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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32화 (32/155)

32화.

바로 그때.

“……너무 쳐다보시는군요.”

까끌까끌하게 긁혀 나오는 목소리.

어느새 가느다랗게 뜬 눈에 이 지가 돌아와 있었다.

“정신이 드셨군요.”

“예, 덕분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부드러웠다.

다미언은 마치 제 집 안방처럼 차분하게 일어나 앉았다. 릴리엔은 생각했다.

'눈동자는 보라색이네.’

파란색, 붉은색, 자주색 등의 색 유리를 겹쳐 놓은 듯 다채롭게 빛나는 보랏빛이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 기가 막힐정도로 남자의 미모에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시니 저 같은 사람도 좀 부끄럽군요.”

아차.

정신이 팔려 있던 릴리엔은 실수를 깨닫고 정직하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눈빛이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어요.”

잠시 동그랗게 놀랐던 다미언의 눈빛이 천천히 샐쭉해졌다. 원체 눈매가 가늘고 긴 사람이 저러니까 꼭…….

'…여우?'

곱상하면서도 요사스러운 데가 있는 게…… 마치 북극에 사는 눈 여우가 사람이 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진심이십니까?”

마땅한 비유를 떠올리느라 다시금 생각에 잠겨 있는 릴리엔을 향해 다미언이 물었다.

"…네?”

“제 눈빛이 아름답다고 하셨잖습니까.”

“아, 네. 물론 진심입니다.”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릴리에이 깨끗하게 확언했는데도 어쩐지 다미언은 시원스럽게 만족한 기색은 아니었다.

"흠, 사심은 전혀 없고 그저 순수하게 감탄만 했다. 이건가"

“예?”

다시금 빗줄기가 거세게 지면을 두드리기 시작한 탓에 릴리엔은다미언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덜컹.

"!"

마차가 또 한 번 멈췄다. 이번에는 그뿐만이 아니라…….

쾅쾅, 쾅쾅!

누군가 마차 문을 부서져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던켈이 버럭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명에 따라 검문소장인 나 윌하르는 누구의 마차라도 수색할 수 있다.”

그에 대답하는 차가운 목소리는 마차 문 바로 앞에서 들렸다.

던켈이 지지 않고 외쳤다.

"황제의 좌장이라면 무슨 목적인지도 고하지 않고 튜린의 딸을 겁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막히군!”

“겁박이라니 말이 심하시구려.

튜린 선제후의 마차가 치외 법권 지역이라도 된다고 주장할 셈이 신가?”

릴리엔마저도 이 상황 앞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긴장하셨군요.”

"!”

저도 모르게 숨소리마저 죽인 릴리엔과는 달리 다미언은 여유로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제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가장 강하거든요.”

아니……. 소곤소곤 비밀이라도 가르쳐 주는 듯한 어투에 릴리에은 황당해졌다.

그녀도 다미언의 강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가 만전 상태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고대 병기에 당한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눈을 잃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텐데…….’

눈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쌩쌩한 건 좀 이상했다.

그러는 중에도 바깥의 싸움은 극에 치닫고 있었다. 먼저 폭발한 건 던켈이었다.

“개만도 못한 패륜아를 황제랍시고 모시는 주제에!”

“뭣!”

마침내 검문소장도 버럭 화를 냈다.

“입조심을 해라, 튜린의 개! 나는 황제 폐하를 위해 이 집 아가씨의 치마 속도 뒤질 수 있……커억!”

모욕은 완성되지 못했다.

다미언이 갑자기 마차 문을 열어버린 탓에 릴리엔을 저속하게 모욕하던 검문소장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코와 입이 엉망진창으로 으깨진 채였다.

“듣자 듣자하니 내가 다 민망하군.”

“습컥!”

다미언이 태연히 마차에서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소장을 곱게 짓밟으면서.

소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다미언은 괴로워하는 남자의 몸이 무슨 평지라도 되는 것처럼 최초로 발을 디딘 배부터 엉망이 된 머리까지 세 걸음이나 짓밟고서야 땅으로 내려왔다.

우아하고 가혹했다.

“커, 커흑……. 이, 이, 이게 무, 무슨.”

“내 형님이 사냥개를 잘못 길러

"귀한 사람의 면전에서 짖어 대는 몹쓸 버릇이 들었으니 나라도 나서야지 않겠나.”

“루펜바인 대공………! 대체 어떻게……!”

“그게 궁금할 때가 아닐 텐데.”

"커헉……!”

다미언이 인정사정없이 소장의 목 줄기를 짓밟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내 검을 다오.”

누구에게 명령하는 걸까? 섬뜩해진 던켈이 주위를 둘러보니…….

“헉!”

어느새 검은 우의를 걸친 괴한들이 일사불란하게 마차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공 앞에 조심스럽게 부복하고 칼 한 자루를 받쳐 올렸다.

순은으로 만든 것처럼 칼자루까지 하얗게 빛나는 검엔 어울리지 않게 낡은 매듭 장식 하나가 단출하게 매달려 있었다.

대공이 검을 뽑았다. 바로 다음 순간 날카로운 칼끝이 단숨에 소장의 목 줄기를 꿰뚫었다.

“......!"

소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칼을 뽑자 피가 솟구쳤지만 그마저도 곧 쏟아 붓는 빗줄기의 기세에 쓸려 내려갈 뿐이었다.

대공은 수하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다시금 칼을 돌려주었다.

“격조했군.”

“그렇습니다.”

부하들이 시체를 수습하고 황제의 잔당들을 포박해 놓는 동안 다미언은 뒤를 돌아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

곧이어 그가 한 발짝 릴리엔을 향해 다가갔다. 위협적인 느낌에 던켈이 일단 물러서시라고 경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대공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올렸다.

'아.’

경황 중에 릴리에이 떨어트린 줄도 몰랐던 담뱃대였다.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그 말대로 정말 놀랐다.

하지만 놀란 것과는 별개로 다 미언을 비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전 그들이 겪은 상황은 죽이지 않으려면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동요를 드러내기에 적절한 순간이 아니었다.

'감정보다는 해야 할 일을 우선 해야 할 때야.’

다행히 7년 동안 대비한 것이 헛되지 않았는지 릴리엔은 시간에 맞춰 다미언을 구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대공 전하의 상태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괜찮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냐.'

오히려 그 점은 행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게다가 계획에 없게 황제의 가신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지금은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대공 전하,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될 수 있는 대로 서둘러 칸타쿤을 벗어나 튜린 성으로 향하는 게 좋겠다는 릴리엔의 제안에 다 미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저를 당신의 마차에 태워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안의 요점은 그게 아니었지만 릴리엔은 일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신기한 눈초리로 빤히 릴리엔을 바라보던 다미언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안이 타당하십니다. 선의에 기대도록 하지요.”

* * *

잠시 후.

다미언은 릴리엔의 마차에 올랐다. 부하에게서 재킷과 신발을 받아 최소한의 옷차림은 갖춘 모습이었다.

릴리엔은 살짝 눈치를 살폈다.

'흔쾌히 동승하신 걸 보니 나를 의심하진 않으시는 것 같아.'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릴리 엔은 요양 차 왔다가 우연히 그를 발견했다는 설명에 이 남자가 얼마나 납득할는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 릴리엔을 바라보며 다미언은 생각했다.

'긴장했군.'

위급한 상황이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까무러치지 않은 걸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릴리에의 불안과 달리 다미언은 그녀를 크게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경황 중에 인사를 잊을 뻔했습니다. 호의에 대단히 감사를 표합니다.”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가 과하세요."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고요?"

다미언이 재미있다는 투로 후후 웃었다. 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그는 상당히 곤란을 겪어야 했을 거다.

어쩌면 어디 한 군데가 크게 잘못되거나 혹은…….

'죽었거나.'

다미언은 이 세상에 유일한 선천적인 마력 과잉증 환자이기도 했다.

마력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반응하는 힘이다. 가령, 마력을 가진 사람이 ‘잠을 자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 보자.

충실한 마력은 소유주의 의지에 감응해서 내분비계에 작용해 불면을 돕는다.

이론상으론 매우 강한 마력만 있다면 아예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은 몸으로 체질 자체가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마력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검술을 익혔다. 마력이 단련을 통한 신체 강화를 비약적으로 도와, 인간 외적인 성취를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력을 자주 사용할수록 힘은 정순해지고 양이 늘어난다.

마력량이 늘어나면 신체 변화에도 가속이 붙는다.

다미언의 경우 마력이 미처 육체가 적응하기도 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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