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49화 (49/155)

49화.

다미언은 대답 대신 흘긋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도엘을 꼭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행실이 바른 소년.

황제였던 형의 외아들이었고 온 황궁의 총아였던 그가 가진 올바른 기질은 모진 경험을 하고서도 꺾이지 않았다.

다미언은 가끔 이 아이와 자신이 꼭 대척점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마테오 루펜바인은 다미언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두 손 가득히 쥐고 태어난 아이였다.

정상적인 아버지, 정상적인 마력, 정상적인 성장 배경.

다미언은 누군가가 그에게서 도망가지 않게 할 방법을 몰랐다.

반면에 마테오의 주변은 늘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찬사와 애정에 시달린 예의바른 소년은 남몰래 피곤해하곤 했다.

한 번도 그게 부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마테오의 삶과다미언의 삶은 비교 선상에 놓기엔 격차가 너무 지나쳤다.

하지만 지금은?

문득 이런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만약 다미언과 마테오 중에 선 택할 수 있다면 릴리엔은 둘 중 누구를 고를까?

자연 도서관에서의 광경이 떠올랐다.

햇살이 드는 창가 아래 앉은 릴리엔과 마테오. 다정하게 서로를 이해하던 대화들.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심술로 가늘어졌다.

"별로 너랑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닌 것 같구나, 조카야.”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편지가 와서요.”

어른이 유치하게 구는데 사춘기 소년의 반응이 고울 리는 없었다.

마테오가 냉랭하고 딱딱한 태도로 바닥에 누워 있는 다미언의 옆에 툭 편지를 떨어뜨렸다.

다미언은 전에 없이 빈정거렸다.

“칭찬받던 예의범절은 어디다 집어 치웠길래 태도가 이 모양일까?”

마테오는 팍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소년은 기분이 나빴고 그 이상으로 당혹스러웠다.

여태까지 다미언은 마테오를 소닭 보듯 하거나 기분이 조금 좋으면 놀리거나 하는 정도였다.

'한심하게 굴 때 폭언을 들은 적도 한두 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비꼬면서 사람을 조롱한 적은 없었다.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 도서관에서 레이디 릴리 엔과의 일 때문인가.'

그거라면 그가 백번 잘못한 일이 맞았다.

실제적으로 뭔가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마음은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린 마음은 절대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심기를 거스르고만 삼촌은 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보호자였다.

아쉬운 쪽의 입이 먼저 열렸다.

“삼촌, 저는…….”

“볼일 다 봤으면 나가지 그래.”

간신히 내민 화해의 손길이었는데 다미언은 매정하게 내쳐 버렸다.

자존심을 접고 변명하려던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꿀꺽, 마테오는 노기를 간신히 삼키고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쥐었다. 곧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쾅, 문이 닫히고도 거친 발걸음 소리가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다미언은 손으로 눈가를 꾹 눌러 덮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형. 애 상대로 어른스럽지 못했지.”

전쟁과 학살로 바쁘게 보내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열등감이 스스로를 잡아먹는 느낌이었다.

진정하자. 다미언은 스스로를 달랬다. 릴리엔은 이미 그의 정혼자였다.

다미언이 마테오와 승산 없는 경쟁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후우.”

다미언은 긴 호흡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테오가 떨어뜨리고 간 편지를 주웠다.

뭐든 이 쓰린 열등감의 늪에서 빠져 나올 계기가 필요했다.

발신인은 선대 대제후의 친속이자 가신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예상했던 용건이 반 이상이었다.

사무적으로 훑어 내려가던 다미언의 시선이 멈춘 건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였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여 튜린 제후가 전하에 대해 무엇이든 눈치를 채고 혼담을 꺼리거든 이측에서는 혼담의 당사자를 황태자 전하로 바꿀 용의가 있음을 시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튜린과의 혈맹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미언의 시선이 그 구절에 오래 머물렀다.

이전이라면 그냥 하자는 대로 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상황 돌아가는 걸 한참 모르는 머저리가 하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편지를 쥔 손에서 조금씩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미언의 노기에 감응한 마력 때문이었다.

곧이어 발칙한 편지에 화르르불이 붙었다. 불붙은 편지는 새카맣게 변한 뜨거운 손아귀 안에서 재가 되어 소르르 휘날렸다.

편지는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종이 위에 적혀 있던 검은 글자는 뇌리에 남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먹물처럼 새까맣게 머리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혼담의 당사자를, 바꿀, 용의가, 있다.

릴리에 이슬라르의 남편으로, 그가 아닌 마테오를.

딛고 선 바닥이 까맣게 입을 벌리는 느낌이었다.

웃기게도 다미언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질투에 잡아먹힌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였나.

'……아니, 이런 끔찍한 마음을 질투 같은 귀여운 말로 표현해도 되나?'

그때였다. 똑똑 가지런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공 전하, 안에 계십니까?”

그제야 다미언의 머릿속에 약간 제정신이 돌아왔다.

여기는 튜린이었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들키면 릴리엔은 마테오와 결혼하게 될 거다.

다미언은 가까스로 자신을 제어했다. 그리고 끔찍한 쇳소리를 어느 정도 감추고 인간다운 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들어 와라.”

“실례하겠습니다.”

다미언이 자신을 추슬렀다고 하나 방 안에는 이 계절에 있을 수 없는 열기가 후끈하게 번져 있었다. 게다가 매캐한 연기 냄새까지 감돌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흐릿한 연기 속에서 서늘한 보랏빛 시선을 보내는 다미언의 요사스러운 아름다움에 홀려 하인은 장갑을 끼지 않은 다미언의 오른손이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리, 릴리에 아가씨께서 전하를 뵙고자 하십니다.”

아, 세상에.

다미언은 탄식하고 싶었다. 단언컨대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 * *

최악의 타이밍이었기에 다미언은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인은 우물쭈물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주치의님께서 대공 전하를 꼭 모셔 와야 한다고……….”

아 이런. 다미언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릴리엔이 그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분노와 질투 탓에 거의 잊고 있었지만 릴리에에게는 그의 마력이 필요했다.

'어떻게 그 중요한 걸 잊을 수가 있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우습게도사납게 날뛰던 마음이 약간 차분해졌다.

릴리에이 다미언에게 기적처럼 찾아온 유일한 안식이라면 다미언은 그녀의 생명줄이었다.

그는 마테오는커녕 친오빠인 세드릭도 주지 못하는 걸 릴리에에게 줄 수 있었다.

천운, 하늘이 내린 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하인의 안내를 따라 나서며 다 미언은 생각했다.

'세드릭 이슬라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보고 싶어서는 물론 절대 아니었다. 릴리엔과 접촉한 그가 혹시라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상정해서였다.

다미언의 목에 칼이라도 겨눌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튜린 온 성을 통틀어 세드릭 한 사람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뭣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세드릭은 없었다.

다미언을 맞이한 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딱 평소의 릴리엔뿐이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지 말아요.”

릴리엔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유독 힘없는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매번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합니다.”

듣기 좋았다. 그가 필요하다는 말을 릴리엔의 목소리로 듣고 있자니 마냥 기분이 좋기만 했다.

“송구하실 필요 없습니다. 허혼서를 교환한 뒤로 이 다미언은 아가씨의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말하면서도 다미언의 잔머리는 가열차게 돌아갔다. 도대체 내가 허혼서를 어디다 뒀더라?

그 중요한 걸, 다미언과 릴리엔의 사이를 묶어 주는 유일한 증빙 서류를 칠 년 동안이나 어디 뒀는지도 모르게 처박아뒀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

돌아가자마자 아이반을 닦달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다미언에게, 릴리엔이 말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은 전하께 한 가지 청을 더 드리려 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조금 편해지네요.”

청이라…… 다미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부다. 뭐든 듣겠습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잠시 망설이며 릴리엔이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짧은 순간, 갑자기 다미언의 마음을 검은 불안이 엄습했다.

뭐든 듣겠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혹시 그가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혹시나 결혼하지 않겠다거나 이혼해 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허혼서를 파기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괜찮으시다면, 저희 결혼식을 좀 앞당기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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