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예?”
이게?
무려 그 대공 전하의 팔 한 쪽을 아무렇게나 들고 있던 던켈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릴리엔은 그 틈을 타 엄정하게 그를 몰아 붙였다.
“얼른! 사정을 모르나 전하의 모습을 보니 촌각을 다투는 시급 한 일이 분명합니다.”
"아, 네!”
가주님의 품에 안겨 마차에 오른, 유약하디 유약한 아가씨답지 않은 호령이었다. 던켈은 긴박한 상황과 뜻밖의 박력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 정체불명의 남자를 마차에 태우고 말았다.
미리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릴리에의 맞은편 자리엔 보드라운 깔개가 넉넉히 깔려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혹 릴리 엔이 지칠 때 쉴 수 있도록 마차 안을 침상과 다름없이 꾸미라는 세드릭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을 닫아요. 대열을 정비하고 출발합시다.”
“조…… 존명.”
얼결에 던켈은 가주에게 하는 예로 대답하고 말았다. 문이 닫혔다.
"아가씨.”
리타가 조용히 릴리엔을 불렀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이건…."
당초 릴리엔은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리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꼭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 내게 해명을 요구하면 난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해 줄 거야. 들을래?”
영리한 리타는 즉각 질문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거짓말을 듣고 안심하겠느냐, 묻지 않고 나를 따라오겠느냐.'
좀 더 범위를 확장하자면 리타가 온전히 릴리엔의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규정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질문에 대한 리타의 대답은
“……듣지 않겠습니다.”
“좋아.”
기절한 남자를 마차에 태우고 있는 판국인지라 충성 맹세를 기념할 겨를은 없었다. 다행히 리타도 릴리에도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체온이 떨어지진 않으셨을까?"
“몸을 닦을 만한 걸 찾아보겠습니다."
리타가 담요 더미를 뒤적이는 동안 릴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다 미언의 뺨에 손을 대고 말았다.
체온을 재 보려는 심산에서였다.
“!”
무의식중에 따뜻한 것이 닿아서인지 다미언이 써늘한 뺨을 릴리 엔의 손에 기댔다. 정신이 든 건 아닌 것 같았다.
“아가씨?”
의아한 리타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릴리엔은 쉬이 다미언을 떨쳐 내지 못했다. 손바닥에 포옥 안긴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묘 묘하게 애교스럽게 느껴져서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길에서 만난 고양이가 과하게 친근하게 굴어 자리를 뜰 수 없을 때의 심경과 비슷했다.
“많이 추우신가 봐.”
상대가 기절해 있는 것만 아니었어도 개수작이라고 일언지하에 잘랐겠지만……. 리타는 일단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제가 몸을 닦아 드릴 테니 물러나시죠.”
"응."
그때 갑자기 쓰러져 있던 남자가 가늘게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앗.”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아가…….”
쉿. 릴리엔은 눈빛으로 리타를 조용히 하게 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물었다.
“대공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당, 신은 …….”
“안심하십시오. 저는 튜린의 릴리엔 이슬라르입니다.”
다미언은 설명을 이해하려 애쓰는 듯 했지만 가늘게 뜬 눈동자는 여전히 혼탁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나.'
황실이 다미언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한 고대 무구는 육신이 아니라 정신을 공격하는 종류였다.
이때 받은 데미지 때문에 영혼의 방어막에 금이 가 버린 다미언은 시간이 흘러 릴리엔의 자살을 핑계로 완전히 미쳐 버리게 된다.
"각하, 지금은…….”
그때 갑자기 덜컹하더니 마차가 멈추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와 무언가 말씨름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어렴풋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이런.’
검문 혹은 추적에 걸린 모양이었다.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지만 릴리 엔은 나름 이 상황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상황을 설명할 시간은 없을 듯했다.
"각하, 초면에 참으로 망극하고 민망합니다만 혹시 목숨을 위해 어디까지 감수하실 수 있으실까요?”
“... ...?"
릴리에의 시선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마치 주름진 케이 크 포장지를 겹쳐 쌓은 것 같은 풍성한 치마가 마차 바닥을 한가득 덮고 있었다.
다미언의 시선이 가늘어졌지만 릴리엔의 말을 정말 알아들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바깥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그럼,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일단 동의하신 걸로 이해하고 진행하겠습니다.”
* * *
잠시 후, 던켈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차창을 쳤다.
"아가씨, 치안군입니다. 검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새 비가 가늘어졌고 던켈의 굳은 표정 뒤로 치안군들이 서 있었다. 다섯 명이었다.
릴리엔은 그들 모두를 다 볼 수 있었지만 차창의 커튼 덕에 바깥에서 보기에 릴리에의 얼굴은 딱 코 밑까지만 보였다.
대답하기 전에 릴리엔은 입술로 들이마셨던 약연의 연기를 천천히 뿜어냈다. 그리고 가느다란 빗줄기 속으로 흰 연기가 녹아사라질 때쯤에서야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혹시 내 마차에 튜린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가?”
손바닥을 뒤집은 듯 오만한 말투에 튜린의 기사들은 조금 놀랐다.
“통상적인 검문 절차입니다.”
치안군의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미혼 여성임.
에도 기사를 통해 말을 전하지 않는 무례함에 던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릴리엔은 손을 들어 그의 분노를 막았다.
기사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칸타쿤 제도입니다. 저희는 황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차를 열어 주십시오."
“그렇군.”
릴리엔은 일단 온화하게 말을 받았다.
“황제 폐하께서 검문소에서도 열어보지 않은 튜린의 마차 안쪽을 수색하라고, 굳이 지금 이 시간에 명하셨군. 몹시 흥미롭구려.”
치안군 기사가 눈썹을 움찔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이니 기사를 통하지 않고 곧장 윽박지르면 금방 기가 죽으리라 여겼건만.
“허면 위임장이라도 가지고 오셨소, 기사분?”
말투나 행동거지만 본다면 30년 정도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군림한 귀부인 같았다.
'하는 수 없겠군.'
기세에서 밀린 기사가 우의 안쪽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금으로 독수리의 날개를 새긴 배지를 보여 주었다.
던켈이 알아보았다.
“수도 방위 기사단…….”
황제 폐하의 주도를 수호하는 이 기사단에게는 무소불위한 권한이 있었다.
상징을 도로 집어넣으며 기사가 재차 촉구했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아가씨.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열겠습니다.”
최소한의 선택권은 주겠다는 시혜적인 태도였다. 릴리엔은 그 오만함을 지적하는 대신 “문을 열어 주라”고 명령했다.
던켈 경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기사를 주시하면서도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 안에 있을 대공의 존재가 불안하지만…….
'어쨌거나 릴리에 아가씨께서 열어 주라 하셨으니 분명 생각이 있으실 거야.'
충직한 기사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릴리엔을 신뢰하게 되었다.
황제의 기사는 던켈의 적대감을 무시하고 무표정으로 열리는 마차 문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안에는 이미 치맛자락을 넓게 펼친 릴리에과 시중을 드는 리타만이 그림체 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볼 테면 보라는 듯, 릴리엔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담뱃대를 입술에 머금었다가 숨을 내뱉었다.
후우.
안개비 내리는 숲에서 장작을 태우는 것 같은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담백하고 청렴한 학자 같은 얼굴로 하는 짓이 묘하게 퇴폐적이라고 기사는 생각했다.
‘침상을 방불케 하는 마차 내부에 힘없이 기댄 채, 손가락으로는 꼭 저만큼 하얗고 가느다란 담뱃대를 받쳐 든 모습이 꼭......'
막 일어난 여자의 침실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문득 떠오른 파렴치한 생각에 기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조금 전의 무례한 태도는 까맣게 잊은 듯 크흠 하고 헛기침을 점잖게 하며 목례했다.
“이 주변에 부랑자가 돌아다니니고 있다는 신고를 받은지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불철주야로 노고가 많으니 이해하오. 다만 좀 춥군…….”
릴리엔은 부러 하얗게 드러낸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기사의 얼굴이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아, 아무튼 실례가 많았습니다, 레이디 릴리에. 그럼."
쾅! 문이 닫혔다. 곧이어 잠시 후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호오.”
릴리엔이 감탄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물러갈 줄이야. 생각보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구나.”
"아가씨…… 아니, 아닙니다.”
리타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아가씨는 미인계를 썼으면서 쓴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맹하신 건지 노련하신 건지.'
당최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검문을 무사히 넘겼으니 치마폭에 남자를 숨긴 민망한 꼴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리타의 도움으로 구름 같은 치맛자락을 거두자 대공의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그새 다시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성공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릴리엔은 그제야 다미언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형편없는 꼴로도 대단히 아름다운 남자였다. 갸름하고 날씬한 뺨에 쌍꺼풀이 켜켜 이 얇게 앉은 눈꺼풀, 조각상처럼 흰 얼굴 위로 반짝이는 백금발이 흩어져 있었다.
키가 크고 잘 단련된 체격에도 불구하고 곱상한 얼굴에 가련한 구석이 있어 미남보다는 미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보통 미인도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주변이 다 환해지는 것 같은 대단한 미인이었다.
‘경국지색…… 이라고 하나, 이런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역사서에 서까지 미인으로 회자될 수 있을 그런 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