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위험했지…….’
위험했다.
릴리엔과 마주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복도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속에서 한없이 가볍고 느릿한 릴리에의 기척을 구분해 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다미언의 안에서 서서히 흉험한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
당장 저 맹하고 깨끗해 보이는 여자를 낚아채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볼 수조차 없는 장소에 릴리 엔을 가둬 두고 그 옆에 있고 싶었다.
평생에 처음 느껴 보는 거칠고 사나운 욕구에 다미언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게다가 마력이 그의 욕심에 반응하는 바람에 다미언은 릴리엔에게서 아주 옅게 묻어나는 약초연기의 향기와 햇볕에 마른 돌같은 부드러운 체취를 맡을 수도 있었다.
릴리엔과 처음 접촉했던 날 그녀의 손에 마구 머리를 부비고 싶고 애교 많은 고양이처럼 굴고 싶었던 욕심과는 격이 달랐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세드릭이 은근히 방해하는 통에 얼굴을 못 본 사이 다미언은 릴리엔이 보고 싶긴 했다.
최초의 접촉 이후 시일이 흐를 수록 예전의 고통이 살아나고 있었다. 다미언의 몸은 서서히 그때 느꼈던 안식을, 강렬한 쾌감을 주었던 안식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맹세컨대 릴리엔을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제 온몸의 피가 이토록 끓어오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대체 왜?’
온몸이, 혈관을 누비는 피 한방울조차 릴리엔을 원하는 것 같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피했을 것이다. 릴리에에게는 그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다미언이 생각하기에 전쟁 영웅과 살인귀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물며 그는 살인귀 이전에 괴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릴리엔은 그와 결혼하려 할까?
제국법은 이혼에 아주 관대했다. 따라서 다미언은 가능하면 평생 그 사실을 숨길 예정이었다.
어디까지나 티어 하이, 그중에서 좀 특출 난 천재. 딱 그 정도.
그 이상은 알게 하지 않을 것이다.
릴리에이 그를 떠나야겠다고 행여나 마음먹어서는 안 되니까.
손끝에서 익숙한 작열감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미언은 주먹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쥐었다.
이 고통은 릴리에에게 닿기만 하면 사라지겠지만 과연 닿기만 하고 끝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빗장이 풀린 것만 같았다. 그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인내심이란 성이 마치 무너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성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다미언은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은 그가 마음 놓고 괴물이 되어도 괜찮은 장소가 아니었다.
* * *
릴리엔이 내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나서 잠시 후.
“모시러 왔습니다, 아가씨.”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건 무덤덤한 표정이 꼭 닮은 알렌과 리타 헤이워스 남매였다.
딱 걸린 셈이었지만 감탄이 앞섰다.
“나름 몰래 나온다고 나온 건데 이렇게 빨리 발견될 줄 몰랐어요. 대단하시네요."
“대단치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굳이 몰래 가실 만 한 곳이 많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긴 그것도 그랬다.
“그나저나 경께서 직접 저를 찾으셨다는 건...…."
“예, 가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역시나.”
비보를 전하는 쪽이나 전해 듣는 쪽이나 태도가 깔끔하고 산뜻했다.
“가시지요.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머, 오늘은 좀 한가하신가 봐요?”
“그럴 리가요. 이제 막 농번기가 끝난 시점 아닙니까. 시설 보수며 징세 문제로 오늘도 변함없이 공사가 다망하십니다.”
그런데도 여동생을 기다릴 시간이 있는 게 바로 세드릭이란 남자였다.
“오히려 직접 찾으러 가겠다고 하시는 걸 말리느라 고생이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가씨께도.”
“그야…….”
지난 7년 동안 선대 헤멘린나 대제후와 함께 팔불출계의 양대 산맥으로 이름을 날린 세드릭이었다.
“아가씨께는 일정에 관계없이 언제든 튜린 선제후를 알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일정과 관계없이 저를 혼내는 일이 급하시단 소리로 들리는군요.”
대화가 여기까지 오면 대개 무표정한 알렌의 입가에도 한 줄기 가느다란 미소가 맺히곤 했다.
“역시 영민하십니다."
“많이 혼내실까요?”
“글쎄요. 혼을 내시기보다는 시무룩해하시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게 더 무섭네요.”
시무룩한 오라버니만큼 이기기 곤란한 상대는 없었다. 한숨이 나왔지만 릴리엔은 곧 결단했다.
“그래요, 갑시다.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을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순 없으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실 겁니다.”
그러나 집무실에서 릴리엔을 맞이한 세드릭은 다른 의미로 심각한 주제를 꺼냈다.
“릴리야, 네 결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떻겠느냐?”
“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라니?
“오라버니, 저희는 이미…"
“7년 전에 이미 허혼 증서를 교환했지. 그래, 혼인 무효가 가능한 시기는 지났어. 하지만 이혼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잠시만요, 오라버니.”
릴리엔은 성급하게 구는 세드릭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물었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당황스럽네요.
무언가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잠시 고민하던 세드릭이 책상 서랍에서 처음 보는 봉투 하나를 꺼냈다.
“황실에서 네게 초대장을 보냈다. 이번 대화의 기간 중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해 달라고 하더구나.”
발신인은 레이첼 우드 부인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레이첼 부인은 클로드 황제의 책사인 동시에 정부였다.
세드릭과 릴리엔의 아버지, 전 튜린 선제후를 암살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클로드 황제가 정치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가장 신뢰하고 총애하는 인물.
남편의 동생과 재혼한 황후가 세간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칩거하는 동안 수도 사교계는 레이첼부인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클로드 황제 치하에서 무서울게 없고 못 가질 것도 없는 여자. 그런 거물이 릴리엔을 지목해서 초대한 이유는 명백했다.
릴리엔이 표적이 되고 만 거였다.
“소로리티 사건 이후 블란쳇 공작은 대제후를 배신했다. 하지만 간이 작은 남자라 여태 중요한 정보를 흘리지는 못했지. 내 생각엔 아무래도 그가 용기를 낸 것 같구나.”
결코 용기를 칭찬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세드릭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 정략을 받아들일 때는, 인정한다. 그때는 여기까지 생각지 않았어.”
클로드 루펜바인의 황위 찬탈 사태가 이렇게까지 장기화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결국 헤멘린나 대제후가 시간과의 싸움에서 먼저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미언이 대제후의 짐을 떠맡음으로서 황태자파를 떠받치는 유일한 기둥이 되고 말았다.
세드릭은 창가에 설치된, 릴리 엔과 두다 만 채 그대로 놓여 있는 체스판 앞에 섰다.
“봐라, 릴리. 황태자는 체스의 킹이다. 그를 잃으면 게임은 끝나지만 동시에 가장 연약한 말이기도 하지.”
세드릭이 체스판에서 가장 강력한 기물, 퀸을 들어 킹 앞에 놓았다.
“그동안 우리는 두 퀸을 가지고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룰 외의 사태로 퀸 하나를 잃고 말았어."
릴리엔은 그것이 선대 헤멘린나 선제후의 이야기임을 얼른 알아들었다.
“이제 적이 게임을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남았다. 킹을 직접 잡던가 혹은…….”
“……남은 퀸을 쓰러트리고 무력해진 킹을 사로잡겠죠.”
“정답이다.”
블란쳇 공작의 활약으로 튜린과 황태자파의 결혼 동맹은 이미 알려지고 말았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언제든지 튜린을 제압할 수 있는 마도 터널마저 사라진 상황이었다. 곧 황제 쪽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다.
이렇게 된 이상, 동맹을 이간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릴리엔과다미언의 결혼을 깨는 것뿐이었다.
릴리엔은 침착하게 심산했다.
'이미 가주를 죽였는데 그 딸을 죽이는 일은 어렵지도 않겠지.'
테이블을 잡은 세드릭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라버니, 제 결혼이 단순한 결혼이 아니었듯 이혼 역시 단순한 이혼이 되지 못할 거예요.”
7년을 함께한 동맹에 선전포고를 보내는 셈이었다. 릴리엔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았다.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
그렇게 됐을 때 과연 승자는 자신을 배신한 튜린을 용서할 것인가?
조금 전 다미언은 물었다.
세드릭의 뜻이 릴리엔의 뜻인가.
세드릭이 파혼을 원하면 릴리에도 같은 것을 원하게 되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재미있게도 상황은 정 반대가 되고 말았다.
“오라버니.”
그 단 한마디에서 세드릭은 릴리엔의 거절을 읽어 냈다.
“릴리, 제발.”
세드릭이 마른세수를 하며 등을 돌렸다.
“안 돼, 안 된다. 이건 네가 뭐라고 하든 용납할 수 없어.”
“충성스럽고 어느 정도 고집스럽고 융통성은 부족하고, 그런만큼 청렴하고 올곧은 게 튜린 사람의 품성이라고들 말하죠.”
“....."
답답하리만치 고지식하게 구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넌더리를 내며 '자네 혹시 부모가 튜린 출신인가?' 하고 물었다. 유명한 제국식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비록 저는 이슬라르를 떠나 튜린 출신이 아닐 아이를 낳게 되겠지만 제 심장은 튜린에서 태어났어요.”
충성스럽고 어느 정도 고집스러우며 융통성은 부족하다. 정직을 넘어선 우직함, 깨끗함을 넘어선 결벽.
“튜린 사람은 비겁하게 일신의 안위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릴리엔 이슬라르!”
“그리 못 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튜린의 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