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릴리엔은 난감해졌다.
실상 릴리엔이 구한 건 엄밀히 말해 다미언이 아니라 다미언의 오른쪽 눈이었다.
반면에 릴리에이 다미언에게 빚진 건 이슬라르와 튜린 그리고 자기 자신이었다.
'눈 하나를 보전해 준 대가로 이토록 극진한 인사를 받아 버리면 이쪽에서 감사를 표할 길이 마땅치 않아지는데.'
그렇게 판단한 릴리엔은 잡힌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한손을 가슴에 얹고 무릎을 굽혔다. 제국식의 극히 정중한 인사였다.
“오히려 저야말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고귀한 이들 중 말석 같은 제 부탁을 들어주신 것과 목숨을 구해 주신 일까지. 무엇으로 그 은혜에 값을 셈할지 막막합니다.”
다미언은 대답 대신 빈손을 가만히 쥐었다. 릴리엔은 묵묵부답에 약간 의아해졌다.
“전하? 제가 실언이라도…"
“아닙니다.”
다미언이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눈빛을 감추려고 할 때 웃는 버릇이 있단 걸 아는 아이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다미언에게는 속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회복 중이신 분께 제가 자리조차 권하지 않았군요.”
“아, 그게…….”
릴리엔의 얼굴이 약간 흐릿해졌다. 사실 그녀는 오래 앉아 담소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일단 아무도 모르게 나온 터라 눈치가 보였고, 두 번째로는 아직 몸 상태가 영 좋질 못했다.
기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데다,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해 릴리엔은 아직도 종종 수면을 유도하는 약을 마셨다. 그 약 기운이 완전히 가시질 않아 머리가 멍하기까지 한 상태였다.
“이쪽으로.”
하지만…… ‘무엇으로도 은혜를 갚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방금 제 입으로 선언한 주제에 권하는 자리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굳이 그녀를 붙잡는 게 꼭…….
'아무래도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이 릴리엔은 일단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 반에게 알은척을 했다.
“처음 뵙는 분이로군요."
"아, 예……. 아이반 아이작입니다.”
방금 제 눈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에 넋이 나간 채로 그가 떨떠름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미력하나마 대공 전하의 보좌관으로 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릴리에 이슬라 르.”
아이반의 어딘지 어색한 태도를 모르는 척 릴리엔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부족한 사람이나 오라비이신 튜린 제후의 공으로 그저 평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레이디 릴리엔을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아이반의 특기는 첩보였다. 그는 인사를 올리면서도 현역 정보원답게 면밀히 릴리엔을 살폈다.
단정한 생김에 끝이 처진 눈.
웃고 있으니 온화하다 못해 유약해 보인다.
옷차림에도 화려한 맛은 없었다. 그나마 마른 체형을 보완하려는 것인지 소매를 풍성하게 잡긴 했지만 그뿐.
인상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행색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대귀족가의 아가씨라기보다는 빈한 학자처럼 보였다.
태도에 문제는 많지만 어쨌든다미언 루펜바인의 충신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이반은 생각했다.
'아니, 이런 사람이 어쩌다가…?'
무슨 큰 죄를 졌길래 우리 대공전하랑 얽히고 말았담?
'말세로 세.’
충신은 저도 모르게 황태자와 안타까운 시선을 공유하고 말았다. 마테오도 말없이 눈빛으로 공감을 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릴리에만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마테오, 아이반.”
다미언이 키가 높은 탁자에 놓인 병을 들어 유리컵에 무언가를 따르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만 나와 아가씨가 이야기를 나누게 해 주는 게 어떨까?”
다미언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본의가 담긴 마력은 두 사람을 서늘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뜻은 명백했다.
'그만 나가지?'
아이반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의가 바르고 인상이 좋아 참 호감이 가는 릴리엔을 가엾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릴리엔이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제가 폐를 끼쳐서 어쩌지요?
살펴 가세요.”
저 맑고 깨끗한 사람을 이 능구렁이 눈앞에 홀로 두고 떠나야 하다니!
별일 없겠거니 생각하기에는 아까 본, 릴리엔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다미언의 행동이 곱씹을수록 묘했다. 속눈썹이 예쁘게 보이도록 눈까지 내려감은 모양이 참…….
'…오늘 내로 홀랑 잡아먹히 지나 않으면 다행 아닐까?'
아이반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거의 부부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좀 하겠다는데 버티고 있을 명분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쯤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 * *
방해꾼들이 퇴장한 뒤.
다미언은 릴리엔에게 정체 모를 음료를 권하며 말했다.
“마시지는 마세요.”
“네?”
“손님이 오셨을 때 음료를 대접하는 게 일반적이라 내놓기는 합니다만 그거 술이거든요."
“아.”
그래, 그랬지. 그런 예법이 있었다.
제국에서는 보통 상온 보관이 가능하고 도수가 약한 술을 대화의 에피타이저로 내놓는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준 술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술 대신에 차로 손님을 대접한다는 발상은 아직 제국 사람들에겐 일반적이 지는 않았다.
'일라시아와 솔라리아는 이제 완전히 차에 익숙해졌는데.’
그녀들을 비롯한 라니스터 후작가 그리고 은방울꽃 소로리티)의 아가씨들은 모두 차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차와 함께 먹을 간식을 매일 연구하느라 각 성 요리사들의 다과 만드는 솜씨가 일취월장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일라시아와 솔라리 아 자매를 만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레이디 릴리에?”
릴리엔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네. 전하. 색이 예뻐서 그만 무심코.”
“마음에 드신다니 안타깝네요.
회복 중이신 분께 술을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렇게 말하며 웃는 다미언의 눈빛은 다각도로 세공된 크리스털 잔에 담긴 분홍빛 액체보다 훨씬 더 휘황하게 빛났다.
"나중에 몸이 좀 나으시거든 같이 시도해 보도록 할까요. 이거 굉장히 달고…… 맛있거든요.”
"아, 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모를 일이다. 저 남자는 그저 술의 맛이 달다고 했을 뿐인데 왜 내 어깨에 소름이 돋는 걸까.
'추운가?'
역시 빨리 돌아가야겠다.
제 몸 상태도 걱정이었지만 이상하게 살가운 다미언의 태도가 더 곤혹스러웠다.
다미언의 냉대만 예상한 릴리에으로서는 이런 다정한 태도에는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잘해 주면 곤란한데. 내가 혹시 착각할지도 몰라…….’
릴리엔은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 남자는 릴리에에게 무관심하다고 작중 내내 강조되었던 그 '다미언 루펜바인'이다.
설마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거나할 리는 절대 없었다.
제후가의 아가씨로서 혹은 대가를 치르고 미래를 엿본 사람으로서.
릴리엔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까지는 감히 꿈꾸지 않았다. 그녀가 꿈꾸는 결혼 생활은 이상적 이면서도 아주 현실적이었다.
평생을 함께 경영할 파트너로서 남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예의를 다한다.
신의와 정절, 상식과 예의.
그 외에 그녀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모든게 망가지는 법이거든.'
씁쓸하게도 릴리엔은 이미 과욕의 결말을 보았다.
그러나 과욕만 부리지 않는다면 다미언은 릴리에이 바라는 것들을 줄 수 있는 괜찮은 남편감이었다.
'비록 사랑만큼은 주지 않겠지만.’
다행히 시작이 나쁘지는 않았 다.
예전과 다른 다미언의 태도를 보니 아마 자기를 구해 준 일로 릴리엔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갖게 된 것 같았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예의를 갖춰 서로를 친절히 대하고 신뢰에 기반을 둔 좋은 우정을 쌓은 부부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소중히 해서 연관된 수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트리는 일이 없게끔 하는 게 릴리에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래서 착각과 과욕을 금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다짐을 지키기가 어려워질지도 몰라.'
릴리엔은 바로 그 점이 두려웠다.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조금 전 제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네? 아, 네…."
정확히 그렇게 말했었나?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릴리엔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이라.'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게 맞겠지.
'내성으로 거처를 옮겨 달라고 하시려나?'
이건 부탁하지 않아도 오라버니께 말씀을 드리려고 한 문제이니까…….
그러나 이어진 다미언의 말은 릴리엔의 섣부른 예상을 와장창깼다.
“그럼 제 청혼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거처에 관해서도 사실 사죄를 드리려고……. 네?”
릴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잠깐 이해가 가질 않았다가 다시 머리가 맑아졌다.
“그러니까…….”
“청혼이요.”
“아, 네. 청혼.”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직후에 너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서 거의 잊고 말았다. 반쯤 잊어버린 이유는 바로,
'농담이나 그냥 해 본 말 같은 게 아니었어?'
릴리엔은 다미언이 진심으로 청혼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7년 전에 허혼 증서를 교환한 사이라 이미 부부나 다름없는데 그런 짓을 왜 한단 말인가?
릴리엔은 그 청혼이 농담이거나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자연스럽게 잊어버린 척하면 다시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