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매부(妹夫), 여동생의 남편.
금기어나 다름없는 단어가 튀어 나오자 본격적으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커튼안쪽의 릴리에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워졌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릴리에이 망설이는데 다행히 쇼가 나섰다.
“두 분 다 그쯤 하십시오. 릴리엔 아가씨의 상태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대공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릴리에 아가씨께서는 선천적인 마력 감소증을 앓고 계십니다.”
쇼는 '불치병'이라는 단어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쪽에도 상황을 알렸다고 했으니 굳이 안 좋은 얘기까지 다시 할 필요는 없지.'
물론 충성스러운 부하의 보고를 든다 만 다미언은 릴리엔에게 병이 있는 줄도 그 병이 불치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몰랐지만 대충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자 쇼가 설명을 이었다.
“그를 보완하기 위해 가주님께서 아가씨에게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급해 주고 계셨습니다만 돌연 그것이 불가능해져서…….”
가만히 듣고 있던 릴리엔은 놀랐다. 마력 전달이 불가능해졌다니?
“하여 부득이 전하를 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예.”
"어째서?"
“릴리에 아가씨께서 여기 계신 가주님보다 더 상성이 맞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게 저 사람이구나.
릴리엔은 순식간에 행간을 읽었다. 다미언 역시 단숨에 요지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만 이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릴리에에게도 그가 필요했다.
“아하…….”
다미언의 느른한 감탄사가 마치 등줄기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떨었다.
* * *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은 다미언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릴리에의 침대 옆 바닥에 반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른어른한 커튼 너머로 다미언의 형상이 가깝게 비쳤다. 릴리 엔은 왠지 약간 입이 마르는 것 같았다.
다미언이 청했다.
"아가씨, 손을.”
한 겹 베일 안에서 릴리엔은 조금 망설였다.
수차례 세드릭으로부터 마력을 나눠 받아 보아서 이게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상대가 다미언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손이 떨어 지지가 않았다.
묵묵부답인 커튼 안쪽을 바라보며 다미언은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그는 초조했다.
갑작스러운 청혼에 결혼한 거나다름없다 운운한 게 새삼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게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싫은가?'
멀쩡하지 않은 꼴로 청혼을 한 게 싫었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혹시…….
'내가 너무 아름다운가?'
스스로의 미모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남자, 다미언은 자기보다 아름다운 남자는 싫다고 하는 여자를 꽤 만나 보았다.
물론 그중에 태반 이상은 다미언의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긴 했지만…….
'진심인 사람도 있었지.'
어쩌면 릴리에의 취향도 그처럼 혼절하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천하절색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미언은 불쑥 억울해졌다.
예쁘면 예쁠수록 좋은 거 아닌가? 게다가 그는 나이가 들어도 잘생기고 아름답고, 둘 다 해 먹을 자신이 있었다.
전쟁터에서조차 그의 얼굴 때문에 죽이기를 망설이다 죽어 나간 적들이 허다했거늘.
왜 그 멍청한 놈들은 홀릴 수 있는데 내 눈앞에 이 여자는 못낀단 말인가?
릴리엔이 미인을 싫어한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다미언은 벌써부터 억울했다 섭섭했다. 별생각을 다 하는 중이었다.
그때 베일 안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폐를 끼치게 되어 면구합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다미언은 단칼에 부정했다. 하지만 릴리엔은 여전히 망설였다.
다미언의 망상처럼 그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기억 속 다미언은 릴리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원래 무관심은 가장 소극적으로 불호를 표현하는 방식인 법이다.
태어나서 모든 걸 거의 혼자서 견뎌 온 다미언으로서는, 그에 비하면 별로 불행한 환경도 아니었는데 몸도 마음도 연약한 릴리 엔이 이해가 가질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평생 받아 본 적도 없는 관심을 요구하는 게 부담스럽고 귀찮았겠지.
릴리엔은 평생 봐야 할 사이인 남편과 웬만하면 서로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릴리엔은 결혼을 하면 절대 남편을 귀찮게 하지 말자고수차례 다짐했었다.
사람의 마음을 엿볼 능력이 없는 릴리엔은 지금 다미언이 인생 처음으로 제 넘치는 마력의 쓸모를 찾은 것에 합법적으로 릴리엔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 대해 얼마나 내적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다미언만 애가 탔다.
“그런 말씀은 마시고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다미언의 청에 릴리엔은 생각했다.
그래, 나는 이 사람의 정략결혼상대다. 내가 죽으면 이슬라르와 황태자파의 결속을 공고히 다질 방법이 사라진다.
정략을 위해서라도 다미언은 릴리엔을 구해야 했다. 이 어찌 우습지 않을 수가.
릴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도움 받기를 거부하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겠지.'
얌전히 협조해야겠다. 호의를 베푸는 쪽은 다미언인데 살려 주겠다고 부탁까지 하게 만드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 생각이 완벽한 동상이몽인 줄도 모르고 릴리엔은 천천히 손을 들어 커튼 사이로 내밀었다.
마침내 릴리엔의 손끝이 다미언의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얽혀들었다.
베일이 시야를 가린 탓에 거리 조절이 약간 미숙했다. 릴리엔의 손이 다미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려는 것을 다미언이 잡아 챘다.
다미언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이 손과, 릴리엔의 손과 다시 닿았다.
등줄기로 간지러운 전율이 달렸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뼈에까지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세드릭을 생각해서 참았다.
참아야 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미언은 마침내 그에게 다시 잡힌 이 손을 힘주어 잡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 했다. 그리고 손등 위로 경건하게, 아니 실은 경건하지 못하게 수없이 입을 맞추고 뺨을 부비고 싶은 것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조금 더 닿고 싶다. 이 가느다란 팔로 그를 살짝 안아 준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시기상조인 바람이었다. 다미언은 약간 목 쉰 소리로 알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손목으로 천천히, 연약하고 가느다란 몸이 놀라지 않도록 마력을 아주 조금씩만 흘려 넣는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잡은 손을 통해 은은하게 전해 지던 릴리엔의 정체 모를 서늘한 기운이 마치 마력에게 자리를 비켜 주듯 다미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늘하되 차갑지 않았다. 주인 만큼이나 부드럽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기운이 다미언의 고통을 흔적 없이 녹였다.
다미언의 마력이 릴리엔 안에서, 일주천을 하는 동안 이명이 엷어졌다. 작은 괴물 같은 것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듯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뇌압이 낮아지면서 두통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숨통이 트인다는 게 이런 느낌 일까.
버석버석한 모래 먼지가 날리는 사막에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비록 그를 평생 동안 태워 오던 열기를 식힐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끔찍하게 반가웠다.
게다가 반가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매라서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없는 세드릭의 마력조차 거절했다는 릴리엔의 몸이 다미언, 그의 마력만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쁘다.'
다미언이 그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단순히 기쁘다는 말로 이 거칠고 흉포한 환희를 다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세상이 갑자기 내 편을 들기로 결심했나?’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온 주제에 잠깐 이런 미친 생각마저 들정도였다.
마력이 오가지 않아 좁아진 릴리엔의 혈맥을 도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그나 세드릭처럼 강력한 마력을 지닌 사람일수록 손톱으로 펜을 잡고 글씨를 쓰는 것처럼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아서 좋았다. 더 오래 릴리엔의 손을 잡고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다미언이 얼마나 끔찍하게 기뻐하는 줄 전혀 모르는 릴리엔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손목을 거두려고 했다.
물론 릴리에도 자기의 텅 비고 차가운 몸을 적시는 마력의 흐름이 편안하고 좋았다.
게다가 다미언의 마력은 세드릭의 마력과 달리 릴리에의 몸속으로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남의 것 같지 않고 내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어…….’
릴리엔은 노곤하게 녹으려는 시야에 억지로 힘을 주고 손목을 빼려 했다.
“전하, 이만하면……."
“쉬.”
무릎을 꿇은 자세가 힘들고 지겨울 만도 할 텐데. 다미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다정하게 들렸다.
“제게서 이 시간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 ... ?"
무슨 말이지? 참으로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릴리엔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마저도 금방 노곤해졌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다리도 아프실 거고 그만하시라고 다시 말씀드려야 하는데…….
“저 이제 정말 괜찮…….”
“제가 괜찮지 않을 거라서 그래요.”
몽롱한 상태로 듣자니 다미언의사근사근한 말투며 목소리가 정말 유혹적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로 따르고 싶어졌다.
“그러니 제발 이대로 있어요.”
하지만…….
다미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릴리엔은 주문에라도 취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릴리엔의 심장까지 스민 다미언의 마력에 담긴 ‘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조금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의 마력이 릴리에의 텅빈 심장을 어느 정도 채웠다.
동시에 다미언의 컨디션은 한 달 중에 한 번이나 이런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졌다. 중력이 3분의 1 정도는 줄어든 것 같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릴리엔의 맥박이 몹시 느렸다.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다미언은 엄지손가락으로 그 사랑스럽고 나른한 팔딱임을 잠시 어루만졌다.
그리고 속삭였다.
“좋은 꿈을 꿔요.”
여기서 잠드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뒷말은 내심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