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50화 (50/155)

50화.

"예?”

머릿속이 텅 비었다.

'지금, 이 아가씨가…….'

입을 쩍 벌리고 침을 뚝뚝 흘리는 괴물 앞에서, 얌전히 잡아먹혀 드리겠노라고, 그렇게 말한 게 맞나?

아니면 설마 선 채로 꿈을 꾸고 있나. 다미언은 아연해졌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다미언의 반응을, 릴리 엔은 좀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음……. 역시 좀 성급했나?'

쌍수를 들고 전적으로 환영하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가 아는 원래 이야기에서보다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니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떨떠름하게 굳어버릴 줄이야…….’

릴리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원작보다 조금 나은 사이가 됐다고 생각한 건 역시 그녀만의 섣부른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전하께 사적인 마음을 품고 무리한 일정을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릴리엔은 오해받지 않도록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화의에 참석하기 전에 저희의 결합을 좀 더 깨어지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황궁에는 이 결합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우리 결합은 아주 중요한 정략이기 때문에 깨져서는 안 된다?”

"네, 그렇습니다”

릴리에이 선선히 긍정했다. 그 사심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담백한 태도에 다미언은 이게 꿈을 꾸는 게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했다.

부풀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미언은 침착하게 릴리에의 보조를 맞췄다.

“하지만 결혼식을 준비하려면 시간도, 예산도 많이 필요할 텐데요. 게다가 보통 결혼이라면 황제의 인가를 받아 황궁에서 행해지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제국의 귀족들은 각자의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황제란 딱히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고, 특별한 존중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래서 황가는 귀족들에게 허례허식을 팔았다. 대표적으로 칸타쿤이 있었다. 결혼식은 황가의 두 번째 상품인 셈이었다.

결혼식을 치르려는 귀족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허가증을 발급받으면 황제는 황궁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틈만 나면 세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이 제도는 아주 빠르게 자리 잡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필수적인 결혼 절차가 되어 버렸다.

굳이 비유하자면 황궁에서 결혼식을 치르지 않는 건 결혼식을 하지 않고 혼인 신고만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허를 찌르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황제 일파는 다미언과 릴리엔이 결혼식만큼은 남들과 똑같이 치를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데뷔도 전에 결혼하는 사태는 상정하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성혼을 방해하려는 계략도 분명 그에 맞춰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마음대로 집행할 수 있는 거액의 돈이 생긴 순간, 릴리엔은 순간적으로 '이걸로 결혼식도 치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떠올린 그 발상이 정말 좋은 발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씀하셨듯이 이제와서는 거의 사장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제후에게는 혼인을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이 여전히 있어요.”

릴리엔은 행여나 다미언이 이제안을 두고 원작에서처럼 자신에게 집착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사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

비유하자면 칼을 휘두른 줄도 모르고 휘두른 셈이었다.

“하지만 보통 아가씨들은 결혼식에 대해 자기만의 소망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일 텐데요."

결혼식이 대대적인 세력 과시용 퍼포먼스가 된 후부터 누가 어떻게 식장을 꾸미고 무슨 옷을 입었으며 무슨 반지를 주고받았는지는 호사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어느 정도냐면 장례식장에서까지 당사자의 결혼식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

죽을 때까지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려하게 치러야 하는 예식. 게다가 일반적인 연회와는 달리 손님들을 앉혀 놓고 가장 화려하게 꾸민 채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평생에 단 한 번 오는 기회.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할지라도, 한두 가지는 바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릴리엔에게도 희망 사항이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

한 번의 식 뒤의 삶을 미리 보았기 때문일까. 릴리엔에게 더 이상 결혼식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마 너무 좋아하면 이 사람에게 오해를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거야.'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릴리엔에게는 그런 화려한 결혼식을 치를 체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얼마 남지 않은 미련까지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푸른 눈동자를 보며 다미언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졌다.'

다미언은 릴리에에게서 무언가 다른 반응을 예를 들어 그와의 결혼식에 대한 아주 작은 기대감만이라도 이끌어 내려던 시도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에게 이 결혼은 정말 정략일 뿐이로군요."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릴리엔은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착각일 테지만 다미언의 눈빛이 왠지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짙은 재색 속눈썹이 베일처럼 드리운 보랏빛 눈동자에서 시무룩하고 서운한 감정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라 별 감정 없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동요되는 되는 걸까?'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고 말았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제 목숨은 이렇게…….”

릴리엔이 자기 손을 다미언의 커다란 손 위에 살며시 올렸다.

“.......”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접촉이었다.

“전하의 손에 달려 있어요."

“만약 전하께서 저를 거절하시면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 죽게 될 거예요.”

자기 약점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 릴리엔은 배시시 웃었다.

“가능하면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역시 전하와 결혼해야겠죠.”

매일 행복의 절정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가슴 떨리는 사랑 역시 아마 경험해 보지 못하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충실한 충만감을 느끼며, 예정된 불행을 막고 얻는 보람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욕심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다시 한 번 물을게요. 루펜바인의 대공 전하,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릴리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다 미언은 대답 대신 장갑의 한 겹얇은 가죽을 사이에 두고 접촉해 있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감싸쥐었다.

릴리엔은 키가 큰 편이었고 손가락도 긴 편이기는 했지만 다부지지는 못했다.

섬세한 예술품 같은 손가락이 다미언의 장갑으로 감춘 검은 손아귀 안에 완전히 감춰졌다.

“튜린 선제후께서 저희 결혼에 기꺼이 허가증을 발행해주시리라 보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만…….”

"음, 부끄럽게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하면서 릴리에 이 리타를 향해 눈짓했다. 리타가 몹시 내키지 않는 무표정으로 서류 일체를 내밀었다.

“이건…….”

결혼 허가증이었다.

새하얀 종이에 진주분을 입히고 형압으로 섬세한 문양을 찍은 아름다운 증서였다.

그 위에 익숙한 달필로 적혀 있었다.

[원년으로부터 73년, 본 후는 다미언 발미에라 에른스트 루펜바인과 릴리에 마리에스타드 이슬라르 양자의 결합에 온 명예와 신실함을 다해 증인이 됨을 기명하고 날인한다.

헤멘린나 선제후,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 일곱 맹세의 수호자, 헤멘린나의 공작, 알트 해의 대선장, 팔미앵의 백작이자 철사자 기사단장인 그레고리 앰버릭 필론 인.]

대제후의 서명이었다.

“대제후께서 안배해주셨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정 놔주지 않을 때를 대비하마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귀띔하기를 신랑 될 외손자가 시원치 않거든 태워 버리고 오라버니 뒤에 숨어 버리라고도 충고하셨다. 과격한 충고였다.

“태자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가, 이거야말로 곧 죽을 늙은이의 특권이란다. 내가 죽고 나서 이 세상만사야 어찌 되든 내가 무슨 알 바냐?”

껄껄 웃으면서 대제후가 말했다. 릴리엔을 바라보는 황금빛 눈동자가 다정했다.

“……말년에 너를 만나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자꾸 네가 행복 하기를 바라게 되는구나.”

그리운 얼굴로 종이를 쓰다듬는 릴리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다미언이 불쑥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가 무언가 의미 있는 증표라도 드려야 할 텐데요.”

보통 제국의 귀족들은 청혼하거나 할 때 서로 간에 증표가 될만한 물건을 교환하곤 한다.

물론, 만나기도 전에 반쯤 결혼해버린 두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공염불일 뿐이었다.

“증표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릴리엔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런 사소한 행동에서조차 그녀가 다미언에게 로맨틱한 어떤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최고로 아름답게 웃었다. 그런 것쯤이야 없은 들 어떠한가?

결국 이 여자는 그와 결혼할 테고, 아내가 될 거고…….

자기가 전무후무한 괴물의 품안에 순순히 안겼다는 것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살게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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