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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35화 (35/155)

35화.

다미언은 릴리엔을 떠올렸다.

유순하게 처진 눈을 비롯한 이 목구비가 반듯하고 단정했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흰 얼굴, 푸른 눈동자가 깨끗하고 맑았다.

한눈에 시선을 빼앗길 만한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홀리는 지독한 아름다움은 다미언에게 있었다.

다만 릴리엔에게는…….

“모릅니다.”

그 지독하게 아름다운 남자에게 현혹되지 않는 결기가 있었다.

“하지만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도 그밖에 달리 없습니다.”

도리어 다미언의 중심에 불을 붙이는 그런 결기가 있었다.

그때 다미언은 깨달았다. 이 여자는 시험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험당하는 쪽은 그였다.

릴리엔은 자기가 다미언에게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게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은근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실 수 있거든 들어 주시라.

니. 수작질이었어도 그만하면 수준급이라고 칭찬해 줄 마당에, 릴리엔은 그저 진심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뱃속이 이상하게 들끓어 다미언은 달콤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들어주고 싶다. 놀라게 해 주고 싶다.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다. 칭찬해 달라고 조르고 싶다.

잠깐 미친 생각마저 들 정도로 다미언은 안달이 나 있었고 이런 스스로의 모습에 조금 기가 막혔다.

친애하는 이도엘은 동생이 이렇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형, 내가 이상해.”

그토록 형이 내게 미치지 말라고 말했는데 난 지금 반쯤 미친것 같아…….

심장이 비틀리는 것 같으면서 발끝부터 뱃속까지 온몸이 찡하게 간지럽기도 했다. 이상하고 아름답고 복잡하면서 어지러웠다.

성난 감정의 파고를 일단 덮어 두 다미언은 드러난 맨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가 아까보다 조금 더 명료하게 빛났다.

'일단은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일을 하자.’

다행히 릴리에의 부탁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파괴를 자행하는 것은 뭐, 사실 그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었다.

세간에 마도 시대의 유물은 어지간해서는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들 했지만, 글쎄.

여기 다미언 루펜바인은 기실 나면서부터 이미 그 유물이란 놈을 작살낸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 * *

그로부터 한 시간쯤 전.

충성스러운 던켈 경은 마차보다 앞서 말을 달려 먼저 튜린 본성에 도착했다.

혹여나 그렇게 막 나갈 리는 없겠지만 황실에서 군대를 일으켜 뒤따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뒤따르는 마차 호위에는 다미언 루펜바인의 군사가 합류했다. 덕분에 릴리에 아가씨는 안전하다.

하지만 그걸 판단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가주님께 이 소식을 전해서 가주께서 판단하시도록!’

황실과 대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튜린의 군인들은 이 마도 터널의 위험성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었다.

던켈 역시 자다가도 이 터널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튜린의 심장을 찌른 칼 혹은 골수까지 침입한 독이었다.

'최대한 빨리!’

던켈은 이를 뿌득 악물고 필사적으로 말을 채찍질했다. 덕분에 세드릭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집무실까지 그대로 짓쳐들어온 충성스러운 기사의 보고를 듣자마자 이슬라르의 가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벽력같이 외쳐 불렀다.

“알렌!”

“예, 주군.”

“내 검을 다오.”

세드릭의 마력이 마치 무형의 검처럼 허공에 날을 세웠다. 섬뜩한 감각에 사람들이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의 상황은 이미 세드릭의 안중에 없었다. 그는 검을 받자마자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알렌이 대신 던켈에게 명령했다.

“뒤따라라, 빨리!”

"예!"

던켈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으나 던켈은 충성스럽게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드릭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 성을 빠져나가는 동안 알렌은 뒤에서 기사들을 소집해서 병력을 꾸렸다.

세드릭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으나 그가 최소한의 무장을 갖추고 본성을 빠져 나와 외성의 뜰에서 말에 올랐을 때는 이미 가용할 수 있는 규모의 전력이 항오를 갖추고 가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대 가주 부부가 비명횡사한 시점부터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튜린 성은 내내 준전시 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모두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대응이 이례적으로 빠를 수밖에 없었다.

히히힝!

높이 우는 말고삐를 거세게 당기며 세드릭이 명령했다.

“출발한다.”

"존명!"

살기등등한 기사들을 이끌고 세드릭은 선두에서 달렸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릴리엔.’

그의 여동생.

그의 손으로 보냈다.

불안정한 시국인 줄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알면서도.

감히, 릴리엔이라면 위험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안심했었다.

'그 애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비루먹은 들개만도 못한 클로드 루펜바인, 그 미친 작자에게 인의예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찢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먼저는 이슬라르의 가주, 내 아버지를 쳐 죽였고…… 헤멘린나 대제후가 죽었으니까!’

당분간은 그걸로 만족하고 얌전하리라고 생각했지, 멍청하게도!

세드릭은 심하게 자책했다. 그는 릴리에의 중요성을 간과한 스스로를 벌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랬다가는 릴리엔을 구하러 갈수 없기에 간신히 참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황제가 다미언을 칸타쿤에 감금하고, 탈출한 다미언을 릴리에이 우연히 발견한 게 세드릭의 탓은 아니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미묘한 입장에 있는 황제가 무리해서 튜린에 쳐들어오려 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역린을 위협당한 세드릭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냉철함은 남아 있지 않았다.

흉흉한 기세를 감추지 않고 세드릭은 계속해서 달렸다. 그와 병력은 순식간에 튜린 외성으로부터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터널앞에 도착했다. 시간은 평소의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터널은 튜린 외성을 둘러싼 산을 얼마쯤 깎아 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복잡한 마법적 상징을 돋을새김한 자리에 이끼가 돋아 있었으나 그 안에 자리 잡은 마도의 힘은 전혀 쇠락하지 않은 채였다.

그로부터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그것이 있었다.

'릴리에의 마차!’

세드릭이 오는 걸 알아차린 기사가 미리 알렸는지 릴리엔은 막 문을 열고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살아 있다.'

자책과 분노와 증오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안도감에 한순간에 휩쓸려 사라졌다.

세드릭은 달리는 말, 애마 히아신스의 목을 조르다시피 해서 급히 세웠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오라버니!”

곡예에 가까운 말의 제동에 릴리엔이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지만 세드릭은 무사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단숨에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네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릴리엔의 몸이 약하다는 것도 일순 깜빡했으니 그에게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세드릭은 그저 살아 있는 여동생의 몸을 품 안으로 욱여넣었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었다.

숨 막히게 자신을 끌어안은 오라버니의 어깨 위로 눈만 조금 내민 채 릴리엔은 잠시 눈만 깜빡거렸다. 그녀로서는 조금 불편한 것만 빼면 몹시 안전하게 여정을 마쳤고 목적했던 일도 이뤘기 때문에 세드릭의 이런 반응이 이상했다.

이상했다가…….

'아.'

천천히 이해가 갔다.

세드릭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릴리엔은 오라 버니에게 말도 못하게 미안해졌다.

만약 오라비가 이리 반응할 줄그녀가 미리 알았더라도, 무슨 목적으로 칸타쿤에 가려고 하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혹여 세드릭이 믿어 준다 하더라도, 그는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릴리에이 끼어드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건 맞아.'

하지만 미안했다. 그리고 세드릭이 이렇게까지 걱정하리라는 것을, 이토록 미쳐 날뛰도록 기겁하리라는 것을 예상조차 못했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릴리 엔은 다만, 오라버니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을 따름이었다.

“오라버니.”

“릴리에.”

“저 괜찮아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어요.”

“그래…….”

세드릭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삼키듯이 말했다.

“다행이구나.”

바로 그때.

우르릉 하고 심상찮은 마력의 준동이 느껴졌다.

"!"

여동생을 찾은 안도감에 젖어 있던 세드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가주님!”

마도 터널의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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