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좀 더 편하게 자리를 잡고 마테오는 릴리엔이 아무렇게나 흩어 놓은 장서를 들춰보았다.
매끄러운 가죽 장정이 세월을 덧입어 짙어져 있었다. 내용은 무슨 취향인지 알 수 없는 서사시였다.
마테오가 금실로 수놓은 깔끄러운 제목을 의미 없이 쓰다듬는 동안 릴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불쑥 이렇게 사과했다.
“화의의 초대장 때문에 번거로 우신 것 같아 송구합니다.”
아픈 릴리에이 갑작스럽게 데뷔준비를 하느라 바빠진 것은 대화의 기간에 정식으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화의 기간 중에는 황실이 공식적으로 주최하는 두 번의 회합과 다섯 번의 연회를 포함하여 수많은 모임이 있었다.
그 아귀다툼 한복판에서 혹시라도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황후 대신 황제의 공식 정부 레이첼 부인이 주최자가 되기까지 했다.
여태까지도 황후 대신 레이첼부인이 온갖 실무를 다 도맡긴 했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7주년 대화의에!
남편의 동생에게 재가하여 황후 자리는 지켰지만 정부에게 밀려고전하는 황후는 공공연하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신문에는 연일 뻔뻔스레 제 세상인 양 활개를 치는 레이첼 부인에 대한 기사가 올랐다.
이런 자극적인 소재 덕분에 이번 화의는 역대급으로 인파와 이 목이 몰릴 예정이었다.
혼잡하고 사람 많은 곳에 릴리 엔은 대공의 정혼자로서 자신을 처음 소개하게 되었다.
마테오는 그것이 꼭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애꿎게 말려든거나 마찬가지인 릴리에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그때 릴리엔이 이렇게 물었다.
“전하의 잘못인가요?”
“네.”
마테오는 망설임 없이 수긍했다. 릴리에이 “흥미롭군요.” 하며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레이첼 부인 대신 초청장을 쓰셨나요?”
“예?”
“아니면 이 초대장의 우아한 서 명을 대필해 주신 건가요?”
"아니, 그건.”
“그도 아니면 제 아버지를 암살하셨나요?”
너무도 엄청난 말에 마테오는 대꾸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릴리엔은 그저 대책 없고 느긋하기만 했다. 그녀는 벽에 기대 놓았던 새하얀 담뱃대를 들었다.
“앞서 양해해 주셨으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 예. 부디…….”
잇새로 부리를 물고 숨을 들이 마시자 바로 불이 붙는 걸 보니 보통 담뱃대가 아닌 것 같았다.
잘 마른 향긋한 장작을 태우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냄새가 퍼졌다.
연기를 내쉬면서 릴리엔이 충고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에 사과하지 마세요.”
“집안 꼴이 이 모양인지라…….”
“그러니까 전하의 잘못이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아니시잖아요?”
마테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주제에 너무 다정했다. 하지만 이 선량함에 기댈 수는 없었다. 염치없는 짓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아가씨, 전 순진했습니다. 순진한 건 죄입니다."
“그럼 전하의 아버님이신 선황께서도 순진하셨나요?"
아버지.
마테오는 일시에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숨까지도.
확실히 부황은 선량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네 아비가 마냥 선량해서 기를 써서 다미언을 그런 위치에 올려놓았을까?”
소년은 혀를 차던 증조부를 떠올렸다.
"알았던 게지. 다미언 루펜바인은 황위에 요만치도 미련이 없으며 제 피를 이은 자식이라면 어지간히는 지켜 주리란 걸 알고 한 짓인 거야.”
부황은 알고 있었다. 자비를 베푸는 동시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심정으로 소년은 묵묵히 고개만 저었다. 릴리 엔이 흰 연기를 베일처럼 드리운 채 조금 웃었다.
“제 아버지도 아니셨어요.”
선대 튜린 선제후도 알았다. 어느 편을 택하는 것은 다른 편의 적이 된다는 의미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튜린 사람이었다. 이도엘에 대한 충의를 택했고 클로드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까………. 릴리에이 연기를 내쉬며 분명하게 밝혀 두었다.
“저는 전하 때문에 제 아버지를 잃은 게 아닙니다. 전하와 같은 이유로 아버지를 잃은 겁니다.”
마테오는 충격을 받았다. 단 한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예요.”
릴리엔은 자기 견해를 받아들이라고 강권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읊조릴 뿐이었다.
“아버지는 존경할 만한 분이셨습니다. 물론, 선황께서도 그러하셨겠지만.”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억지로 결혼을 하지도 부모님을 잃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마테오는 릴리엔이 그렇게 그를 원망해도 할 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리엔은 마테오와 자신이 같은 슬픔을 겪었다고 인정해 주었다.
아무 원망도 하지 않고서.
소년은 이런 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저, 는, 그게.”
볼썽사납게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흘렀다는 수준이 아니라 숨까지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센 울음이었다.
“죄, 송, 꼴사납, 흐윽, 게….”
“우셔도 돼요. 울 일은 울어야지 끝이 나요.”
릴리엔은 태자를 위로하거나,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닦아주진 않았다. 그저 자분자분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저도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앞으로 제게 일어날 일들이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더 컸습니다.”
마테오 역시 꼭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이기적인 자신이 끔찍하다고 이날 이때까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선량해 보이는 릴리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사실이 다정한 손길보다 더 깊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위로가 되었다.
“고통에 자책을 더하진 마세요.
안 그래도 괴롭잖아요.”
“노력, 할, 하겠습니다.”
“그거 기쁘네요.”
릴리에이 나른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일순 그 표정이 대단히 묘해서 마테오는 멈칫하고 말았다.
'어, 이건 좀…….’
뭐가 어떻다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본능에 따라 얼굴이 확 붉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아가씨.”
기척 없이 불쑥 들려온 목소리.
마테오는 어느새 드리운 긴 그림자를 뒤늦게 눈치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서가에 팔을 얹고 이쪽으로 고개를 숙인.
“삼촌.”
다미언 루펜바인이 있었다.
역광 탓에 그의 백금발에 왕관같이 빛나는 외곽선이 그려져 있었다. 눈매가 곱게 휘어져 있는 걸 보니 웃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마테오는 다미언에게서 왠지 모르게 적대감을 느꼈다.
은빛 면도날 같은 웃음을 베어 문 채 다미언이 마테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테오는 알아차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다미언이 영역 표시를 하는 맹수처럼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너는 지금 내가 그어 둔 선을 넘었으니 물러가라고.
두 번은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테오와 다미언은 본디 삼촌과 조카라기보다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을 두고 다투는 형제나 악우 같은 사이였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테오에게는 가족이었다. 이런 적대감을 마주한건 처음이었다. 원인은 명백했다.
'릴리에 이슬라르.'
다미언은 마테오가 그녀에게 접근하길 원하지 않는다.
오해한 거라고 추호도 삿된 마음을 품지는 않았다고 항변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하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부정을 들킨 것처럼 초조해졌고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테오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릴리엔은 숙모가 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미언이 눈치챘다.
세 가지 깨달음 중에서 하나라도 충격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마테오는 꽝꽝 얼어붙고 말았다.
소년에게는 아닌 척해도 은근히 다미언과 자신을 비교해 보는 습관이 있었다.
다미언이 들으면 어처구니없어하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소년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사실 마테오는 다미언의 비밀에 대해 잘 몰랐다.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갈 정도로 입단속이 철저했던 탓이다.
어린 태자가 아는 건 그저 곱지 않은 인성과 반비례하듯 삼촌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고 살아 있음에도 전설로 회자될 정도로 고강한 일신의 무력을 소유했다는 것뿐이었다.
태자는 냉철하게 스스로를 평했다.
'나 같은 십 대 소년으로서는 부러워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조건이지.’
'저 인간은 인성이 처참하잖아'
하고 스스로를 달래 보는 것도 얼마 못 가곤 했다.
왜냐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무엇에게도 연연하지 않는 개망나니 같은 태도마저도…….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멋있어 보일 때도 있었으니까, 젠장.'
선황이 가르쳐 준 대로 예의바르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사는 게 싫다는 건 아니었다. 다미언처럼 살고 싶다는 뜻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테오로서는 흉내조차 못 낼 파격적인 삶의 모습이 가끔씩 멋있다고 생각되는 것까지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자로서 전혀 승산이 없다고 여겨지는 상대.
릴리엔은 그런 사람의 정혼자였다.
그런데 자신은 릴리엔 앞에서 질질 짜기까지 했다. 게다가 저 요물이나 다름없게 눈치 빠른 다 미언이 마테오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몰라봤을 리는 없었다.
자존심 강한 소년은 말도 못하게 창피해졌다.
왠지 릴리엔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서 마테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일어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행여나 릴리엔이 그를 배웅하러 불편한 몸을 일으킬까 봐 그리고 일어난 릴리에의 눈높이가 자신보다 위에 있을까 봐, 혹시나 자존심이 상한 얼굴빛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을까 봐.
여러 가지 이유로 소년은 릴리 엔에게 제대로 얼굴을 보여 주지도 않고 쌩하니 떠나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