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 *
사흘 뒤, 릴리에 일행이 튜린의 주도에서 칸타쿤으로 출발하는날.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아침부터 먹구름이 모이더니 대기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세드릭은 걱정스럽게 바람에 날리는 릴리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릴리, 차라리 내일 출발하는 게 어떻겠느냐?”
“하지만 이렇게 준비를 많이 했는걸요.”
세드릭의 만류에 릴리엔은 난처하게 웃었다.
“하루를 미루면 여러 가지 면에서 차질이 생길 거예요.”
“음…….”
세드릭은 망설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날씨가 이럴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오늘 출발해야 시간 안에 다미언을 구할 수 있단걸 아는 릴리엔은 강경했다.
“주도를 벗어나기만 하면 마도 시대의 터널을 이용할 수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세드릭은 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는 예의 그 터널이 도움이 될 때마다 아주 꺼림칙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튜린 제후이자 황제와 대립하고 있는 그에게 마도 터널은 비유하자면 베개 옆에 꽂힌 잘 드는 칼이었다.
'별일 없을 건 안다. 알지만'
릴리에이 그 불온한 통로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제 와서 가지 말라고 붙잡을 수도 없고.’
처음으로 여행을 간다고 이리 들떠 있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세드릭은 릴리엔의 어깨에 걸쳐진 망토를 조금 더 여며 주기만 했다.
바람과 습기를 피하기 위해 고운 털을 안감으로 댄 숄은 세드릭이 이태 전 잡아온 사냥감으로 만들어 준 옷이었다.
이 옷을 입혀 놓으면 그렇게 뿌듯하고 든든하곤 했다. 꼭 그가 여동생을 지켜 주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세드릭의 내심을 짐작하듯 릴리엔이 차분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그래.”
세드릭은 릴리엔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는 일행의 호위대장 인던켈에게 한 번 더 명령했다.
“털끝 하나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
"존명.”
당부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기세가 무시무시하기까지 했다.
7테라나 되는 마력을 보유한 사람이 날서게 구는 통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릴리엔은 난감하게 웃었다.
세드릭 역시 여동생의 표정에서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 있나요' 하는 무언의 엷은 책망을 읽었으나 모른 척했다.
“보자. 옷이 무거워 네 발로 걷기 곤란하겠구나.”
그는 그저 모른 척 여동생을 안아 올릴 뿐이었다. 릴리에도 포기하고 “네에” 하고 오라버니 에게 안겨 마차에 올랐다.
출발이었다.
* * *
칸타쿤 제도와 튜린 지방을 잇는 마도 시대의 터널.
현재 인간의 힘으로는 철거조차 할 수 없는 이 길을 통하면 제국 최남단까지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릴리엔은 이번에도 거의 침실이나 다름없게 꾸며진 마차 안에서 약을 먹고 잠들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도착은 여러 모로 눈 깜짝할 새였다.
마차는 검문소를 가볍게 통과했다. 도중에 잠깐 멈추는 느낌에 릴리엔은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조금 더 주무시겠습니까, 아가씨?”
“아니.”
고개를 젓는 릴리에에게 리타가 준비한 약연을 내밀었다.
릴리엔은 익숙하게 긴 담뱃대의 하얀 끄트머리를 물었다. 그리고 깊은 숲 냄새가 나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뱉어 냈다.
담배와 달리 특수한 처리를 거친 약초의 연기는 향기로웠고 들이마셔도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처음에는 뜨거운 연기를 마시는 게 익숙지 않아 간혹 잔기침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럴 일은 없지만.
들이쉬고 내쉬고.
천천히 호흡을 반복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릴리엔은 리타에게 부탁해 나무 블라인드를 올렸다.
비가 쏟아지는 통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잘 정돈된 도시임을 알 수는 있었다.
'황제의 군인들이 치안을 지키는 도시.'
오히려 그렇기에 릴리엔은 안전했다.
칸타쿤 내에서 그녀가 살해당하면 황실은 연 수입의 1할을 담당하는 이 도시의 평판을 스스로 망치게 될 것이다.
아직 릴리엔은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죽여 버려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은.’
후우우우. 릴리엔은 흰 여우 털숄을 등받이 삼아 기대고 연기를 뿜어냈다.
통통.
그때 던켈의 손가락이 창문을 쳤다. 리타가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아주 조금만 창을 열었다.
“아가씨, 곧장 히스 별장으로 뫼시겠습니다.”
“아니요.”
뜻밖에 릴리엔은 거절했다.
“예……?”
던켈은 당황했다. 리타도 눈썹을 움찔했다.
두 사람이 눈빛을 공유했다.
기사 쪽이 먼저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리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녀 역시 들은 바는 없었다.
릴리엔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들러야 할 곳이 있어요. 테린 3가로 갑시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 *
폭우 속에서 마차는 테린 3가로 향했다.
테린 3가에서 조금만 더 가면 유명한 극장이 있다.
릴리엔은 만일을 대비해서 그 예약 명부에 미리 이름을 올려 두기까지 했다. 발각되면 극장에 가던 중이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침착하게, 침착하게 해내야 해.
릴리에이 마음을 가다듬은 순간 마차가 덜컹 멈췄다.
수런수런한 기색이 느껴져 릴리 엔은 리타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
“아가씨?”
“얼른.”
평소와 달리 단호한 명령에 리타는 더 캐묻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문을 덜컥 열고 말았다.
“아가씨!”
던켈이 외쳤다. 돌발 행동에 놀란 그의 목소리는 꼭 화난 것처럼 들렸다.
웬만한 아가씨였다면 깜짝 놀라 눈이 그렁그렁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릴리엔은 그렇지 않았다.
“물러서세요, 던켈 경.”
그저 조용히 명령할 뿐이었다.
기이한 위압감이었다. 가주의 품에 안겨 마차에 오른, 태어난 뒤로 본성 밖의 땅을 발로 밟아본 적이 없는 아가씨답지 않았다.
가주인 세드릭과 꼭 닮은 릴리 엔의 연청색 눈동자가 던켈을 지그시 주시했다.
안색은 파리했지만 눈은 가볍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경이 내 명령을 들어 줄거란 걸 압니다.'
던켈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은 우의를 입은 장대한 체구의 기사가 물러나자 그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훌쩍 키가 큰 남자였다. 꼴이 말이 아니기도 했다.
비에 젖은 쫄딱 젖은 금발이 얼굴에 줄줄 달라붙어 있었고 그사이로 알 수 없는 색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몸에 달라붙은 셔츠가 완전히 피로 젖어 있었다. 발은 맨발인데 손에 장갑은 끼고 있어 몰골이 더 엉망으로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검은 바짓단 밑으로 희게 드러난 발목과 맨발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릴리에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다.'
이 남자였다. 이 남자가 바로 다미언 루펜바인,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때 충성스러운 던켈의 손이 조심스럽게 칼자루로 이동했다.
이지를 잃은 상태에서도 다미언의 눈빛이 번뜩였다.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 미언의 어깨가 적의로 크게 부풀었다. 마치 앞발을 후려치기 전의 사자 같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외쳤다.
“안 됩니다, 전하!"
그 순간 놀랍게도 다미언이 우뚝 멈췄다.
긴장의 극점에서 시간이 멈춘것만 같았다.
누구 하나 숨소리를 내뱉지 못하는 가운데 다미언이 천천히 릴리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절박한 만류가 닿은 걸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달리 매달릴 곳이 없었다.
릴리엔은 거듭 말했다.
“저는 튜린의 릴리에 이슬라르, 당신의 편입니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가려 릴리엔의 차분한 말소리가 얼마나 전달됐을지 알 수 없었다. 다미언의 눈빛 역시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 같은 무형의 기운은 훨씬 엷어졌다는 거였다.
'통한…… 건가?'
그때 다미언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
풀썩, 바닥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놀란 던켈이 재빨리 그 팔을 붙잡은 덕에 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불상사는 면했다.
“아가씨, 아무래도 치안대에 신고를 해야…….”
“아니요, 던켈 경.”
릴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그분을 마차에 태우세요.”
“예?”
"어서.”
릴리엔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던켈은 움찔했다.
여자치고 높지 않은 음역대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세드릭과 흡사하게 들렸다.
실체 없는 위압감에 던켈은 압도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분이라니요. 수상한 부랑자입니다. 절대 아가씨와 동승케 할 수는…….”
“쉿.”
릴리엔이 약연의 연기가 새어 나오는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던켈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려던 다급한 말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부랑자가 아닙니다. 무려 이제국의 대공 전하가 되시는 분이 시니 말씀을 삼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