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죄송합니다만 대공 전하, 오래 전 저희 사이에 오간 혼담에 대해 튜린은 이미 허락의 뜻을 밝혔습니다. 또한 그에 따라 허혼증서를 교환한 줄로 압니다.
만…….”
열두 살, 고사리 손으로 증서에 서명을 했던 기억이 분명했다.
"네, 그랬지요.”
다미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혼은 우리 당사자의 일이잖아요. 아가씨의 뜻을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릴리엔은 곤혹스럽게 웃었다.
“7년이나 시간이 흘렀는데도요?”
“예, 7년 전에 아가씨께선 열두살이셨지요.”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는 릴리엔에게 다미언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는 당시 열일곱이었고 사리를 분별할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살은 결혼을 결정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하, 저는 열두 살 그때도 튜린 선제후의 신하이자 이슬라르의 일원이었습니다. 튜린의 뜻이 바로 제 뜻입니다.”
여느 아가씨라기보다 충직한 가신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다미언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잘 알겠습니다만 아가씨,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문하세요.”
“튜린 선제후의 뜻이 아가씨의 뜻이라 하셨지요. 허면 만약 선제후께서 내일이라도 파혼의 뜻을 밝히면 아가씨의 뜻도 그렇게 되는 겁니까?”
릴리엔은 조금 당황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약의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지요.”
다미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 물러날 태세는 아니었다.
릴리엔은 조금 생각한 후 정직하게 굴자고 마음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올곧게 그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튜린의 딸입니다. 제 아버지와 오라비가 이 땅을 수호하는 데 목숨을 바쳤고 또 목숨을 바칠 대가로 자격 없이 안락한 삶을 누렸습니다. 튜린을 위한 결혼은 제 의무입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정론.
다미언은 조금 생각하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그 눈빛에 더 이상 웃음기는 없었다.
“이 결혼은 전적으로 튜린의 결정이기만 합니까?”
“……?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릴리엔은 성격대로 성실하게 답했다.
“제 평생을 함께할 유대 관계입니다. 저도 몇 가지를 고려하기는 했습니다.”
“평생을 함께할 유대 관계라.”
어쩐지 날카로워졌던 다미언의 기세가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착각일까?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깊게 생각해 볼 틈 없이 다미언이 곧바로 물었다.
“실례지만 어떤 면을 고려하셨는지?”
“전하께서 아랫것들에게 손찌검을 하시는 분은 아니란 평판을 들었습니다. 우연히요.”
"음, 그리고요?”
“네?”
릴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 고요?'라니. 의아해하는 릴리엔을 보며 다미언이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아가씨, 그게 다입니까?"
"음……,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께서 결혼할 남편을 고른 조건이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가 다냐고 여쭈었습니다."
아하. 릴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손찌검뿐아니라 몇 가지 바라는 게 있기는 했어요.”
“듣고 싶군요.”
다미언은 튜린의 릴리에이 아닌 릴리에 이슬라르가 결혼을 결정한 이유, 다미언 루펜바인을 승낙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릴리엔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미언의 말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이건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한 사전 정보 교환인 건가 봐.’
응, 사전 정보 고지는 중요하지.
릴리엔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지금까지보다 더 성실한 자세로 질문에 응했다.
“도박에는 취미가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친지와 가볍게 즐기기 위한 성격의 게임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조금 위험한 부분에 한해서요.”
“또.”
“…… 외도를 하더라도 사생아는 만들지 않는 것?”
갑자기 다미언의 기세가 다시 무시무시해졌다. 의아해하는 릴리엔에게 그가 재차 확인했다.
“그럼 설마 아가씨께서도 같은 조건을 지킬 예정이십니까?”
“네?”
그렇게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릴리엔은 즉석에서 생각해 보았다.
손찌검은 일단 무리였다. 그녀의 팔 힘에는 모기나 죽어 줄까.
건장한 사내를 후려쳐서는 기분만 내고 말 것이다.
'도박도 굳이 할 필요성을 모르겠고 사생아도 만들 생각 없고.'
앞으로 생길 아이의 불행한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다. 가슴이 아팠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미리 후회했다.
그런 미래를 살지 않겠다고 다 짐했다. 새로운 불행 요소를 더해 줄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릴리엔은 대답했다.
"네, 저도 같은 조건을 지킬 예정입니다.”
다미언의 침묵이 길었다. 릴리 엔은 슬슬 그가 흘리는 무형의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미언은 정말 기분이 안 좋아진 모양인데 릴리엔은 원인이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전하……? 제가 혹시 실언이라도…….”
“같은 조건을 지키신다는 것은…….”
다미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좀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가씨께서 외도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뜻인가요?”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릴리엔은 놀랐다. 잠시 후 릴리에이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요, 저는 애인들을 거느릴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이야 바뀔 수 있다고 쳐도 그럴 체력이 없을 거다. 릴리에의 깔끔한 확언에 다미언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저 전하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저희 결혼은 정략(政略)이니까요.”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릴리 엔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한 눈매에 고여 있어서 언뜻보면 잘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릴리엔의 눈은 빙하처럼 깊고 차갑고 깨끗했다.
그 오라비인 세드릭의 것과 꼭 마찬가지였다.
'핏줄이라 이건가.'
눈을 보아하니 남편의 바람기를 존중하겠다고 말한 건 한 점 거짓도 없는 진심인 게 분명했다.
'서 있는 출발선 자체가 다른거지.’
“존중하지 말아요."
“예?”
"난 존중받고 싶지 않거든요.”
예상 밖의 말이었다.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릴리에에게 다미언이 언뜻 친절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정략이라 해도 결혼은 결혼.
원래 결혼의 가장 큰 적은 외도인 법이잖아요?”
잘 아는 척 얘기하는 데 비해 사실 다미언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았다.
이도엘이 죽고 클로드가 황제가 되고 태후가 되어야 할 큰형수가 다시 황후가 된 상황을 통해 배운 것들이 좀 있을 뿐이었다.
"그…….”
“정략이라면 더욱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겠죠. 저희 결합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렸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몇 마디 대화에 릴리엔을 간파한 다미언은 릴리에이 반박하지 못할 구석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렇군요.”
예상대로 릴리엔은 납득했다.
다미언은 계획대로라는 생각에 싱긋 웃었다.
“한데 마침 아가씨께서도 외도에 대해 뜻이 없으시고 저도 전혀 없으니, 차라리 저희 결혼 생활에서 한눈을 파는 건 일절 없는 것으로 조건을 바꾸면 어떨까요?”
"네……?”
"흠, 어떻게 증명한담? 아, 혼전계약서에 제가 바람을 피우면 아가씨께 재산의 절반을 양도하겠다는 문구를 추가할까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어리둥절한 릴리엔이었지만 다 미언은 모른 척 상황을 조목조목정리할 뿐이었다.
“그럼 저는 이로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도박을 하지 않으며 바람 자체를 피우지 않으니 사생아를 만들 일도 없는 남편감이 된 것이로군요.”
"네…그러네요.”
“그럼 아가씨의 없는 거나 다름없는 기준을 통과할 많은 남자 중에 현재로서는 제 조건이 가장 우월하지요.?"
'없는 거나 다름없는' 이라는 말에 들어간 강세가 심상찮았다.
릴리엔은 흐드러지게 웃는 다미언의 미모와 기묘한 박력에 밀려 거의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네, 그렇기는 합니다.
“좋아요.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만족할게요.”
다미언의 말투는 다정하고 나른했지만 릴리엔은 왠지 이 남자가 위험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수틀리면 그녀에게 화를 내거나 거칠게 대할 것 같아서 무서운건 아니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남자에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이런 면에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눈치 없는 릴리에도 다미언과 단둘이 남는 건 앞으로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자, 이제 아가씨께선 이만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마침 다미언이 그런 릴리엔의 내심을 읽은 것처럼 제안했다.
릴리엔은 무언가 미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미언이 워낙 대화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데려다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폐를 끼칠 생각도 없었기에 릴리엔은 실망하지 않았다. 다미언은 그런 릴리 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네, 쉬십시오.”
“다음에 또.”
탁, 릴리에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다미언은 잠시 그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떼었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된 목재가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웬만한 힘으로는 흠집조차 내기 어려운 단단한 목재로 만든 책상 한 귀퉁이가 과자처럼 으스러져 있었다. 다미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가루를 털어 냈다.
손톱만큼 검게 물든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