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대체 무슨…….”
터널이 무너질 리는 없다. 하지만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알렌, 릴리엔을 데리고 당장 대피를…….”
…쿵, 쿵, 콰앙!
때는 이미 늦었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말들이 제각기 놀라 히히 힝 소리를 내며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설마…….’
시커멓게 입을 벌린 동굴의 입구에서 조금씩 흙먼지 같은 것들이 날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티어 하이인 세드릭은 알 수 있었다.
날리고 있는 건 먼지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이 흩어지고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을 버틴 그 단단한 마력의 결속이 푸르게 빛나는 안개가 되어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의 군대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
세드릭으로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이 대기를 짓눌렀다.
세드릭은 품에 안았던 릴리엔을 뒤로 감췄다. 그리고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마침내 푸른 안개 사이로 인간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바로…….
"대공 전하?”
피와 비에 젖은 옷에 대강 겉옷만 걸친 꼴로도 소름끼치게 우아하고 매끄럽고 아름다운 남자가 나타났다.
우르릉, 쾅!
여유롭게 걸어 나오는 다미언의 등 뒤에서 마도의 정수가 처참할 정도로 와르르 무너졌다.
쇠락한 고대의 유산을 숭앙하는 마법사들이 봤다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슬라르의 사람들은 충격과 동시에 전율을 느꼈다.
그들의 심장을 찌른 비수가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일을 차마 꿈에서도 바라지 못했던 사람들은 숨까지 멈추고 몸을 떨었다.
날리는 분진조차 다미언의 어깨나 머리 위에 쌓이지 못했다. 그는 어마어마한 파괴를 자행한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워 보였고 그래서 더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다미언은 천천히 남매의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다미언이 당연히 가주인 세드릭을 향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틀렸다.
“튜린의 아가씨.”
다미언이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바라시는 대로 노력해 보았습니다.”
인간일 수 없는 신위를 증명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곳은 릴리에의 발치였다.
“그리고 이쯤 해서 저도 한 가지 청을 여쭙고자 합니다."
다미언이 경건한 동작으로 릴리 엔의 흰 치맛자락을 주워 올려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다는 듯 지극한 경애를 내포한 행동이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어 릴리 엔을 올려다보았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청혼이었다.
말은 청혼이되 사실 다미언이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칭찬해 주세요.'
날 봐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노력했어요.
다미언은 착한 척 릴리엔을 올려다보며 기대했다.
사실 노력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한 게 없었다. 객관적으로 한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미언에게 이 마도 터널을 완파한 게 '노력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뜻이다.
사실이 그렇거나 말거나. 남을 열 받게 할 목적으로 종종 가증스럽게 굴어 왔던 다미언의 양순한 척하는 표정은 꽤 그럴싸했다.
물론 릴리엔은 릴리엔답게 쉽게 현혹되지 않았다.
청혼에 당황한 것도 잠시, 침착한 그녀는 곧 대공 전하를 이렇게 무릎 꿇려 둘 수도 없고 이 난데없는 청혼에 덥석 좋다고 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 대공 전하.”
정신은 차렸어도 대처하기는 여전히 난감했다.
릴리엔이 읽은 이야기 속에서다미언은 '아내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고 묘사된다. 릴리엔은 '부족한 것은 없었다. 학대를 당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관심만은 얻을 수 없었다.'는 묘사 역시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한데 청혼이라니?
무엇보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이미 7년 전에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인 사이가 아닌가!
“네, 아가씨?”
달콤할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대답하며 다미언이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크림을 쿡 찍어 둔 것처럼 뺨에 보조개가 접혔다. 눈 밑과 입술옆에 찍힌 작고 선명한 점이 잇자국처럼 도드라지는 웃음이었다.
어쨌든 일단 그만 일어나시라고 하려던 릴리에의 말문이 보기 좋게 막혔다.
'지금 설마 일부러 더 화사하게 웃으시는 건가?'
정답이었다.
다미언은 제 외모의 파괴력을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찰나에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도 그의 얼굴에 홀려 반격을 시도할 기회조차 잃은 자들이 허다했으니까.
물론 이번에는 빈틈을 만들어 릴리엔을 죽이거나 뒷목을 잡고 게거품을 문 채 쓰러지게 할 목적으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이 청혼을 핑계 삼아 딱 한번만 더 릴리엔의 손끝에 닿고 싶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 만져 주면 좋겠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때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는데 릴리엔의 존재를 현실로서 다시 마주하니 충동이 참아지질 않았다.
다미언은 자기가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자각했으나 실제로는 상당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고대 병기자그레브에 정신을 유린당하고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제력이 살짝 맛이 갔다는 뜻이다.
…실은 '살짝'이 아니라 조금 많이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릴리엔을 당장 어쩌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애완 고양이가 된 것처럼 굴고 싶었다.
'고양이…… 나쁘지 않군. 맘껏 쓰다듬을 받으면서 칭찬도 받을 수 있잖아.’
이런 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 무슨 저주가 풀린 것처럼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해방되지 않았던가.
멀쩡한 팔을 용암에 담근 것처럼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끔찍한 통증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게 현실이라니. 다미언은 웃고 싶었고 동시에 울고 싶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를 열망과 고양감이 채웠다. 평생을 지독한 고통에 시달린 다미언의 뇌는 고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약에 취한 것 같은 쾌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다미언은 거의 개박하에 취한 고양이처럼 몽롱해져서 생각했다.
'저 손으로 머리를 매만져 주면 아직 남아 있는 이 지긋지긋한 두통도 가시지 않을까?'
닿고 싶다. 그런 열망이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부풀고 있었다.
손끝이 닿았을 때 잠깐 느껴졌던 그 찌릿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형용할 수 없이 단것을 입에 물었을 때처럼 간지러운 그 느낌.
그 쾌락에 가까운 전율이 그의 착각이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실재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미언은 빨리 릴리에이 뭐라도 반응해 주길 기다렸다.
옆에서 놀란 건지 반응을 못하고 있는 릴리엔의 오빠, 세드릭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정말 청혼을 승낙이라도 해 주면 그거야말로 정말, 젠장.
'빌어먹을.'
죽을 만큼 좋을 텐데.
안타깝고 애타는 마음에 다미언의 목에서 낮은 신음마저 흘러나올 때쯤에서야 릴리엔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릴리엔으로서도 거의 반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왠지 온몸으로 무언가를 조르고 있는 것 같은 다미언을 일으키려면 뭐라도 해 줘야 할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다미언은 사막 한가운데서 거의 빈 물통을 기울여 물 한 방울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심정으로 릴리엔의 손이 닿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수풀 속에 도사린 짐승처럼,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가만히.
그때였다. 릴리엔은 갑자기 훅하고 치미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죄송해요, 좀 어지러워서…….."
가냘프게 입술을 달싹이자마자 릴리엔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
다미언이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릴리엔을 받아 냈다.
“릴리엔!”
하지만 금방 세드릭에게 릴리엔을 빼앗기고 말았다.
릴리엔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무리를 했지. 말하지 마라.”
세드릭이 웅얼거리는 릴리에의 부푼 치맛단 밑으로 망설임 없이 팔을 넣어 여동생을 가뿐히 안아올렸다. 릴리에의 가느다란 고개가 톡 하고 오라버니의 품으로 기울었다.
세드릭은 반쯤 정신을 잃은 여동생을 안고 다미언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외쳤다.
“알렌, 마차 문을 열어라!”
다미언은 릴리엔이 남기고 간체취만 남은 빈 팔을 그대로 든 채 당황하고 있었다.
'원래 사람이 이렇게 가볍나?'
평소 다미언이 주로 접하는 사람들이 시커먼 사내놈들이란 걸 감안해도 그랬다. 아무리 아가씨고 갑옷을 안 입었대도 그렇지, 사람 하나 정도는 가뿐히 숨길만큼 부푼 치맛단을 두른 상태로 이렇게 가벼울 수는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허깨비 같을 수가. 다미언의 힘이 평범한 인간 수준이 아니라는 걸 감안해도 말이 안 됐다.
세드릭의 품에 안기자 릴리엔의 가냘픈 몸은 전부 가려져 머리꼭지만 보였다. 그마저도 가여울 정도로 힘없이 꺾여 있어 오라비인 세드릭이 팔에 힘을 주어 단단히 그러안고 있어야 했다.
누가 봐도 환자나 다름없는 모습에 가슴이 덜컥했다.
그러고 보니 칸타쿤 제도에 피접을 왔다고 했다. '잘도 이 아슬아슬할 때 황제의 앞마당에 놀러 왔다.'고 생각했던 게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이런 때에 위험을 감수하고 따뜻한 곳에 보내야 할 정도로 저 아가씨의 몸이 안 좋은 거였다.
머리 꼭대기부터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서늘해졌다. 그 순간 다미언의 눈앞에서 쾅 하고 마차 문이 닫혔다.
곧장 다부진 채찍질에 말들이 히히힝 울며 달리기 시작했다.
다미언은 눈을 깜빡였다. 릴리 엔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깨는 듯했다.
이건 마치 그가 릴리엔을 빼앗긴 것 같지 않은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겠지만 다 .
미언의 머릿속에 이성적으로 생각할 능력이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다미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긍정적인 정서를 반영한 웃음은 결코 아니었다.
“히익……!”
슬금슬금 그를 스쳐 지나가려던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 정도로, 험악한 기세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재미있군. 참으로 재미있어.”
누가 들어도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