언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다미언을 사로잡기 위해 황실은 마도 시대의 병기까지 반출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실패했다. 다미언이 가까스로 마테오를 탈출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미언을 사로잡았다는 게 수확이었지만 그마저도 3일만에 다미언이 탈출에 성공하고 만다.
그리고 주야에 걸친 추격전 끝에 아군과 합류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미리 나타나 구해 준다면.’
결혼 생활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릴리에에겐 이 일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영리한 레이첼은 이슬라르와 칸타쿤 사이에 마도 터널이 있다는 핑계로 교묘하게 이슬라르와 황태자 일파 사이마저 이간질했다.
그 일은 혈맹의 신뢰를 뒤흔들었으며 릴리엔의 결혼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릴리엔은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반드시 다미언을 구해야만 했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지난 7년간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이 날을 준비해 왔다.
이제는 준비한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먼저 칸타쿤으로 가야겠지.'
칸타쿤 제도는 황제 직할령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드릭이 그런 위험한 곳으로 릴리엔을 보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길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지.’
릴리엔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었다.
* * *
그 날 저녁, 세드릭은 한 가지 비보를 전해 듣게 되었다.
“최근 들어 아가씨 식사량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릴리엔은 마력 저장소인 코어가 손상된 환자였다.
지금까지 손상된 코어로 누수되는 마력은 세드릭의 것으로 보충해 왔다.
하지만 생명력은 보충할 방법이 없어서 릴리에이 본디 가진 것만큼을 잘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정석적이었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했다.
먹지 않는 건 릴리에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생명력이 균형을 잃고 빠르게 고갈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장례식이 있어서 무리를 한 탓에 컨디션이 흐트러지신 것 같습니다.”
“환절기인 것도 무시할 수 없어요. 윈스턴 씨, 혹시 식욕이 도는 약 같은 걸 처방하지는 못하나요?”
"맙소사, 안 돼요.”
쇼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독한 걸 아가씨께 쓰면 일 납니다.”
“가주님.”
헤이워스 부인이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이라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지만…….
'과연 어떨지.'
어쨌든 이 사태를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세드릭은 릴리엔을 찾아갔다.
강요하거나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세드릭이 어렵게 운을 뗐다.
“요즘 네가 먹는 양이 영 시원찮다고 하더구나.”
“입맛이 없는 걸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릴리에이 응석 비슷한 것을 부렸다.
마음이 찡해서 더 나무라지 못하고 세드릭은 릴리엔을 도닥였다.
릴리엔이 살그머니 눈을 뜨며 말했다.
“아무래도 날씨가 좀 추워서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는 조금 더 노력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춥다고?”
겨울도 오지 않았는데 춥다니.
'극도로 쇠약해졌으니 그럴 수도 있나……?'
그 순간 세드릭은 결심했다. 릴리엔을 춥지 않게 해 주기 위해 서라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유리 온실이라도 만들어서 사막처럼 덥게 불을 때 줄까.”
릴리엔은 킥킥 웃었다. 농담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여기보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쉬러 가고 싶기는 하지만.”
조상의 유산인 파시사 숲 나무의 절반을 숯으로 만들어 겨우내불을 때 달라고 해도 망설임 없이 그럴 작정이었던 세드릭이 멈칫했다.
“튜린을 떠나서?”
“아주 떠나는 건 말고요.”
세드릭은 놀랍게도 망설였다.
여동생을 피접 보내는 데 드는 수고와 비용이 아까운 건 물론 아니었다.
“릴리, 여길 떠나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죠. 알아요. 전 긴 여행을 견딜 체력이 없으니까요.”
맞다. 게다가 두려운 점은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곧게 자란 높은 나무 같던 아버지도 꺾였다. 태산 같던 헤멘린 나 대제후도 죽었다.
구태여 누가 톡 건들지 않아도 제풀에 와장창 부서질 것처럼 여린 누이를 도무지 품 밖으로 떼어 놓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않았지만…
'이를 어쩐다.'
집무실에 돌아온 세드릭은 고뇌에 빠졌다.
조금 전 릴리엔은 보드랍게 구운 자기 주먹만 한 빵을 반절도 먹지 못했다.
수프를 찍어 한참을 씹다가 음식이 다 녹아 사라질 지경이 되어서야 목이 꿀떡 하고 음식을 삼켰다.
'병든 병아리도 저것보단 건강할 터인데…….’
피접, 피접이라…….
“가주님.”
알렌이 불쑥 그를 불렀다.
“칸타쿤 제도에 별장이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를 그리로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뭐?”
세드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칸타쿤은 이제 황제 휘하의 상비군이 삼엄하게 지키는 땅이었다.
그곳은 현재 이슬라르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오히려 그렇기에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렌은 지지 않고 주장했다.
“약혼이 기밀인 이상, 황실에 있어 릴리에 아가씨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니까요.”
“음.”
“게다가 튜린엔 칸타쿤까지 일직선으로 통하는 마도 터널이 있지 않습니까.”
고대에 건설된 이 터널을 이용하면 두 시간 안에 칸타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장기간 마차 여행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가주님으로부터 마력을 공여받으셔야 하니…….”
즉, 요양을 떠나려면 사실상 칸타쿤이 유일한 방법이란 뜻이었다.
세드릭은 고민했다.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을 전해 들은 쇼는 이렇게 반응했다.
“의사로서 진단하건대, 이 성의 최고 결정권자 둘에게는 아가씨의 일이라면 정상적인 패턴으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는 병이 있습니다. 아주 불치병이죠.”
“하지만 선생님께서도 아가씨가 요양을 떠나시는 데 동의하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보석 박힌 장신구 하나도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예산을 잡아먹는 여행을 순순히 떠나실리가요. 두 분 다 아가씨 성격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전 좋아요. 기대되네요.”
“엥.”
의외로 릴리엔은 순순히 요양권유를 받아들였다.
“어머나, 아가씨!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헤이워스 부인이 반색을 했다.
이렇게 반나절 만에 칸타쿤행이 결정되었다.
완벽하게, 릴리엔의 계획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