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29화 (29/155)

29화.

* * *

“감사해요, 오라버니.”

황제 직할령인 칸타쿤의 또 다른 별칭은 금싸라기 땅이다.

귀족 대상 휴양지인 만큼 체류하는 데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큰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세드릭에게는 비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내게서 마력을 공급받아야 하는 문제만 아니면 반년 정도 푹 쉬게끔 할 수도 있겠지만.…."

몸이 워낙 부서질 것처럼 여려 현재 릴리엔은 한 번에 많은 마력을 받을 수도 없었다.

마력을 타인에게 나눠 주는 건수혈만큼이나 고려해야 할 점이 많았다. 시전자의 실력도 상성도 중요하기에 세드릭이 아니면 아예 불가능했다.

“2주 정도면 충분해요.”

"너무 욕심이 없는 것 아니냐.”

릴리엔은 기가 막혔다.

“온실 하나를 새로 지을 수도 있는 돈을 헛되이 날려 버리면서 하실 말씀이 아니신데요."

제국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의 소유자는 기가 막혀 픽 웃고 말았다.

“이 세드릭 이슬라르가 돈 낭비를 한다고 걱정을 받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아무래도 안살림을 그만 제가 맡는 게 좋겠어요."

본디 가내의 살림은 안주인의 역할이지만 지금처럼 안주인이 부재중인 경우 가문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 그 일을 맡는다.

원래 대로면 튜린의 내정도 성년을 기점으로 릴리엔이 맡아야 하는데 세드릭은 건강 핑계를 대며 아직까지도 모든 일을 자기가다 떠안고 있었다.

“저도 이제 성년이잖아요. 일을 해 본 경험도 없이 대공비가 되어 망신을 당하면 어떻게 해요?”

“그 이야긴 예전에 끝났다, 릴리.”

“오라버니.”

“아무리 졸라도 안 돼.”

릴리에에게 한해서만큼은 동방복숭아보다도 무른 세드릭이 드물게 엄하게 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 건강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

“건강에 대한 오라버니의 기준이 너무 높은 거예요.”

“일을 하고 싶다고 할 정도면 쇼핑은 당연히 할 수 있겠지. 새옷을 맞추겠느냐, 아니면 보석을 사들일까?”

릴리엔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항복할게요.”

세드릭이 픽 웃었다.

하여간 옷도 싫다 보석도 싫다. 그러면서도 피접은 가겠다는 걸 보니 꽤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릴리엔이 배시시 웃었다.

“처음이니까요.”

그랬다. 계모가 하나뿐인 딸을 버려두다시피 했고 그 이후에는 내내 아팠기 때문에, 릴리엔은 이번이 첫 여행이었다.

"…그래, 이참에 잘 되었구나.”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이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척하면 아는구나.”

세드릭은 릴리엔을 아이처럼 토닥였다.

더 이상 작지 않은 여동생이지만 세드릭에게는 아직 열두 살 아이 그대로였다.

휴양을 가려면 아무래도

'새로운 옷이 있는 게 좋겠는데…….’

“제가 자꾸 안살림을 하고 싶게 만들지 마세요, 오라버니.”

“알았다, 알았어.”

* * *

릴리엔이 한창 피접 준비에 들어간 그때.

“마테오 전하의 행적이 끊겼습니다.”

머리카락 뿌리 부근이 짙은 백금발을 한 남자가 뒤돌아 선 채 침묵했다. 부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공 전하, 혹시…….”

“지난 7년 동안 누누이 말해 왔지만 경.”

대공이 부드럽게 회전의자를 돌려 앉았다.

7년의 세월 동안 누군가는 늙었고 누군가는 병 들었으며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자랐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단해졌다.

제국 전쟁사를 열두 번도 다시 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평가 받는 공적에 북부 반란을 진압했다는 한 줄을 더 추가한 남자의 얼굴에서 더 이상의 애티는 찾아볼 수 없었다.

7년 전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요요할 뿐.

“우리 작은형께서는 귀여운 마테오를 덜컥 죽여 버릴 만큼 멍청하지 않다니까.”

“아니, 그렇다고 해서 태자 전하께서 사라지셨는데 이렇게 유유자적 하실 일입니까?”

“호들갑을 떨 만큼 그 애랑 사이가 좋지는 않은데.”

"......"

아이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체도 다루기 힘든 다미언이었지만 헤멘린나 대제후가 죽은 뒤로는 아주 막 나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안 그래도 슬슬 찾으러 가 볼 생각이긴 했으니까.”

“그럼 그럴 작정이라고 말이라도…… 아니, 아니. 됐습니다"

투덜거리는 아이반을 내버려 두고 다미언은 자기 검을 챙겼다.

외피부터 칼자루까지 온통 순은으로 만든 것처럼 희고 아름다운 검에는 여전히 남빛 매듭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7년을 매달려서 함께 피를 보느라 낡아 버린 장식을 습관적으로 매만지며 다미언이 중얼거렸다.

“그럼, 가 볼까.”

* * *

릴리에의 피접 준비도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걸…….”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웬만하지 않은 재력의 소유자인 오빠를 둔 복이려니 생각해야 하는 걸까…….”

상자로 점령된 방 안.

'음,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때는 방이라도 좁았지. 이 넓은 방을 채우려면 예전보다 훨씬 더 돈이 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들었는지 추정조차 해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으응…….”

차곡차곡 정리된 상자의 산 뒤에서 리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엔은 혹시나 기적을 바라며 물었다.

“혹시 나 이사 가니?”

저 많은 게 다 일주일치 짐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성장기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줄어 든 릴리엔은 현재 수면제를 처방받고 있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오랜 시간 자면서 에너지를 덜 쓰고 생명력을 보존하는 겁니다.”

약을 먹고 선잠이 든 사이에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잠결에 치수를 잰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보석이 좋겠냐는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네…….’

무심결에 무슨 소비를 대체 얼마만큼 한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정신만 멀쩡했어도 어떻게 말려 보는 건데. 하루 24시간 중 거의 스무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있는 통에 뭘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일주일 동안 말이지.”

리타는 현명하게 대답을 피했다. 대신 규칙적으로 쌓여 있는 상자 뒤로 쏙 사라지더니 무슨 납작하고 긴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

“열어 보십시오.”

가까이서 보니 상자 자체도 범상하지 않았다. 뽀얀 상아로 만든 상자는 이슬라르의 상징인 백합 문장이 전체적으로 아로새겨져 있었고 모서리마다 금테가 둘려 있었다.

릴리엔은 직감했다.

돈을 주고 살 법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혹시 오라버니께서 이샤렐의 문이라도 여셨나?”

혹시나 해서 던져 본 질문에 리타가 즉각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릴리엔은 말을 잃었다.

이샤렐은 이슬라르 가문이 아직 이슬라르가 아니었던 시절부터의 보물이 모여 있는 보물고였다.

소문에 따르면 이샤렐 3중문 안에는 마도 시대의 재보도 심심찮게 발견된다고 했다.

반출은커녕 행여 외인의 손에 에정보가 샐까, 이슬라르에서는 소장품의 목록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귀물들 중 곧 결혼하여 성이 바뀔 예정인 사람에게 하사할 만한 물건은 없는 걸로…… 아는데…'

릴리엔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그녀의 손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물건이었다.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제발 그냥 별거 아니어라. 개중에 가장 가치 없는 것이길. 그렇게 빌며 릴리엔은 상자의 금세공걸쇠를 옆으로 밀었다.

딸각 소리를 내며 스르륵 상자가 열렸다.

"어머?”

아주 예상외의 물건이 릴리엔을 맞이했다.

“담뱃대……?”

“약연(藥煙)의 도움을 받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처방했습니다.”

한쪽에서 릴리엔의 약병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있던 쇼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릴리엔은 생소한 말을 입에 굴려 보았다.

“약연?”

“그 담뱃대 이름입니다. 약초를 기화시켜 유효 성분을 흡입할 수 있는 물건이죠.”

쇼가 단조롭게 확인시켜 주었다.

“마도 시대 물건이 맞습니다.”

“......."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정식 하사품입니다. 가주님께서 이미 제반 서류를 다 통과시켜 두 시간 전부터 아가씨 앞으로 완전히 귀속된 물건입니다. 거절하시려거든 버리는 수밖에 없으실 겁니다.”

귀애받는 여동생이라지만 릴리 엔은 가문의 일원이었다. 가주하사품을 버리는 건 웬만한 무례가 아니었다.

자칫 가주의 위신마저 훼손할 수 있는 짓이었다.

“이런 짓을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고 해치우시다니 교활하시구나.”

릴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었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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