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다미언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리타가 커튼 안으로 쏙 들어가 잠는 릴리에의 자세를 편하게 고쳐주기 시작했다.
다미언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시리고 차가운 푸른색 눈동자.
곱지 않은 눈길이었지만 저 눈동자 색만큼은 릴리엔과 닮았다고 생각하니 반감이 덜해졌다.
'게다가 오늘의 승자는 나잖아.'
다미언은 세드릭에게 곱게 웃어주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거나다름없는 자의 여유!
그러나 절세미인의 해사한 미소를 마주한 세드릭의 표정은 아주 굉장해졌다.
더 이상 그는 여동생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릴리엔을 살린 사람은 눈앞의 다미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릴리엔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세드릭은 머리로는 알았다. 감사를 해야지.
근데 왜 난 이렇게 기분이 나쁠 까?
“누이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빠드득 소리가 선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미언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너 그러운 남자였다.
“아가씨께 도움이 될 수 있어 그저 기쁩니다.”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넌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장담컨대 세드릭의 기분이 더러워진 데는 이런 다미언의 탓이 할 이상이었다.
그때 리타의 뒤를 이어 릴리에의 상태를 살피러 간 쇼가 커튼안쪽에서 나오며 말했다.
“안정되셨습니다. 오히려 가주님께서 마력을 주실 때보다 아가씨의 상태가 훨씬 좋으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두분이 천생연분이신 모양입니다.”
다미언의 귀에는 천사의 음악소리로, 세드릭의 귀에는 악마의 웃음소리로 들리는 말!
약간 눈치가 없는 쇼는 가주의 표정이 얼마나 섬뜩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말했다.
“제 생각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두 분이서 하루 빨리 결혼을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가주님?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죠?”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기에는 너무 엄청난 기세였다. 강대한 마력을 가진 사람이 분노하는 통에 평범한 사람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들어야 했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다미언만큼은 예외였다. 세드릭이 아무리 천재라도 해도 티어 인피니티를 살기로 겁주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행복으로 반쯤 돌아 버린 다미언은 이렇게까지 생각했다.
'매부께서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군.'
당분간은 그 누구도 이 기쁨에 누가 될 수 없을 예정이었다.
7. 굶주린 짐승에게 먹이를 줄때 각오할 것.
그날 이후로 다미언은 외성에 기거하기 시작했다.
“레이디 릴리엔을 위해 제가 이 성에 기거하는 것을 설마 거절하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매부.”
금기 단어의 출현에 뚝 하고 세드릭의 손에서 청금석 펜대가 꺾였다.
“참으로 배려가…… 깊으시군요.”
배려가 두 번만 깊었다가는 세드릭이 꼭지가 돌아 버리게 생겼는데 다미언은 날름 말을 받았다.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낯짝 두껍게 구는 다미언이 몹시 얄미웠지만 세드릭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릴리를 위해서…… 릴리를 위해서다…….’
여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복수랍시고 한 짓은 다 미언의 거처를 외성에 정하는 정도가 다였다.
물론 온갖 종류의 냉대에 익숙한 다미언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오는 처사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기 싸움!!
그러나 누가 보아도 승패는 명백해 보였다. 현장을 목격한 쇼가 말없이 물러나 가주를 위한 위장약을 제조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난 릴리 엔은 리타를 통해 대략적으로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게 기력이 더 모자란 것 같아.”
평소보다도 몸이 축 늘어졌다.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마력이 늘어나면 생명력이 그에 맞게 보충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달라진 몸 상태에 맞춰 쇼가 새로 배합한 약초를 릴리엔의 담뱃대에 채워 주었다.
새하얗게 마른 데다 옷차림을 갖출 체력조차 없어 품이 넉넉한 가운만 겨우 걸쳤다.
그 상태로 쿠션에 기대 담뱃대를 물고 있으니 모습만 봐서는 제대로 건강을 망치는 중으로 보였다.
리타는 생각했다.
'건강만 망치는 게 아니라 분위기도 좀 묘해지시는 것 같고'평상시엔 맹하고 유순하기만 하던 사람이 저 담뱃대만 물려 놓으면 좀……. 수위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말해 봤자 아가씨는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로 이해하지 못하실 테지만.’
분위기가 좀 방탕해진다고 해서 몸에 좋은 걸 안 피울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일지도.’
리타의 함구 덕에 릴리엔의 흡연 아닌 흡연은 습관이 되었다.
병을 치료하는 수단은 될 수 없었지만 기력이 없을 때 연기를 마시다 보면 눈이 깨는 정도는 됐다.
'비유하자면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느낌이랄까…….'
릴리엔은 후우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구 앞인지를 깨닫고는.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소년이 깍듯하게 고개를 저었다.
“건강을 위해서 피우시는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향이 역하지도 않으니 제 앞에서는 부디 개의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릴리엔은 약간 난감하게 웃었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 그럴 수야 없지요.”
소년의 이름은 마테오 루펜바인.
삼촌의 구출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 제국의 황태자였다.
마테오와 릴리엔은 이미 헤멘린 나 대제후 생전에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소년은 병약해 보이는 릴리엔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유약해 보이는 모습이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제가 황태자라면 레이디께서는 황태자의 은인이 되십니다.”
“나쁘지 않은 칭호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일단 담뱃대를 내려놓았다.
“어쩐 일로 저를 찾아 오셨나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짙은 금발을 가진 소년의 곱상한 얼굴은 삼촌인 다미언과 비슷한 데가 있었으나 그처럼 요사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없었다. 단정하고 태가 반듯해서 귀태가 날 뿐이었다.
붉은 기 없는 진청색 눈동자 역시 깨끗하고 푸르기만 했다.
“감사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태자는 고개를 숙였다.
“평생을 두고 갚기 어려운 은혜를 빚졌습니다.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테오 루펜바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멋대로 오해했던 지난날의 행동을 마음속으로 사과하느라고 예가 과해졌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릴리엔은 기쁘다기보다 조금 난감했다.
'진심으로 걱정해서 위험을 무릅쓴 건 아니었는데.'
이런 공치사는 과분했다.
“그렇게까지 치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히나 지금은 이슬라르가 다소 무례를 저지르고 있으니까요.”
"아.”
전례를 깨고 외성에 머무는 중인 삼촌 이야기임을 깨달은 마테오가 다시 천사같이 웃었다.
은인이 된 마당에 다미언은 내 성에 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외성을 자처했다. 마테오는 의아했다.
이유를 묻자 다미언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못 참을 것 같아.”
미친 자 같으니. 마테오는 피섞인 삼촌을 망설임 없이 혹평했다.
'이리 고결한 아가씨를 상대로 그런 망발을…….’
아직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치고 속이 안 좋아질 정도였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 망나니 숙, 실례. 철이 덜 든 숙부님께서는 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시거든요.”
마테오는 릴리엔의 착각을 바로 잡아 주고 싶었다. 이건 무례가 아니라 릴리엔을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 조치였다.
하지만 사정 모르는 릴리엔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곤란해할 뿐이었다.
“그래도.”
“아닙니다. 이미 숙부님께서는 그 처분에 개의치 않고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디, 제발 숙부님께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쳐다도 보실 필요 없습니다.”
“으음.”
거듭 강조하는 마테오의 말은 100% 진심이자 사실이었으나 흐려진 릴리엔의 안색은 다시 갤기색이 아니었다.
마테오는 생각했다. 릴리엔은 물안개 같은 인상에 비해 상당히 강단과 배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미언이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하는 건 아닐 터.
'근본부터 선한 사람이라 마음을 쓰는 거겠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모른 척하지 않고 끝내 다미언을 구출해낸 심성과 결단력.
모로 봐도 다미언, 그 독초같이 아름답기만 하고 속은 시커먼 삼촌에게는 아까웠다.
마테오는 릴리엔을 다미언에게서 떼어 놓고자 무례까지 불사하는 세드릭의 결단에 백번 공감했다.
그라도 릴리에 같은 여동생이 있었으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내 입장상 이 결혼을 하지 말라고 말릴 수는 없겠지만.'
이슬라르와 한배를 타기 위해서 이 결혼은 꼭 필요했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아름답고 선량한 사람을 다미언의 흉험한 손아귀에 밀어 넣고 있다는 게 명백해져서 마테오는 죄책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듣자 하니 릴리에에게도 다미언이 필요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은 진짜 삼촌한테는 너무 과분한데.
태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잠시 고민하던 릴리에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그분을 만나 뵈어도 괜찮을까요?”
“예?”
마테오가 흠칫 놀랐다. 누가 누구를 만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