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47화 (47/155)

47화.

* * *

“장부를 살펴보겠다고, 릴리엔?”

세드릭 이슬라르는 여동생이 팥으로 메주를 쑤어야겠다고 해도 그러마 할 위인이었다.

아니, 그냥 허락하고 마는 정도가 아닐 거다. 아마 '네가 직접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면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릴리에 대신 팥으로 메주를 쓸 방법을 강구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릴리엔의 요청에 난색을 표하는 경우는 딱 하나.

릴리에이 그녀 스스로에게 해가 될 일을 부탁할 때뿐이다.

대개의 경우 릴리엔은 세드릭이 난색을 표할 요청을 애초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세드릭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나친 과보호와 지극 정성을 다 받아 주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장부를 다루는 것은 집안일의 기본인 걸요.”

이 제국은 수많은 전란 속에서 그 위대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런 만큼 제국의 특권계층은 기본적으로 모두 군인으로서 유사시에 가장 앞장서서 나라를 지켰다.

따라서 제국은 생명을 바쳐 조국을 지키는 행위를 가장 숭고하게 여겼고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가문을 이끄는 건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이었다.

현명하게 가문과 식솔을 다스린 여성은 위대한 전공을 세운 군인 만큼이나 존경받는 존재.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제게는 가문 내의 유일한 여성으로서 의무를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업무가 과중하신 오라버니께 본디 제가 해야 할 일까지 떠넘길 수는 없어요.”

세드릭은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약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이 그를 걱정하는 게 순 수하게 좋긴 했다. 그렇지만 양보할 수는 없었다.

사실 둘 사이에 이런 공방이 오간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릴리엔은 슬슬 집안일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잠깐씩 표현하곤 했다.

세드릭은 그때마다 정색을 하고 거절을 했다. 말이 좋아 집안일이었다. 제국 역사보다도 더 긴 역사를 가진 가문의 대소사였다.

철마다 있는 연례행사를 치르고 모임을 주관하며 예산을 집행해야 했다.

안면이 있는 가신과 핏줄이 닿아 있는 혈연을 주로 상대해야 하는 까닭에 바깥일보다 더 까다로운 구석도 있었다.

자손이 번성한 집안은 안주인의 내정에 불만을 품은 분가에서 암살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나마 이슬라르는 손이 귀해 분가가 적어 번잡함은 덜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 몸 약한 아이가 감당하게 할 일은 아니지.'

암, 이게 어디 될 말인가? 그가 책상에서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릴리에의 손만큼은 빌릴 수 없었다.

“결혼을 하면 네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다. 미리서부터 고생을 할 필요는…….”

“결혼해서 어설픈 모습으로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면 미리 서부터 고생을 하더라도 익혀 두어야지요.”

논리적인 설득이었지만……….

“그럼 결혼을 하지 마라.”

세드릭의 누이 사랑은 언제나 논리와 상식을 뛰어넘곤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설득할 구석이 없었다. 릴리엔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오라버니.”

“아무튼 장부는 절대 안 돼.”

릴리에도 강경했지만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만!” 하고 단호하게 여동생의 요청을 거절해 버렸다.

“황궁에 갈 준비만으로 바쁜 줄 안다.”

조만간 릴리엔은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이루어진 인간 폭풍의 핵에 던져지고 말 운명이었다.

사람 상대하는 일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도 없었다.

'저 병약한 아이가 행여 사람 등쌀에 시들어 죽지나 않을까.'

세드릭은 그게 걱정이었다.

물론 릴리엔은 정신적으로는 세드릭 그보다 다부진 아이였다.

하지만…….

“오라버니……?”

혈색이 약간 돌아오긴 했으나 여전히 창백한 안색.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기다란 속눈썹의 무게조차 버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툭 치면 와르르 주저앉을 모양새로 힘없이 있는 꼴이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는 모습. 세드릭은 거하게 한숨을 쉬고 싶었다.

'정신이 다부지면 뭘 하나. 그걸 담고 있는 육신이 유리그릇도 못되는 종잇장인데.'

“나는 네가 조섭에 좀 더 신경을 쓰길 바란다.”

“하지만.”

“릴리엔 마리에스타드 이슬라 르, 나는 분명히 그만하라고 했다.”

릴리엔을 상대로 세드릭의 입에서 여기까지 나왔으면 정말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거절이었다.

“가주로서의 명령이다. 더 이상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구나.”

릴리엔이 세드릭의 약점을 안다면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에서 '명령' 운운하는 말까지 나온 이상 릴리엔은 충실한 가솔로서 가주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몰래 장부를 살펴보고 있는 건…….

'엄밀히 말해 항명 행위지.'

변명을 하자면 릴리엔으로서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세드릭은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한 가주였다.

릴리엔은 출전과 부상, 때론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이 땅을 지키는 제후에게 예우를 다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장부에는 고지식한 릴리에마저도 살짝 충심을 포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다른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서는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치명적인, 믿을 수 없는 단점은 바로…….

“아직도 복식 부기가 아니라니…….”

릴리엔은 으, 하고 치를 떨었다.

현대 회계학의 꽃, 복식 부기!

단순히 수입과 지출만 기재하는 단식 부기에 비해 복식 부기는 전체적인 재정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장부의 오류를 검증하는 것도 획기적으로 쉬웠다.

하기에 따라서는 산더미 같은 보고서로 확인해야 하는 내용을 서류 한 장에 요약할 수도 있다.

는 뜻이다.

세드릭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가주였다. 게다가 릴리에의 등쌀에 평균적으로 여섯 시간 정도는 수면을 취하곤 했다.

다만 농번기가 끝나고 조세를 부과할 시점에 대화의 참석 준비가 겹치는 지금 같은 시기가 오면 쏟아지는 업무량이 가주의 유능함을 압도하곤 했다.

연중 가장 자금 유동량이 많은 시점에 이런 형편없는 보고서를 받고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쓰는 오라버니를 생각하면 릴리엔은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상황의 참혹함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1+1+1을 3으로 이해하기 위해 세드릭과 튜린의 관료 전원이 밤을 새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빼돌린 수십 장의 보고서를 훑어보며 릴리에이 콧대에 다시 안경을 걸쳤다.

간헐적으로 뱉어내는 연기 사이로 비치는 푸른 눈빛이 거의 세드릭만큼이나 냉정하게 보였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릴리엔 이슬라르.”

세드릭이 피곤한 미간을 문지르며 성을 붙여 릴리엔을 불렀다.

그 손에 릴리에이 작성한 서류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태연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지.'

게다가 저 서류는 애초에 보고를 전제로 작성한 것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미소를 핀 여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다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래야만 했겠느냐.”

“네.”

릴리엔은 담담하게 긍정했다.

후회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걸.'

세드릭에게 릴리에이 하나뿐인 누이라면 릴리엔에게도 그는 하나뿐인 오라버니였다.

세드릭이 릴리엔의 발밑에 거치는 돌멩이 하나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면 피를 나눈 형제가 혹사당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는 건 릴리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항명은 항명……..'

동생이라서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릴리엔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감히 가주께 항명한 죄를 청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봤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금하신 장부를 몰래 빼돌렸으니 그에 대한 처벌도 내리신다면 받겠습니다.”

“잠깐, 릴리.”

세드릭은 크게 기가 막혔다.

'죄를 청한다고?'

어찌 저런 무서운 말을 할까.

솔직히 말해서 세드릭은 릴리엔이 반역을 저질러도 화를 낼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이번 일은 그를 생각한 나머지 저지른 짓이었다.

“네가 날 위해 행동했다는 이유로 벌을 주라고?"

“하지만 불복인걸요.”

릴리에이 난처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기강을 잡으셔야죠, 오라버니.”

애초에 항명을 작정하고 서류를 빼돌릴 때부터 릴리엔은 본보기로 벌을 받을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거기까지가 릴리엔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튜린과 이슬라르에 속한 사람들의 충성심은 의심할 바가 없다.

하지만 간혹 엄숙하지 않은 순간에 세드릭의 팔불출 같은 면모와 그에 관한 일화가 아랫사람들의 입에 가볍게 오르내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대체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과열되면 다소 난감한 이야기들도 튀어 나온다는 게 문제였다.

개중에는 세드릭이 릴리엔의 아이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줄 예정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번쯤은 그도 사랑하는 누이에게 엄하게 군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오라버니 기준에서 엄한 거 말고.’

고작해야 릴리엔의 이름에 성을 붙이는 거 말고 남들이 보기에도 냉정해 보일만 한 처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불허한다.”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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