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툭, 데구르르!
“이런, 오라버니!”
세드릭의 손에서 떨어진 펜대가 작성 중이던 기밀 서류 위를 화려하게 구르며 잉크를 흩뿌렸다.
당황한 세드릭이 펜을 주우려다가 팔꿈치로 잉크병을 쳤고 잉크병은 넘어지면서 화병을 쳤다.
화병을 주우려는 시도는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서류 더미를 흐트러트리며 장렬하게 실패했다.
와장창, 쿵탕!
정갈했던 집무실이 난장판이 되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세드릭은 마치 창졸간에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았다.
“릴리,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 겨, 겨, 결…….”
세드릭은 그 끔찍한 단어를 차마 발음조차 하지 못했다.
'결혼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정도가 아니었다. 길을 가다 날벼락을 맞는대도 이보다 충격적이진 않을 터였다.
세드릭은 마지막으로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농담인데 이 오라비가 잘못 들은 건…….”
"음, 아니에요.”
선량하지만 단호한 누이동생이 세드릭의 마지막 남은 희망을 톡꺾었다.
“오라버니!”
“가주님!”
알렌이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세드릭을 부축했다.
세드릭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줄은 몰랐던 릴리엔은 당황했다.
"그…… 나중에 다시 와서 이야기할까요, 오라버니?”
“아, 아니!”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세드릭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릴리엔을 보낼 순 없었다.
“대, 대체 왜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 말해 보렴.”
끔찍하다고까지 표현할 일일까.
릴리엔은 난감했고 의아했다.
“어차피 하게 될 예정인 결혼을 조금 앞당길 뿐인걸요.”
"그…… 야…… 그렇지만……."
충격 받은 주인을 부축해 자리에 앉히면서 알렌은 생각했다.
'잘하면 우실 수도 있겠는데.”
물론 이런 면에서 철저하게 둔감한 릴리엔은 전혀 몰랐다.
“제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에요. 튜린을 위해서 이 결혼은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해요.”
릴리엔은 다미언을 설득했던 설명을 반복했다.
어떻게든 이 결정을 무르게 하고 싶을 뿐인 세드릭마저도 일단 머리로는 납득하고 말 정도로 논리 정연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은 별개라서, 세드릭은 필사적으로 안 되는 이유를 쥐어 짜냈다.
“하지만 결혼은 보통 황제의 허가증을 받아서……."
거기까지 말하다가 세드릭은 멈칫했다.
……다른 집안이라면 몰라도 우리 이슬라르가 그 개잡종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없었다.
‘천하에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 개풀 나부랭이 같으니!’
세드릭은 이를 갈았다.
"안 돼, 어쨌든 지금은 안 된다.
나는 네 허가증에 서명할 준비가 안 됐어.”
“오라버니.”
몹시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로 릴리에이 서류를 꺼냈다.
“이런…….”
서류에 찍힌 직인과 문구를 확인한 순간 세드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좌악, 하고 종이가 두쪽으로 찢어졌다.
“복사본이에요.”
릴리엔이 조용히 충고했다.
“릴리!”
“오라버니.”
릴리에이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세드릭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최초에는 그가 이 결혼을 강행하고자 했고, 릴리엔은 거부했었다는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몸이라도 아이였을 때는 더 이것저것 챙겨줄 수 있었다. 발이 땅에 안 닿게 안고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도 못 안을 건 아니지만 릴리엔이 가주의 위신과 본인의 체면에 도움이 안 된다며 거절할 것이다.
세드릭은 엄격한 여동생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릴리에은 곤란해하면서도 꺾이지 않았다.
“저는 오라버니께서 가주로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실 거라 믿어요.”
맨 처음 이 혼담을 수락할 때, 그가 결혼을 뜯어말리게 된다고 알려주더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역전된 상황 앞에서 세드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이 상황은 그의 자업자득이나 다름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 *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다미언 루펜바인과 릴리엔 이슬라르의 결혼이 일주일 뒤로 결정되었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쁜 시기니까요.”
조세 징수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본격적으로 월동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었다. 게다가 대화의 참석을 위한 준비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튜린 성의 업무 분장표는 여전히 과로사하기 위한 계획표나 마찬가지인 상태!
“거창한 결혼식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물론 전하께서양해를 해 주셔야겠지만……"
다미언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이었지만 교활한 남자는 얼마쯤 자기 속내를 숨기고 점잖게 답했다.
“예, 얼마든지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된답니다.”
아이반은 다미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소름끼치게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충직한 수하인 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그렇지.”
다미언이 척 뒤로 손을 내밀자 아이반은 한숨을 쉬며 준비해 온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때 말씀드렸던 저희 혼전 계약서를 나름대로 준비해 보았습니다만…….”
릴리엔은 얼결에 서류를 받아들었다. 다미언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숙고해 보시고 다른 추가하실 내용이 있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아, 네…….”
팔랑, 릴리엔은 일단 서류를 넘겨 보았다. 그러나 한 줄씩 읽어 내려갈수록 릴리엔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전하,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보통 혼전 계약서는 '혼인 관계가 파탄에 이를 시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가 주된 내용이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미언이 준비해 온 계약서의 내용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점이 말이 안 되나요?”
“실례지만 전부 다입니다."
어디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따르자면 릴리엔은 결혼 증서에 서명하자마자 대공령에 귀속된 칸타쿤 별장을 비롯한 부동산과 몇 가지 히스토릭 주얼리들을 즉시 양도받게 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릴리엔은 혼인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만 하면 한 달에 한 번씩 50금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대공비로서 할당받는 예산과는 완전히 별개의 돈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경비 처리나 회계 보고를 할 필요 없이 마음대로 써도 되는 돈.
게다가 금화 세 개면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다. 말도 안 되는 거액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나면 릴리엔은 500금화를 일시불로 받는다. 1년이 지나면 1000금화였고 3년을 채우면 대공령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호반 도시 엑셀시어의 조세권을 받게 된다.
예전에 다미언이 언급했던 '다 미언 루펜바인이 외도를 저지를 시 재산의 절반을 릴리에 이슬라 르에게 양도한다.'는 조건까지 빠짐없이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릴리엔을 어처구니없게 한 조건은 바로……
“릴리에 이슬라르가 외도를 저지를 시, '10년간 이혼 청구를 할 수 없다.' 라니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릴리에에게 불리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이라곤 고작 그것뿐이었다.
아니, 불리하다고 할 수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외도를 하면 당장 이혼당하는 게 아니라 향후 10년간 이혼 불가 상태가 된다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릴리에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항이었다.
어쨌든 이 한 가지는 분명했다.
“불공정 계약입니다.”
지나치게 릴리엔에게 유리했다.
다미언이 재혼을 10번쯤 반복한 칠십 살 먹은 노인이래도 작성하지 않을 조건들이었다.
다미언은 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10년이 너무 길면 7년으로 줄일까요?"
“예?”
예상외의 답변에 릴리엔이 놀라 자 다미언은 약간 불퉁한 표정이 되었다.
“그도 너무 깁니까? 그렇다면 5년으로 하죠. 죄송합니다만 그 밑으로는 더 양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전하, 제 말은…….”
말이 전혀 통하질 않았다. 릴리 엔은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러나 타고난 침착성으로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전하. 이 조건들은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과분하다고요?”
다미언은 진심으로 놀란 모양이었다. 릴리엔은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대체 이 결혼과 그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냉정하게 말해 이 혼약은 일종의 거래였다. 그리고 릴리에이 생각하기에 다미언은 과도하게 값을 치르려 하고 있었다.
“예, 과분합니다. 제 양심으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다미언은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파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릴리엔은 다미언이 간도 쓸개도 다 내주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가여운 사람 같으니.’
하지만 다미언은 순진한 신부에게 사실 이건 당신이 한참 밑지는 거래라고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귀엽기도 하지.’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니.
태어나 한평생을 아귀다툼 속에서 살아온 다미언은 릴리에의 청렴결백함이 신기하고 귀여웠다.
'그나저나 참 큰일이군.'
다미언이 자기 신부에게 줄 수 있는 이점이라곤 넘치는 재력과 권력, 부수적으로는 그의 미모같은 세속적인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