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전장을 떠돌던 때 다미언에게 유일하게 취미 비슷한 것이 있다.
면 굶주린 들짐승을 보면 자기가 먹던 음식을 양보하는 거였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고 딱히 동물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의 일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물론, 티어 인피니티의 육신은 일주일을 굶어도 기력이 쇠하는 법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 취미 아닌 취미를 통해 다미언은 오래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은 들짐승에게 무언가 먹이를 줄 때는 손가락까지 먹이로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그걸 그가 릴리엔에게 가르쳐 줄 의무가 있던가?
애초에 그는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친절한 척조차 릴리엔을 만나고 처음 시작한, 그런 인간 말종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딱히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저도 준비하지 못했으니까요. 보통은 어머니께서 약혼녀에게 주라고 물려주신 유서 깊은 반지 같은 걸 드리는데 아쉽게도 저는 그런 걸 받지 못했거든요.”
그건 그가.
“삼남이라서.”
괴물이라서.
“그러니 혹시 아가씨께서 허락하신다면……. 입을 맞춰도 될까요?”
"네. ……네?”
예사롭게 허락하려던 릴리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늘 침착한 그녀가 토끼처럼 놀라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닌지라, 다미언은 즐거웠지만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긴 속눈썹을 처연하게 나풀거리면서 물었다.
“안 되나요..…?"
“아니, 그……,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저기, 저희는…….”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그렇죠?”
“그렇기는 하지만, 전하."
“게다가 주치의도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마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신체 접촉을 통해서 가능하고, 손잡기는 개중에서 효율이 제일 낮은 편이라고.”
다미언은 달게 속삭였다.
“……이참에 저희가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릴리엔은 안 그래도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팽팽 도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준수하고 아름다운 오라 버니와 함께 자랐고, 예전 세상의 미디어에서 온갖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외모를 접한 기억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덕분에 미모에 대한 역치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원체 경국지색인 남자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더 아름답게 보이려고 눈꺼풀을 깜빡여 가며 조르는 데까지 면역이 되어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여기까지 저항한 것만으로도 다미언은 안달이 났다.
안달이 난 그는 결국 릴리에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까지 고백하고 말았다.
“사실 지금 바치려는 건 제 첫 입맞춤이랍니다. 이만하면 예물로 가하지 않을까요?”
받아 주실 거죠? 하는 뜨거운 속삭임이 귓속으로 흘러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네.”
저도 모르게 툭 입 밖으로 떨어진 허락에 릴리엔이 놀랄 틈도 없었다.
양심 없는 남자는 '아니, 잠깐하는 말이 튀어나올 틈을 주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던 치명적인 솜씨 그대로였다.
입술이 닿았다.
릴리엔의 입술은 그녀의 얼굴 중에서 유일하게 혈색이 돌아 분홍빛이었다.
옳은 말, 합리적인 말을 차분하게 내뱉던 그 반듯한 입술이 다 미언의 입술에 닿아 뭉클 뭉그러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숨을 한번 헐떡였다. 그리고 고개를 비틀어 좀 더 많은 면적이 맞닿게 끔 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응…….”
당황한 릴리엔이 토해내는 억눌린 소리가, 그의 입술 위로 그대로 전해졌다.
그 순간 다미언은 참지 못하고 혀끝으로 릴리엔의 닫힌 입술을 적시고 말았다.
제발.
열어 주세요.
제발.
접촉을 통해 릴리엔의 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다미언의 마력이 그렇게 조르기 시작하자,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말았다.
혀끝이 닿았다. 숨이 얽혔다. 입천장으로 간지러운 짜릿함이 훅퍼졌다.
다미언은 맥없이 뒤로 넘어가는 릴리엔을 그러모아서 품으로 다급하게 욱여넣고는, 정신없이 릴리엔의 입술을 탐했다.
손만 잡고 정신적인 안식을 취할 때와는 달랐다. 그저 편안하기만 하지 않았다.
감각이 극대화되는 느낌이었다.
릴리엔의 모든 것이 달았다. 숨을 나누고 혀를 섞을수록 저릿저릿한 쾌감을 주는 용액을 뇌에, 신경계 전체에 퍼붓는 느낌이었다.
'자극이 너무 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끙끙거리고 말았다. 정신없이 구는 다미언을 받아들이기 바빴던 릴리엔은 조금 놀랐다.
혹시 자기가 그를 불편하게 짓누르고 만 걸까 싶어 걱정이 된 릴리엔은 얼른 다미언과 떨어지려 했다.
'안 돼……'
' …. 싫어.'
다미언은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남아 있는 일말의 이성이 첫 입맞춤에 이만하면 충분히 과했다고 그에게 경고했다.
릴리엔의 체력도 생각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궁정에 데뷔조차 못한 아가씨였다.
다미언이 여성들과 염문을 뿌릴 숱한 기회가 있었어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거라면, 릴리엔은 방탕한 사교계의 문화를 접해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질겁할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물론 아쉬웠다. 한참 모자랐다.
그런 속도 모르고 릴리엔은 호흡을 가다듬기 바빴다. 폐활량의 차이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서운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아쉽다 못해 섭섭하기까지 한 다미언과 달리 릴리에에게는 굉장히 벅찬 경험이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정순한 마력을 더 몸에 무리 없이 받아들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기보다는 너무 뜬금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눈에, 이번에는 믿지 못할 광경이 보였다.
“전하, 혹시 우셨나요?"
눈가가 붉어진데다가,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게다가 뺨 역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이 좀 멍해 보이기도 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황홀한 여운에 취한 채 다미언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였다.
8. 엉망진창 결혼식.
릴리엔의 완벽한 계획에 존재하는 한 가지 허점이라면, 어찌됐건 튜린 성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면 성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세드릭 이슬라르.
제후로서 완벽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은 젊은 지배자.
이 잘생기고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둘러싼 가십 중 가장 흥미진진한 건 바로 전무후무한 누이동생 사랑이었다.
성문 밖 상인들에게는 이미 이 젊은 가주가 여동생의 일이라면 참지 않고 지갑을 여는 걸로 유명해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수도의 상인들이 릴리엔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며 찾아올 정도일까.
'아가씨를 위한 최고급 마차를 디자인해 보았습니다!'
'설산에서 1년에 네댓 마리나 잡힐까 한 여우 털로 만든 외투입니다!’
'이국의 광산에서 채굴한 여왕다이아몬드입니다!’
물론 세드릭이 릴리에의 이름을 팔았다고 해서 저급의 물건들까지 구매한 건 아니었다.
품질만 보증되면 얼마를 부르든 다 샀을 뿐이다.
어머니에게까지 외면당했던 릴리에의 소유는 원래 아주 적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러 목록을 살펴보지 않으면 뭘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가 되었다.
이런 관계의 핵심에는 그들의 아버지가 있었다.
릴리엔에게 아버지는 잘 알기 어렵지만 존경할 만 한 분일 뿐이었지만 세드릭에게는 인생 전반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대장장이처럼 사정없는 망치질로 세드릭을 후려쳐 후계자로 제련해 낸 아버지.
모든 것이 완벽할 때 죽어 아들에게 자기를 넘어설 기회를 영원히 주지 못하게 된 사람.
세드릭은 후계자가 되는 법은 배웠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황제의 의문사, 가주의 죽음. 혼돈과 전운이 드리운 튜린에는 세드릭이 아니라 아버지가 필요했다. 미숙한 후계자가 아니라 가주가 필요했다.
그래서 세드릭은 애도와 극복대신 아버지의 모조품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던 깊은 절망의 바닥에서 그를 건져낸 게 바로 어린 릴리엔이었다.
'아마 본인은 그렇게까지 큰일을 한 줄 꿈에도 모를 테지만…….’
세드릭에게 릴리엔은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위안이 되어 주는 아이였다.
손 안의 보석이었다. 너무 아깝고 귀해서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 귀중한 여동생이 “아무래도 당장 결혼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세드릭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