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처음으로 버럭 내지른 고함에도 흔들리지 않는 릴리엔의 눈빛을 보며 세드릭은 직감했다.
'꺾을 수 없겠구나.'
세드릭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혼돈과 두려움이 젊은 가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노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던 절 박함이 마침내 언어로 흘러나왔다.
“너를 잃을 수는 없어.”
“그러니 저를 보내셔야죠.”
릴리엔은 부드럽게 웃으면서도 단호했다.
“오라버니께서도 아시잖아요. 저는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급받아야 이 실낱같은 삶이라도 이어갈 수 있어요.”
“한데 이제는 오라버니도 저를 도와주실 수 없고 오직 그분뿐이에요. 결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세드릭이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쇼는 마력의 기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의사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아뇨, 못해요.”
아이처럼 억지를 써 봤자 되돌아오는 건 일관되게 상냥하고 단호한 결론뿐이었다.
세드릭은 신음 소리를 내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릴리엔은 가엾은 오라버니를 토닥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 할게요.”
“대공비가 되어 뭇 사람의 존경을 받고 대공이 될 아이를 낳아그 아이에게서 손자를 볼 때까지 살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요.”
세드릭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릴리에이 미안한 듯 웃으며 물었다.
“안 되나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지금 네 뜻은 못 꺾으실 것 같구나.”
“청출어람인 셈이죠.”
“네가 죽으면 이 세상을 용서하지 않을 테다.”
서로 닮은 두 쌍의 푸른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잘 살게요.”
이 순간에 결국 릴리에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세상의 수많은 신부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고작 그 정도가 다였다.
* * *
대화의(大和議).
사병을 거느리고 각자의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성주들에게 제국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행사.
군사, 안보, 상업, 농업, 법률, 정치, 조세 및 구휼까지. 한데 모인 통치자들은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때로는 학자들을 초빙했으며 협의 하고 계약을 하며 밀약을 맺었다.
통치자들이 재력과 세를 과시하며 정보를 얻고 이득을 취하기 위한 정치적 싸움의 최전방.
7은 완전수이며 신성시되는 숫자였다. 하여 이번 화의는 특히 클로드 1세의 즉위 7년을 기념하여 대단히 화려하게 치러질 예정이기도 했다.
세드릭도 릴리에도 다미언도 마테오도, 모두가 참석 대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판인가.'
태자 마테오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랬다. 그는 그저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제 위를 빼앗겼다.
어머니는 숙부의 아내가 되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소년은 철저하게 무력한 상태로 존재했다.
빼앗기고 빼앗겼다. 무엇 하나 막을 수 없었다.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본디 자애롭고 공정한 선황의 황태자로 태어났다.
맏아들이었고 어머니인 황후가 몸이 약해 그 하나만을 겨우 얻고 일찍 단산하였으므로 외아들이기도 했다.
마테오는 태어난 순간부터 황태자였고 부황을 잇기에 모자람 없는 사람이 되는 것만이 목표인 순진한 소년이었다.
온 제도가 그 귀한 외아들을 칭송했다. 작은 성과에도 총명하고 재능이 있다는 찬사가 뒤따랐다.
심지어 그는 “독불장군으로 자라지 않으셨다.”며 칭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최소한의 예를 지키기만 해도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호시절은 다 갔다. 다 미언의 보호하에서 올곧았던 소년은 냉소를 배웠다.
순진했던 어린 시절 “좋은 황제가 되겠다.”며 약속했던 기억을 비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황제가 되리라 확신할 수 있었던 걸까.'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황제가 된다?
웃기는 착각이었다. 그는 황제인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 가치도 없는 성가시고 무력한 어린 아이였을 뿐이다.
사춘기 때는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조금 아프게 배운다. 마테오는 남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그 사실을 배우는 7년을 보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지만 그 럴 수가 없었다.
“천지 분간을 못해도 정도가 있으시오! 이 나라가 망했소? 황태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창 반항하기 시작했다지만 증손자였다.
참담한 일을 겪었으니 안타까이 싸고돌아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대제후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불벼락을 내렸다.
물론 머리가 굵어진 태자도 가만있지만은 않았다.
"부황께서 돌아가셨는데 제가 어찌 태자입니까!”
"에라이, 클로드 루펜바인보다 못한 놈아!”
"지금 말 다하셨……."
"다 못 했다. 이 멍청한 놈아!”
대제후의 안광에서 노기가 줄기 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흠칫 질려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인의예지를 모르는 그 패륜아도 제 욕심에 죽인 목숨이 천을 넘진 않았다. 한데 네놈은 너 하나 편해지자고 네놈에게 걸린 수만 명의 생목숨을 모조리 끌고 사지로 들어가겠다는 개소리를 지껄여? 대가리에 무슨 망조가 들었기에 그 모양이야!”
소년이 희게 질렸는데도 노인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귀한 핏줄로 태어나 누리고 살았으면 길바닥에서 빌어먹지 않은 값을 할 생각을 해야지……."
지팡이가 쿵! 하고 바닥을 찍었다.
"정 죽으려거든 황제가 되고 나서 후계자를 정하고 죽어라.”
그 매정한 증조부도 돌아가신 지금, 마테오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인쇄술이 발전했다고는 하나 장서는 여전히 사치품에 속했다.
특히나 튜린 성의 도서관에는 보석을 박거나 금분으로 삽화를 그린 책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녔기 때문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여기라면…… 잠시 쉴 수 있겠지.’
하지만 선객이 있었다.
흰 옷자락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척봐도 값진 책이 몇 권이고 나뒹굴고 있었다.
서가 사이와 창틀 턱 밑, 조그만 빈 공간이었다. 굳이 사람을 피해 들어와야 발견할 수 있는 외진 공간이었다.
릴리엔은 거기에 담요 하나를 아무렇게나 깔고 앉아 있었다.
‘보살핌을 받고 있는 연약한 아가씨답진 않은데…….’
발치에 빛보다도 온기가 목적인 듯한 등불 하나가 덜렁 놓여 있을 뿐인 걸 보니 마테오도 슬슬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숨어 계셨군요.”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릴리엔은 멋쩍지도 않은지 부드럽게 웃으며 권했다.
“앉으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녀도 마테오가 공범자라는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혼자 있는 릴리엔을 발견한 이상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날 순없었다. 마테오는 매너를 뼛속까지 스며들게끔 익힌 소년이었다.
'그나저나 몸이 상당히 약하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얇은 담요 하나만 깔고 그냥 있어도 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릴리에이 작게 기침을 했다. 마테오는 깨달았다.
'안 되는구나.'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릴리엔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마테오는 그 웃는 낮에 담긴 말없는 거절을 읽었다.
싫다는 사람을 구태여 설득할 기운도 없었다. 마테오는 한숨을 쉬며 옷을 벗어 릴리에에게 둘러주었다.
보살핌에 익숙한지 릴리엔은 거절하거나 과하게 호들갑을 떨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마테오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사양에 거듭 친절하게 굴 심력이 없던 마테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번 대화의 때 데뷔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그럴 예정이에요.”
릴리엔이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이번 일을 기회로 삼기로 결정 했습니다. 같은 소로리티 또래들은 거의 다들 데뷔를 해서 저는 늦었다는 소리를 듣는 축이거든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숨어 계셔도 됩니까?”
여자 일생에서 결혼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게 데뷔였다. 마테오가 모르긴 몰라도 할 일이 많을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엔은 태평하기만 했다.
“음……, 안 되니까 굳이 숨어 있었겠죠?”
어깨를 으쓱하더니 배시시 웃는다. 마테오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곧이어 풋 하고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 하하. 정말 대단하시네요."
최근 들어 웃을 기회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었기 때문일까. 이리 실없게 웃는 게 실례일 줄 알면서도 웃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릴리엔은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마테오는 그런 릴리엔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청했다.
“저도 같이 숨어 있어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이미 제 공범이 되어 주신 것 아니셨나요?”
되묻는 말투에 한 번 더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