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세드릭은 말은 안 했지만 릴리 엔이 다미언을 만나는 걸 꺼렸다.
릴리엔으로서는 여러 모로 다미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지.
만 고용인들은 모두 '일단 쉬시라,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을 거다.'라며 릴리엔을 말렸다.
그 말도 맞았다. 어쨌거나 이미 반쯤은 부부가 아닌가.
하지만 이대로 있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릴리에이 듣자 하니 다미언은 심지어 마도 터널을 부순 업적에 대해 감사조차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상황을 정리하고 가주로서 감사를 표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직접 부탁을 했던 릴리엔은 사적인 인사 한마디조차 못하고 입을 씻고 있는 지금 상황이 불편했다.
혹시 마테오 태자가 앞장서면 고용인들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황태자가 나섰으니 릴리엔을 막지 못했다고 괜히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될 터.
여러모로 묘수였지만 태자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릴리엔은 실망했지만 한편으로 이해했다.
“역시 조금 어려운 부탁이겠죠.
죄송해요.”
은인의 선량한 얼굴이 흐려졌다. 마테오는 당황했다.
“그, 저기…."
“태자 전하께서는 손님으로 머물고 계시는데 이런 문제에 나서 기가 어려우시리라 사료됩니다.
제가 마음이 조급하여 실수하였으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만을 바랍니다.”
"아니 그러니까 저………."
되레 사과까지 받다니!
마테오는 인생 최대의 고민과 마주하게 됐다.
태자는 릴리엔이 마음에 들었다. 은인인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이 어린 마테오에게 무작정 상냥하게 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접하는 모습이 그를 낮잡아 보지 않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 릴리엔을 실망시킬 것인가.
아니면 순순히 삼촌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인가.
쉽게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니었지만 마테오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습니까? 은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요.”
"어머나.”
릴리엔의 흐려졌던 얼굴이 다시 개었다. 천만 다행이라는 듯 웃는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쿵.
'어?’
물안개처럼 흐릿하게 웃는 얼굴에 겉치레 없이 그저 담백한 인사.
그저 그뿐이었는데 마테오는 과분한 칭찬을 들은 것처럼 붉어지는 제 얼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생 전반을 뒤흔들 지독한 열병 같은 첫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태자는 릴리엔을 따라 웃었다.
* * *
"어이하여 이곳에 계십니까?"
헤멘린나로부터 부름을 받고 한 달음에 달려온 다미언의 수하, 아이반 아이작 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긴 외성이 아닙니까?”
황제를 옹립하여 공신 가문으로 득세하기 이전부터 돈이 많았다.
던 이슬라르다.
역사와 전통을 갖춘 재력이니 외성의 방이라고 해도 대공을 모시기에 물질적으로 부족한 건 없었다.
애초에 외성과 내성의 구분을 신분 차이라고만 단정 지을 순없었다. 귀족인 기사들도 보통 외성에서 거주했다. 여차할 때 성을 지키기에 용이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 전하를 모신다?
그것도 목숨이 달린 정쟁에서 한배를 탄 사람을?
“세드릭 이슬라르가 미쳤답니까?”
첨언하자면 지금 아이반은 한마디 설명조차 듣지 못한 상태였다.
다미언이 ‘끔찍하게 아끼는 여동생에게 무슨 해라도 있는지 알고 미친 듯이 달려온, 보호 본능으로 머리끝까지 경계심이 차오른' 오라비 앞에서 피투성이 몰골로 청혼이라는 대형 폭탄을 터트린 데다가, 한 대 치고 싶게 만드는 특유의 얄미움을 유감없이 발휘했단 걸 알면 아이반의 반응도 아무래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반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분통이 터졌다.
'아니, 평소라면 간곡한 충언도 듣는 둥 마는 둥 가는 곳마다 파괴를 자행하던 양반이 왜 이 용납할 수 없는 무례에는 얌전히 웃고 있기만 하시는 거…….’
잠깐만.
'얌전하게 굴고 있어?'
그의 주군은 이유 없는 모욕을 참아 넘기는 성인군자는 절대 아니었다.
“대공 전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날카롭게 직감이 외쳤다. 저 망할 전하께서 이런 푸대접을 받을만한 짓을 저지르신 게 분명했다!
“글쎄.”
제대로 된 대답 대신 다미언은 웃기만 했다.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수줍게 빛났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아이 반은 소름이 쫙 끼쳐 두어 발짝물러섰다.
“전, 전하. 제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게 조심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하다 보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치적 동반자인 대공을 예까지 쫓아냈을 정도면 사고를 쳐도 이만저만한 사고를 친 게 아닐 터인데!
예쁘게만 보여도 모자랄 처가에서 사고를 치다니! 하여간 이놈의 양반은 진짜!
"아니, 대체 어떤 놈을 얼마나 잔인하게 뭉개 놓으셨으면 외성으로 쫓겨나요?”
“……그쯤 진정하고 그만 입을 조심하시게, 아이반 경. 경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직 없었으니.
까.”
때마침 문을 열고 나타난 태자가 만류했다.
하지만 답답했던 아이반은 필터링을 깜빡 잊었다.
“아니 그럼, 아직 아무도 안 죽이셨는데 왜 이렇게 쫓겨나 계신 겁니까? 제가 설마 대공 전하께서 이 집 아가씨의 치마 속에 숨어 있었다는 헛소문을 믿어야겠습니까?”
무례한 말본새에도 마테오 황태자는 대뜸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내지 않았다. 태자는 기본적으로 가정교육을 잘 받고 곱게 자란 사람이었다.
성정 자체도 온화했던 선황의 판박이라는 평인 태자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경, 죽고 싶나?”
아이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 착한 태자 전하, 늘 망나니 같은 삼촌 밑에서 고생한다고 친히 위로해 주시던 태자 전하께서……!’
삐뚤어지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에 경악한 그가 간신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니면 그 입 닥치게.”
“예…"
2주간의 납치 및 정신 고문 코스 그리고 뒤따른 삼촌의 실종사태까지.
큰일을 연달아 치른 사춘기 황태자는 조금씩 영향을 받는 중이었다. 성격이 나빠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와 삼촌이 받은 은혜를 그리 낮잡아서 말하지 마라. 은인께 실례다.”
“그건 제가 경솔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아이반이 순순히 사과했다. 그리고 소름이 끼친 목을 쓸었다.
릴리에의 치마를 운운한 아이반에게 마테오가 먼저 죽고 싶은 거냐고 묻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미언의 칼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폭발적인 살기였다.
솔직히 아이반은 반쯤 각오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살기마저 금방 사라졌다.
'왜지?’
그때였다.
“전 괜찮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전하.”
천천히 문이 열리고 조용히 서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웬 무골호인처럼 생긴 사람이…….’
무골호인, 릴리에이 너그럽게 웃으며 어깨를 얕게 으쓱했다.
“없는 이야기를 하신 것도 아닌 걸요.”
아.
아이반은 깨달았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대공 전하의 약혼 상대…'
세상에 맙소사. 아이반은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저런 한눈에 봐도 선량해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 전하 같은 말종 중의 상말종을…….
'……아니 잠깐만 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라고?'
그럼 정말로 저 아가씨의 치마폭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단신으로 수만 명의 전열을 파고들어 한 시간 안에 적군을 넋잃은 부랑자 꼴로 만들어 놓던 다미언 루펜바인이?
도개교 없이 기마술만으로 해자를 뛰어넘어 굳게 걸어 잠근 성문을 인간의 몸으로 박살 내 놓았던 제국 최고의 공성 병기가?
심지어 레옌그라드 요새가 포위 되었을 땐 야음을 틈 타 맨몸으로 요새의 성벽을 타고 내려가 숙영 중인 적군의 절반을 몰살시킨 적도 있었다.
절반밖에 못 죽인 건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대기 중이던 병력이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였기 때문에 학살은 업적이 되었다. 업적은 전설이 되어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라는 칭호로 그의 이름 앞에 남았다.
아직도 아이반은 그날 적장의 수급을 움켜쥐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다미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건…….’
꿈에서라도 못 잊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 괴물이 릴리에에게 다가갔다. 다미언의 흉신 시절을 떠올리고 있던 아이반은 무심결에 흠칫 놀랐다.
'잠깐, 무슨 짓을 하시려고?'
무슨 짓을 하긴 했다. 다만 피가 튀지는 않았다.
“예까지 홀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미언은 그저 한 손을 가슴에, 남은 한 손을 릴리에에게 내밀었다.
"알았더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 먼 길은 아니셨나요?"
서사시에 들어가도 무리가 없을만치 완벽한 예와 대사였다. 아이반이 입을 떡 벌렸다.
"회복 중이시란 이야기만 전해 들었는데 강건하신 것 같아 기쁩니다.”
세드릭은 릴리에이 다미언을 찾아가는 것만 막은 게 아니라 소식까지도 막은 모양이었다.
생각 이상의 과보호에 릴리엔은 조금 난감해졌다. 릴리엔은 일단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게 너무 늦었지요?”
“감사라니요.”
다미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 목숨은 이미 당신의 것이지요.”
"예? 말씀이 과하십니다."
약간 당황하면서도 분위기에 넘어간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저런! 아이반은 탄식하고 싶었지만 다미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섬세한 손길로 확실하게 릴리엔의 손을 옮아 잡은 다음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 상태로 눈을 맞추고 손등 위에서 속삭였다.
“결코 과하지 않습니다. 제가진 빚은 제가 잘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