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살펴 가셔야 할 텐데…"
남겨진 릴리에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다미언이 “그럴 겁니다.” 하고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순식간에 둘만 남겨졌다. 릴리 엔은 문득 궁금해졌다.
“전하, 어떻게 여길 오셨습니까?”
“글쎄요. 혹시 제가 단란한 시간에 방해가 되었습니까?”
여상하게 되묻는 말 속에 의미심장하고 불온한 기색이 넘실거렸다.
“아닙니다.”
그러나 선택적으로 눈치가 없는 편인 릴리엔은 그저 선선히 질문에 대답할 뿐이었다.
“보셨다시피 전하께서 두 번째 불청객이십니다.”
"흐음.”
눈치가 없는데도 다미언이 원하는 대답만 콕 집어서 해 준다는 게 재미있는 점이었다.
속셈이라곤 전혀 없이 깨끗한 릴리엔의 낯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미언이 불쑥 물었다.
“튜린 후께서 제게 사과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셨나요?”
“아니요, 오라버니께서 사과하셨나요?”
“예, 아주 정중하게. 내성으로 거처를 옮기라고도 하시더군요.
아가씨께서 힘을 쓰셨겠거니 생각했습니다만.”
“오라버니께서 저를 귀애하시는 고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만 튜린 선제후께서는 터무니없는 일을 여동생의 청이라고 그저 가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하…….”
언뜻 들어서는 겸손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결국 자기 오빠 자랑이었다.
“애초에 저는 일개 가솔. 제후이신 가주께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할 처지가 못 된답니다.”
'아니던데.’ ……라고 생각했지만 릴리엔의 순진무구해 보이는 낮에다 대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말하기란 천하의 다미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하께 사과를 하셨다면 그건 전적으로 가주님의 결정이셨을 겁니다.”
눈치 없는 릴리엔은 뿌듯하게 말을 마칠 뿐이었다. 그러고선
“납득하셨지요?”
하고 묻듯 다미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까지 했다.
“음…….”
은근한 기대를 품은 눈빛에 웬만한 상황에서는 뻔뻔할 수 있는 다미언마저도 슬쩍 눈을 피하고 말았다.
머릿속에서는 세드릭이 날린 경고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누이를 내드리는 것은 이슬라르에서 제일가는 보물을 전하께 드리는 겁니다.”
적어도 자기 심중에서는 그렇다면서 세드릭은 당당하게 협박까지 했다.
"그 아이의 머리털 끝 하나 상하는 일 없어야 합니다. 제 동생, 릴리에 이슬라르의 안전이 곧 튜린의 협력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거참.’ 다미언은 내심 혀를 찼다. 오빠와 여동생의 생각이 참……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릴리엔이 오빠의 애정을 과소평가하는 데 굳이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남매간의 우애가 지금보다 더 깊어져서 득 될 게 없잖아?'
다미언 루펜바인은 교활했다.
릴리엔은 튜린과의 동맹의 증표였다. 형태는 결혼 동맹이되 어느 정도는 인질로서의 성격도 있었다.
그러니 세드릭이 릴리엔을 그토록 아낀다는 건 오히려 반가운 일이 되어야 했다. 인질의 가치가 올라가는 거니까.
‘하지만 상황이 좀 달라졌거든..'
지금은 오히려 다미언에게 릴리 엔이 필요했다.
…다소 절대적으로.
바닥에 내려놓은 담뱃대에서 가늘게 올라오는 연기를 베일처럼 두른 채, 릴리엔은 다미언이 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는지 영문을 모르고 그저 앉아 있었다.
다미언은 태연한 척 웃으며 생각했다.
"아마 내 속을 조금이라도 알아챈다면 저토록 한가하지는 못할 텐데.”
다미언의 자제력은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의 위험성을 자각한 순간부터 릴리엔을 피하기는 했으나 그건 오히려 붕괴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무엇을 원인이라고 짚어야 할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폐허나 다름없었던 그의 정신세계를 작살내 놓은 빌어먹을 고대 병기 자그레브의 탓인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 버리고 만 릴리엔 탓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저 날 때부터 괴물이었던 내 탓일 수도 있고.’
중요하진 않았다.
지금 다미언이 릴리엔을 자진해서 찾아온 건, 이대로 반 미쳐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성이 남아 있을 때 릴리엔과 적절한 선에서 접촉을 시도해서 스스로를 달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릴리엔을 찾는 데는 많은 수고를 들일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마력이 '릴리에 이슬라르'를 원하는 주인의 의지에 충분히 감응하고 있었으니까.
갈망이 첨예한 나침반이 된 셈이다. 릴리엔을 찾는 데 다미언이 들인 수고라곤 벽을 부수거나 창문을 뛰어넘는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이동하지 않고 인간이 내놓은 길을 이용하도록 주의하는 것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 상식적인 행동을 수고스럽다고 느낄 정도니 인내심이 완전히 맛이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침내 릴리엔의 푸른 눈앞에서 있는 지금…….
“…… 대공 전하?”
다미언은 자기가 비정상적인 갈망을 깔끔하게 잘 숨기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안 돼.
아직 그와 릴리엔의 연결고리는 불안정했다.
최소한 릴리엔과 결혼식을 치르고 공식적으로 부부 관계로 묶일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다미언은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바로 그때였다.
"앗..."
와르르 소리를 내며 릴리에의 머리 위쪽 창턱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책 더미가 굴러 떨어졌다.
위험하다.
그 생각이 들자 쓸데없을 정도로 성능이 좋은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우당탕 쿵탕!
한바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난 뒤 정신을 차려 보니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릴리엔을 감싸 안고 있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릴리엔은 우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전, 저는…….”
다미언을 살피려는지 릴리에이 고개를 들었다. 다미언의 턱 밑에서 릴리에의 속눈썹이 팔락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맹세컨대 다미언에게 대단한 흉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미언은 그저 책이라도 한 권 건네.
주다가 릴리엔의 손끝이 그에게 우연처럼 닿는 정도만을 바랐다.
흉심에 비해 소박한 바람.
사실 그 이상은 파편만 남은 스스로의 자제력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 그런데.….'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전하?”
릴리엔은 고장이 난 것처럼 반응이 없는 다미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다미언은 한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릴리엔과 가까이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으로 인해 신체가 조금씩 변형되는 동안 발생하는 통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때 한 번 있었던 일시적인 기적이 아니었다. 굳이 기적이라고 하려면 릴리에 자체를 기적이라고 불러야 했다.
고통이 줄어드니 정신이 명징해졌다. 숨통이 트이면서 다른 의미로 몽롱해졌다.
'더…… 닿고 싶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미언에게는 릴리에이 필요했다.
숨을 쉬고 물을 마셔야 살아갈 수 있듯 그저 절대적인 필요였다.
순간 다미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조각만 남은 자제력을 그러모아 간신히 릴리엔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다미언이 할 수 있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들켜선 안 돼.
다미언은 안간힘을 그러모아 웃었다.
“결례를 저질렀지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자기도 내심 당황했으면서도 릴리엔은 성실하게 부정했다.
“칠칠맞은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사과하실 일이 아니신데요."
아, 이 얼마나 가여운지.
일순 다미언은 아주 애처로운 것을 바라보듯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릴리엔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베풀고 만 안식 때문에 꼼짝없이 괴물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걸.
가엾고 착한 내 신부는 어떨까,
'나를 알면…….’
무서워할까, 아니면 혹시 동정심을 느낄까?
일순 궁금증이 들었지만 교활한 다미언은 그 궁금증을 영원히 해결하지 않으리라고 재차 다짐했다.
튜린의 아가씨께서는 일평생 자기 남편이 괴물인 줄 몰라야 했다. 잠깐 먹이를 주려다 제가 잡아먹힌 줄도 모르고 다미언의 뱃속에 있어야 했다.
그게 가장 안전한 길일 거라고 다미언은 생각했다.
***
당황스러운 접촉 사태 직후.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불청객이었으니 이만 물러갈게요.”
그림 같은 미소를 남기고 떠나간 다미언을 생각하며 릴리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흠잡을 데 없이 예의바른 태도였건만 이상했다.
'예사롭게 하시는 말씀에 왜 자꾸 소름이 돋는지 모르겠어.'
깊게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서로 뭔가 잘 안 맞는 거겠지.'
기억 속 처참했던 결혼 생활을 떠올리며 릴리엔은 납득했다. 다 미언이 알면 몹시 억울해할 그런 생각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겨우 혼자가 되었다. 릴리엔은 두 불청객 때문에 책들 사이에 숨겨 두었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버린 장부를 다시 무릎위로 끌어들였다.
천성이 착하고 순한 릴리엔은 도서실에 숨어 남들 걱정시키는 짓을 굳이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때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