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 *
튜린 내성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다급하게 병력을 몰고 나간 가주가 쓰러진 여동생을 데리고 귀환했다. 행여 착용한 갑옷에 여동생이 다칠까, 하얀 여우 털을댄 망토로 감싸 소중하게 보듬어 안은 채였다.
세드릭이 반쯤 병실이라고 해도 무방한 침실에 릴리엔을 누이고 얼마 안 있어 들어온 쇼가 서둘러 릴리엔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쇼가 설핏 이마를 찌푸렸다.
“상세가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그럴 만하다.”
던켈로부터 전해 들은 정황은 세드릭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험한 꼴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이가 황제의 군사들로부터 대공을 구했다고 한다. 겁박하고 모욕하는 무장 군인들 앞에서 의연히 굴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장하다 보듬어 주어야 할 판인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꼴을 봤다고?'
눈이 뒤집힐 뻔했다. 릴리에이 기절한 상황만 아니었어도 당장 찾아가서 멱살을 잡고 말았을 것이다.
7년이었다. 품 안에서 내놓지 않고 7년을 고이 길렀다.
한데 잠시 눈을 뗐다고 이 꼴이라니!
세드릭이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원망의 화살은 만악의 근원인 황제가 아닌 다미언에게 향했다.
… 엉망인 꼴로 릴리에에게 느닷없이 청혼을 해서 미운털이 박힌 게 맞았다.
“일단은 마력으로 아가씨의 기혈을 다스려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쇼의 처방에 따라 세드릭은 릴리엔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지체 없이 마력을 끌어올려 여동생의 기혈에 진입을 시도했다.
"!”
하지만 마력이 들어가질 않았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벽에 막힌 듯 릴리엔의 몸이 세드릭의 마력을 거부했다.
"어째서……?”
아직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릴리엔이 못 고칠 천형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한단 사실을 안날부터 악몽을 꿨다. 여동생이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서 있어야 하는 악몽을 말이다.
릴리엔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세드릭은 크게 당황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어찌하여, 왜…….”
“……혹시 가주님, 릴리엔 아가씨께서 누군가 새롭게 만난 분이 있지 않으십니까?”
“뭐?”
“제가 보기엔 상성이 더 맞는 사람을 찾았기에 아가씨의 몸이 본능적으로 가주님의 마력을 거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체 피를 나눈 남매 이상으로 상성이 잘 맞는 경우가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며 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당장 그 사람을 불러 와야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이를 악문 채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가주님? 그분은 어디 계시죠?”
"외성에 계시다.”
“외성이요?”
쇼는 설핏 이마를 찌푸렸다. 튜린 본성의 구조를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면 다음 두 구역으로 나눌수 있다.
하나, 가주 일가와 주요 인사들이 거처하는 내성.
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거처하는 외성.
다양한 사람들이 기거하고 방문하고 떠나가는 이 성에서는 객실의 배정도 무척 엄정하게 이루어졌다.
'외성에 기거하는 사람이 아가씨와 연관되어 기분이 상하셨나 보군.'
충분히 그럴 만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쇼는 조심스럽게 간언했다.
“심정은 알겠습니다만 가주님, 아가씨를 치료하려면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시가 급한 건 아니지만 지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대체 누구입니까?”
그게 바로 내성 진입을 저지당했던 다미언이 릴리에의 침실까지 불려 올 수 있었던 경위였다.
* * *
'…으으음.....'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목이 꽉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릴리엔은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문자 그대로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깜빡거리는 일련의 행동마저 몹시 느렸다.
가까이에 키 큰 남성이 서 있는 형상이 어른어른 비쳤다.
“오라…… 버니.”
릴리엔은 새하얀 얼굴을 안색만큼이나 새하얀 침구에 파묻은 채 힘없이 세드릭을 불렀다.
하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왤까?'
릴리엔은 의아했다. 어쨌든 오라버니는 그녀가 일어나는 걸 도와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익숙한 과보호려니. 하는 수 없이 릴리엔은 스스로 팔꿈치에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밝게 빛나는 후광 같은 머리카락,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맣고 날렵한 옷차림.
첫인상과 다르게 너무도 멀끔하게 차려입어 잠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저 찬연하게 두드러지는 보랏빛 눈동자는 분명…….
“……대공 전하?”
다미언이었다.
“릴리엔, 왜 일어났느냐.”
“오라버니.”
쇼와 이야기를 나누던 세드릭이 릴리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이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흠칫하며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리타를 불렀다.
"아가씨.”
급히 다가온 리타가 릴리에의 앞섶을 여며 주었다.
'!'
릴리엔은 그제야 제가 맨몸에 느슨하고 새하얀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단 걸 알아차리고 약간 당황했다. 누워서 시트를 덮고 있었을 땐 괜찮았지만 갑자기 일어나느라 매무새가 상당히 흐트러져 버렸다.
'이런.’
못 보일 꼴을 보였다. 보아하니 다미언도 당황해서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릴리엔은 부러 담담히 부탁했다.
“실례합니다만, 전하. 커튼을 좀 내려 주시겠어요?"
다미언이 말없이 침대 기둥에 묶인 커튼을 풀어 주었다. 반투명한 천이 살랑거리며 내려와 릴리엔의 모습을 희뿌옇게 가렸다.
세드릭은 그 모습을 곱지 않게 바라보았다. 각별하게 여기는 여동생에 대한 보호 욕구가 하늘을 찌르던 중에 그 여동생이 불한당같은 청혼을 당하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거기까지만 했어도 열 받을 판에 직후 릴리에이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감정이 좋으려야 도무지 좋을 수가 없었다.
다미언이 중얼거렸다.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참으로 좋은 시점에 청혼을 하신 덕도 큽니다.”
네 탓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게 차라리 덜 무례하게 들릴 것 같았다.
다미언은 그제야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남자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키는 그보다 손가락 두어 마디가 작은가? 다미언이 190㎝에 닿을까 말까 한 장신이기 때문에 세드릭도 결코 작은 키는 아닐 터였다.
'오누이가 똑같이 머리는 검고 눈은 푸르고 얼굴은 희군.'
아쉽게도 릴리엔과 비슷한 건 그 정도가 다였다.
유순하고 흐릿한 인상인 릴리에과 달리 세드릭은 선명하고 날카로웠다. 거기에 전에는 없던 관록까지 깃들자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절로 허리를 쭉 펴게 만드는 위압감이 생겼다.
이슬라르의 가주이자 튜린 선제후로서 보낸 세월이 어언 7년.
새파란 애송이였던 세드릭의 나이도 스물여덟이 되었다.
이제는 어디로 보나 이 튜린 성의 성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지만…….
위아래를 배울 형편이 아니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평생 건방지게 살아온 스물네 살 다미언은 생각했다.
'조금만 속을 긁으면 금방 이성을 잃겠는데. 벌써부터 꼰대 같은 게.’
사실 다미언은 지금 초조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외성에 머물라는 조처가 모욕적 이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릴리엔으로부터 쫓겨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간 비이성적인 생각이겠지만 눈앞의 이 청년이 릴리엔을 영영빼앗아 가는 것 같아 적대감이 지근지근 치솟던 차.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혈압 잘오르게 생긴 남자는 릴리에의 오라비였다.
다미언은 릴리엔이 했던 부탁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이 마도 터널을 파괴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기실 그녀의 부탁은 자기 자신보다도 튜린과 오라비를 위한 청이었다.
'남매간의 정이 상당히 도타워 보였지.'
하는 수 없지. 조금 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저 튜린의 아가씨께서는 곧 오라비를 떠나 온전히 그의 보호하에 속하게 될 거다.
그때가 올 때까지 참는 정도야.
게다가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음 착한 릴리엔은 아마…….
‘자기 오빠에게 미움받는 나를 가엾게 여겨 주지 않을까?'
간악한 궤계를 꾸미는 다미언의 입가에 번뜩 미소가 번졌다.
릴리엔이라는 변수를 깜빡 잊고 먼저 시비를 건 세드릭은 아차했으나 때는 늦었다.
다미언이 가증스럽게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소 성급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레이디 릴리엔을 뵈니 청혼 한번 하지 않고 결혼을 한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걸려서"
외교적 수사를 제하면 이런 뜻이었다. '네 동생이랑 나는 이미 결혼한 사이나 다름없거든?'
과연 세드릭은 분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꼰대였던 부황을 가지고 놀았던 전적이 다수, 다미언은 부러 얄밉게 웃으며 덧붙였다.
“선제후께서 아가씨의 병환 중에 저를 부르신 이유도 필시 그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시겠죠.”
“전하께서는…….”
“이런, 말씀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군신이기 전에 저는 선제후께 매부가 되는 몸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