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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33화 (33/155)

33화.

어린 시절 다미언은 넘치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 종종 사고를 일으켰다.

보통의 아이는 원하는 장난감이 손에 닿지 않으면 운다. 그러나 다미언의 마력은 다미언의 팔을 '변형' 시켜 장난감에 손이 닿도록 도왔다.

이제 막 이가 돋아날 나이의 어린 아기가 괴상한 모양으로 변형된 팔을 어쩌지 못해 울고 있으면, 울음소리에 달려온 유모가 까무러치곤 하는 식이었다.

소문을 막기 위해 수많은 목숨이 죽어 나가야 했다. 다미언은 황궁의 그늘에서 괴물로 자랐다.

한두 해가 지나 자기 절제력이 생기면서 사고의 발생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정신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자제력을 잃으면 종종 비슷한 사고가 생기곤 했다.

고대의 위대한 마법은 오래전에 족적을 감췄다.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건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들뿐이었다.

다미언의 증상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도움이 되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칼에 매달려있던 매듭. 그 매듭을 쥐고 있으면 날뛰는 마력이 조금이나마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그 순간은 다미언이 고통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순간 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황제가 사용한 고대 병기, 대상의 정신으로 침투하는 “자그레브”의 공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까딱해서 자제력을 잃었다가는 그의 몸에서 풀려난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이 칸타쿤 전체를 지도상에서 깨끗하게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다미언의 경험상 그런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는 데는 육체적인 고통만한 게 없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해를 한다. 그에겐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제법 컸으니……. 다미언은 심드렁하게 계산해 보았다.

아마 눈이라도 하나 뽑았어야 제어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다미언은 가만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그를 괴롭히던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물로 씻은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까.'

비몽사몽간에 릴리엔의 손을 붙잡았던 그 직후부터였다.

고통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마도 병기 자그레브에 정신이 유린 당한 틈을 타 날뛰던 마력의 파동 역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이렇게 확실하게 제어력을 확보해 본 적이 있었던가? 장담컨대 없었다.

'그러니 아마 그 매듭의 출처도 분명…….’

그때였다.

"전하, 어디가 미령하십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릴리엔이 일깨웠다.

다미언은 잠시 릴리에의 깨끗하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다채로운 빛은 없었으나 새파랗고 깊었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그리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네.”

다미언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근사근하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레이디 릴리엔께서 허락하신다.

면 저도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침착하게 대답하면서도 릴리엔은 불안했다.

'전하께서 사로잡혀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솔직히 말하라고 하실까?'

그러나 다미언의 제안은 릴리엔의 불길한 상상을 한참 벗어났다.

“조금 이른 논의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당신께 보답할 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저를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보답을 해야지요.”

“보답…… 말씀이신가요.”

일순 릴리엔은 난감했다. '우연한 일이었을 뿐이니 너무 사례하실 필요 없다.'고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공교롭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당장 생각나는 게 있었다.

말해도 될까?'

저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고 자신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니 보답을 받아도 이상할 건 없을터.

'한데 왜 이리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지?'

꼭 물뱀이 간교하게 쳐 둔 덫을 밟고 말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그 느낌이 생존 본능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인 줄도 모르고 릴리 엔은 망설였다. 그 망설이는 기색을 놓칠 다미언이 아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샐쭉 가늘어졌다.

“제게 보답할 기회를…… 주실 수 있는 거군요?”

듣는 것만으로도 낯이 간지러워질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망설이던 릴리엔은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미언은 피어오르려는 미소를 억누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다면 혹시…….”

곧이어 망설이던 릴리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미언으로서는 조금 예상 밖의 말이었다.

"…혹시, 이 마도 터널을 파괴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 *

릴리엔의 기억 속에서 이슬라르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의심받았다.

황실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칸타쿤 제도와 이어진 마도 터널은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마도의 유산이었다.

자연히 튜린과 이슬라르는 황실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때로 억울하게도 황실과 내통하고 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릴리엔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없는 것이 낫다.'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세드릭을 비롯한 튜린 사람 모두가 이 터널의 존재를 끔찍하게 여겼다.

'게다가 만의 하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말하는 게 정답일 거야.'

마도 터널을 부숴 달라는 요청은, 만약 릴리에이 황실과 내통하고 있다면 절대 할 리가 없는 부탁이었다.

“이 마도 터널을?”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리는 다미언에게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공 전하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튜린과 이슬라르는 지금의 황실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통로는 언제고 저희의 목줄을 위협하는 칼이 되고 말겁니다.”

담담히 고하는 그녀의 얼굴에 더 이상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고민해 온 내용인 것 같다고 다미언은 짐작했다.

그리고 릴리엔의 예상대로 일말의 의심조차 사라진 것은 물론이었다.

'의도한 것일까?'

돌아가신 조부인 헤멘린나 대제후는 그를 만날 때마다 이 아가씨에 대한 극찬을 빼놓지 않았다.

"네놈 같은 인간 백정이 무슨 천복을 타고나서 그 아이를 잡았을꼬.”

고백하자면 다미언은 지금까지 조부가 그토록 칭찬하는 피앙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결혼이나 아내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아깝게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미언은 릴리엔의 푸른색 눈동자를 조금 무례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튜린 선제후께서는 어찌하여 그 일을 직접 행치 않으시고요?”

세드릭은 7테라를 보유한 티어 하이였다. 그는 계측기가 표기할 수 있는 최고치의 마력을 보유하 고 있었다.

인세는 그를 가리켜 천재라 일컬었다. 경외를 바쳤다.

그러나 정작 여동생인 릴리엔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천재란 말이 어디 전능을 뜻하던가.

“제 오라버니께서는 마도 터널을 파괴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전형(典型)의 기사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을 저는 할 수 있을까요?”

다미언이 보석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지만 릴리엔은 현혹되지 않았다.

“모릅니다.”

"......"

“그저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게 그밖에 달리 없을 뿐입니다.”

릴리엔은 엷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전하께서 하실 수 있거든 들어 주시고 아니시라면 거절하시면 됩니다.”

하실 수 있거든.

릴리엔의 말은 담백했다. 다미언처럼 누군가를 시험하려는 기색 따윈 없었다.

그 진심에 다미언은 호승심으로 서서히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불이 붙는다.

그가 릴리엔을 모르듯이 릴리에도 그를 몰랐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어떤 괴물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의 바람을 이루어 주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자기가 부탁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릴리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똑똑히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 준다면 기뻐할까?

저 깨끗하고 담백한 얼굴을 붉히고 그에게 감사할까?

'후우우…….’

너무 피가 끓는 나머지 자칫 잘못하면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질 것 같았다.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바람에 다미언도 약간 당황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 흉험하게 들끓기 시작한 속내를 릴리에이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말간 얼굴로 재차 물을 뿐이었다.

“하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고말고.

다미언은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것을 감추려 부러 아름답게 미소를 머금었다.

“노력해 봐야겠죠? 은인의 부탁이시니.”

마도 시대의 마력 측정기는 제국에 세 대 밖에 없는 보물이었다. 그중 두 대가 황실의 소유였으나 이제는 한 대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선천성마력 과잉증을 타고난 다미언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측정기 한 대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전후를 아는 사람들은 비공식적으로 다미언을 이렇게 불렀다.

티어 인피니티(Tier Infinity).

인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천재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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