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48화 (48/155)

48화.

“오라버니."

“널 이용해서 기강을 잡으라니 기가 막히는구나. 그런 고약한 소리 다신 듣고 싶지 않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그런 제안이었다.

세드릭은 단호히 고개를 저어 이어지려는 릴리엔의 설득을 원천 차단했다.

“항명이 네 결정이었듯 네 행동을 용납하는 건 내 결정이다. 이후 이 결정에 가부를 두고 논하는 것을 튜린 선제후의 이름으로 엄금한다. 이상.”

“애초에 저도 대단한 벌을 받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근신이나 예산 삭감 정도라도……"

“릴리, 이 오라비가 방금 뭐라고 했지?”

윽. 릴리엔은 드물게 엄중한 세드릭의 대응에 찔끔 놀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해 버렸다.

“가주님의 결정에 가부를 논하는 것을 엄금한다고…….”

“옳지.”

세드릭이 팔짱을 끼고 싱긋 웃었다. 관자놀이에 힘이 들어간걸 보고 릴리엔은 확신했다.

“하지만 그래. 네가 그토록 벌을 받고 싶은 모양이라면 차라리 이렇게 하자꾸나.”

그녀의 오라버니는 지금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이번 대화의 기간 중에 네게 배당될 예산을 두 배로 늘려 주마. 남김없이 모조리 다 써.”

"네? 아니 잠깐, 어떻게 그게 벌이 될 수 있……."

"너한테는 충분한 벌이 되겠지."

그야 그랬다. 지금 배당된 예산을 쓰는 것만으로도 사실 벅찼다.

릴리엔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재정 상황을 염려 하는 척하면서 빠져나가려 입을 열려는데 세드릭이 여유롭게 선수를 쳤다.

“네가 직접 장부를 정리했으니 금년도의 작황이 좋다는 것과 이슬라르가 본디 얼마나 부유한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겠지.

그렇지?”

“그건…….”

사실이었다. 대대로 이어온 튜린의 부유함은 그야말로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참으로 영명하십니다만 오라버니……. 아무리 그래도 처벌로 예산을 추가로 편성하는 건 좀.”

"이런. 항명을 아예 취미로 삼을 모양이구나, 릴리. 조금 전 내가 가주의 결정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정 억울하거든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 오라버니를 둔 네 업보려니 생각하거라.”

그제야 릴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세드릭도 다소나마 화가 좀 풀려서 누이가 작성한 서류를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자산과 부채, 수입과 지출을 표의 양쪽에 나란히 기재해서 교차대조를 통한 검증을 가능케 한 천재적인 발상.

세드릭은 기본적으로 무인이었지만 꼼꼼한 성격 등 행정 관료로서의 적성도 타고난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복식 부기를 단숨에 이해한 것은 물론 이게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닌 기술인지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릴리엔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주 몰래 서류를 빼돌리다니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엄벌을 내리지 못한 건 세드릭의 고질적인 여동생 사랑 탓도 있었지만 얼핏 살펴본 이 서류가 너무 대단한 탓도 있었다.

고작해야 서류 몇 장이었다. 그런데 이 종이 몇 장 덕분에 그와 총관, 이하 사무관들이 일주일은 철야를 면하게 생겼다.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신기神技라 세드릭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일전에 어머니와 거래했던 먼 나라 상인의 장부를 본 적이 있어요. 제 나름대로 다듬어 본 정도예요.”

준비된 변명 끝에 릴리엔은 슬쩍 물었다.

“괜찮은가요?”

“괜찮으냐고?”

헛웃음이 나왔다. 거의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게 깔끔한 장부를 제출해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자랑도 아니고 '괜찮은가요?'라니.

내용은 둘째치더라도 보기 편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글씨체의 크기를 조절한 기술마저 몹시 노련했다.

게다가 릴리엔은 이 새로운 장부를 이해하는 방식을 따로 정리까지 해 놓은 글을 따로 첨부했다.

상급자를 완벽하게 배려한 일매무새.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태어나서 행정 사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눈동냥, 귀동냥만으로 이런 일을 해냈다면 세드릭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관료적 적성에서는 나와 비견조차 될 수 없는 천재…….’

비록 이 장부의 원안이 릴리엔의 것이 아니라 해도 '본 적 있는 기술'을 자기 걸로 만들고 가다듬어 그에게 전달하기까지 들인 수고를 절대 과소평가할 수가 없었다.

주력 분야도 아닌 데서 이다지도 격차가 크기까지 하니 아예 호승심조차 들지 않았다. 세드릭은 마른세수를 하며 인정했다.

“기안자가 내 병약한 누이동생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너를 종신고용 했을 거다.”

“정말요?"

“정말이냐고? 이 서류 한 장만 보고도 청혼을 했을 수도 있단다.”

다른 의미로 종신 고용인 셈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극찬에 릴리에은 조금 놀랐다.

“과장이시겠지만 기분은 좋네요.”

“너는……. 아니다, 됐다."

아무래도 릴리엔은 세드릭의 공치사가 그저 지극한 여동생 사랑에서 나온 농담인 줄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착각을 정정해 줄 기운도 없어서 세드릭은 사랑스러운 누이가 그냥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나 내 행정관들이나 다 네게서 이 기술을 배워야겠구나.”

"음, 그리하신다면 제게 내린 예산 증액 처분은 없던 일로 해주시나요?”

“안 될 말이지. 헛꿈 꾸지 말아라, 릴리에 이슬라르.”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으면서.”

“그럼 내가 지불하는 수업료인 셈 쳐라.”

“하지만…

“어허."

세드릭은 야멸차게 서류를 보는 척하다가 흘끔 종이 위로 시선을 올려 보았다.

시무룩해져 있는 여동생이 무척 귀여웠다. 세드릭은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서류 안쪽으로 잘숨겼다.

표정을 숨기는 데 열중한 탓일까?

그는 누이동생이 감정과 관계없이 침착하게 다음 행동을 계획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걸 간과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 * *

다음날 릴리엔은 그녀 몫으로 배당된 예산이 정확히 두 배로 증액됨을 증명하는 서류 일체를 알렌을 통해 받아 볼 수 있었다.

“역시 오라버니께서는 헛말은 안 하시는 분이세요.”

“그런 편이십니다.”

게다가 릴리엔의 방식대로 서류를 정리해서 보낸 점마저도 딱 세드릭다웠다.

그 진지한 완벽 주의자 나름의 보복성 장난인 셈이었다. 릴리에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이를 이제 어쩐담?”

"돈이야 쓰면 그만인 법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리타의 무감한 말마따나 돈이야 쓰면 그만이다. 하기에 따라서 봄볕에 눈 녹듯이 허망하게도 사라질 수 있는 게 돈이다.

아무리 거액이라도 헛되이 쓰는 방법은 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는 걸 알잖니. 이 돈은 튜린의 돈이야.”

제후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땅과 백성을 수호한다. 백성은 조세를 바치고 제후를 섬긴다.

릴리엔과 세드릭의 아버지는 그들이 군역을 바쳐야 할 대상이 황제 이전에 백성이라고 가르쳤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황제 폐하께서 이슬라르에게 튜린의 통치 권을 부여하신 게 맞다. 하지만 이 땅 백성들의 암묵적인 동의 없이는 결코 우리가 튜린을 다스릴 수 없다.'

이슬라르는 황제의 검이기 이전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수호자라고, 그것이 이슬라르가 군림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남매의 아버지는 가르쳤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을 릴리엔은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튜린의 사람들이 바치는 돈은 내 오라버니의 목숨값이란 뜻이지.’

“오라버니의 핏값을 허비할 순없어. 단 한 푼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이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할 것인가? 사실 떠오르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했다.

"……사실 떠오르는 방법이 있긴 하신 거죠, 아가씨?”

"…들켰니?”

눈치가 빠른 데다 오래 시중을는 하녀를 속일 방법은 많지 않았다.

아닌 척해도 리타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는 빤한 시선으로 릴리엔을 종용했다.

릴리엔이 포기하고 손짓했다.

“귀 좀.”

리타가 잽싸게 자세를 낮췄다.

릴리에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소곤소곤 풀어 놓았다.

계획의 전말을 다 들은 리타의 반응은 이랬다.

"…가주님께서 아시면 차라리 내 핏값을 허비해 달라고 우실 것 같습니다만.”

“으음, 역시 그러려나?”

* * *

고백하자면 다미언 루펜바인은 그동안 자신이 괴물이란 사실을 적잖이 즐기면서 살아왔다.

죽일 수 없는 괴물, 살아 있는 두려움의 상징이 된다는 건 그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더라도 일말의 즐길 여지까지 전무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건 하면 그만이고 아니면 안 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건, 달리 말해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상당히 편리한 점이 많았다. 적성에 맞기도 했다.

이렇게 세상을 혼자 사는 그에게 큰형, 이도엘은 늘 인간이길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미언, 너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늙고 죽게 되지 않겠니.”

이도엘은 동생의 마음에 인간성의 조각이라도 남기고자 애썼지만 다미언은 그다지 협조적으로 굴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었다.

"이 미친 세상에서 나 같은 게 늙어 죽기까지 하면 그거야말로 비극이야, 형.”

그 냉소에 상처받던 유일한 사람.

큰형이 죽고 7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이 생겼다.

살아만 있었어도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된다.'며 매사 귀찮게 조언을 해 댔을 사람이 생각날수밖에 없었다.

“숙부님……?”

그때 문이 열리고 마테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뭘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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