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34화 (34/155)

이토록 쇠락하여 연약해진 세상에서 그는 차라리 괴물이자 재앙 34화.

* * *

티어 인피니티.

오래전 그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늦둥이 막내 황자이던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비공식적인 칭호였다.

조금 더 비공식적으로는……

“저, 저…… 괴물!”

……이 되시겠다.

아마 어린 시절에는 이름보다 더 많이 들어 본 말이 아니었을까. 어둠 속에 잠긴 채 다미언은 대수롭지 않게 회상했다.

현재 그는 튜린과 칸타쿤을 직통으로 이어 놓은 마도 터널 안에 홀로 서 있었다.

적막하고 어두워서 마치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다미언은 늦둥이였다. 태어났을 당시 위로 이미 장성한 형들이 있었다. 황태자가 국혼까지 치른 마당에 태어난 남동생은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생후 이레 만에 마력 측정기를 박살내기까지 했다.

"계측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 관련자들이 벌벌 떨며 보고했다.

정적 속에서 태황은 아무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눈으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황제의 인장 반지를 낀 주름진 손으로 그 뺨을 만져 보았다.

살아 있었다.

아직은 무구하겠으나 무슨 씨앗인지는 모른다.

평생을 바친 제국, 그의 이름이 금빛으로 남을 나라에 '이것'이 어떤 평지풍파를 몰고 올지 아무도 모른다.

'죽여 없애는 게 가장 간단할 수도 있겠으나…….'

그 순간 황제의 발목을 붙잡은 건 부정보다는 일말의 인간성이었다.

‘태어난 지 이제 막 이레가 된 아기가 아닌가.'

살인이 내키질 않는 상대였다.

태황은 둘째 아들인 클로드를 생각했다. 혹여 큰아들이 비명에 횡사할까 여분으로 기른 둘째 아들은 제 분수를 잘 아는 편이었다.

어쩌면 이 아기에게도 숨죽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기회를 주는 게 타당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태황은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네 형의 검이 된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미언이 전쟁터로 뛰어든 건 그 말을 따라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내아이가 흔하게 가질 법한 공명심이나 자기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살과 피가 식어 가는 전쟁터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괴물이 되어도 괜찮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다미언은 그저 있어도 괜찮은 곳에 존재하고 싶었다. 전쟁터는 다미언의 비인간성이 용납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잠시나마 자제력을 내려놓고 본디 태어난 천형대로 미칠 수 있는 곳에서 다미언은 되는 대로 시간을 보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제도의 사람들이 어느새 다미언을 개선장군이자 제국의 영웅으로 추대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 모조리 미쳤는가 했다.

그가 자행한 학살의 실상 대신 '대승' 이라고만 적혀 있는 호외를 보았다.

그때 다미언은 세상이 마치 그 얄팍한 종이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연약하고 손쉬운 세상이신지.

그 종잇장 위에서 황제랍시고 군림하는 부황도 같잖아 보였다.

차가운 눈으로 그의 생사를 재며 내려다본대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늘그막 어느 날, 부황이 그를 불러 이렇게 물었던 적도 있었다.

"황제가 될 속셈이냐.”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뭐, 그래 볼까요. 마침 심심하기도 한데.”

획, 눈썹을 올리는 부황을 보며 아름다운 소년은 천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잦아드는 웃음 끝에 눈웃음을 치며 관대한 척 덧붙였다.

“놀라지 마세요. 어쩌면 안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귀찮아서.”

"이게 무슨 되먹지 못한 말장난 질이냐!”

“어차피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다미언은 태연자약했었다.

“그러니 차라리 둘 중에 마음에 드는 쪽을 골라 믿으시죠."

그 뒤로 부황은 죽을 때까지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부자지간의 재회는 장례식에서 이루어졌다. 다미언은 부황의 시체 앞에 계승 서열을 따라 네 번째로 마지막 인사를 고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아버지…….”

큰형과 조카와 작은형이 망자의 평안을 빌고 간 자리에서 다미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고했다.

"……저는 그저 이 모든 게 다 처자 빠져 뒤져 버리길 바라고 있답니다.”

이 연약한 마분지 세상을 부수고 종이 인형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 대답은 그렇습니다.

열의 없는 목소리로 소년은 부황의 관 위에 독약 같은 말들을 흘려 놓았다. 그렇게 훌쩍 떠나려던 다미언을 붙잡은 게 바로 큰형, 이도엘이었다.

"다미언, 가느냐?”

"형.”

과연 같은 핏줄이 맞는가 싶게 사람이 좋은 선황은 괴물인 막냇동생마저 용납하는 사람이었다.

다미언으로서도 악감정을 가지는 게 쉽지 않았다.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는 막 내를 향해 선황이 흐릿하게 웃으며 치하했다.

"네 수고가 많구나.”

“그걸 수고라고 부르면 곤란한데.”

그가 부황에게 안녕을 고하는 소리를 들은 주제에. 좋게 생각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러나 이도엘은 “아니”하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게 어떤 뜻이 있었건 이 제국은 분명히 네게 은혜를 입었다."

다미언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집 센 이도엘은 그에게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라는 거 창한 칭호를 내려 주었다. 영구한 면책 특권이 함께 주어지는 전무후무한 영예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형도 죽었다.

터널의 어둠 속에 잠겨 다미언은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렸을 적 마력이 폭주할 때마다 손이 가장 먼저 변형되곤 했다.

변형된 팔에서는 보통 끔찍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는 다미언을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시커먼 철갑을 입은 듯 날카롭고 거대하고 뒤틀린 손과 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혐오감과 두려움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견디다 못해 차라리 팔을 잘라 달라고 애원한 적도 있었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다미언이 직접 자해를 하면 부황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혀를 차며 투견에게나 채울 법한 구속구를 채워 두라 명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도엘은 그를 괴물 취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록 황명으로 채워진 구속구를 벗겨 주지는 못했으나 짐승보다 못한 꼴을 한 동생을 위로하려고 다정한 청년은 최선을 다했다.

"어제는 내가 옛 문헌을 살펴보았다. 다미언.”

"......"

“뭐라 쓰여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응?”

이도엘은 부러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다미언은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발 좀, 형.

“그 입 좀 닥쳐 줘.”

이도엘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흐려졌다. 다미언은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다. 큰형은 이 세상에서 그를 위해 주는 혹은 위해 주는 척이라도 하는 단 한 사람이다.

'길들여진 개처럼 굴었어야지…….’

온순하게 굴어야 버림받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이도엘은 그를 이렇게 가둔 아버지의 총아였다.

이 사람을 상처 주면 그 뒤에 있는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복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더 깊은 내심도 있었다.

‘길들여졌다가 버려지면 어떡해?’

견딜 수 없을 거다. 어린 다미언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도엘은 다미언이 세운 가시를 이해했다. 그건 이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아마 이도엘이 포기하고 물러나면 다 미언은 더 편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고집이 센 어른이었다. 동생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너 같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마력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불균형한 체질을 보완할 수 있을 거란 말을 보았단다. 다미언.”

다미언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이도엘은 천천히 타일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몰라. 하지만 다미언, 약속하마.

내가 찾아 주마. 너는 그저 조금만 견디면 돼.”

죽지 말고 미치지도 말고.

이도엘의 당부에도 다미언은 희망을 갖지 않았다.

굳이 스스로를 고문할 필요는 없다.

그는 오히려 기적을 꿈꾸지 않는 버릇을 들였다.

그래서일까?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사라진 지금도 그 오랜 버릇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게 꿈은 아닐까.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는데.

터널의 어둠 속을 나가면 변하지 않은 현실이 그를 맞이할 것 같았다.

처음 태어날 때 괴물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하지만 이게 만약 현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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