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만약 릴리에이 그것들을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녀를 붙잡아야 한단 말인가?
골치 아프도록 고결한 사람이었다. 인간이라면 좀 인간답게, 미모에 홀리거나 재력에 혹하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발목을 잡기 쉬울텐데.’
내면의 괴물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다미언은 일단 평이한 표정을 유지하며, 쓱 잔머리를 굴렸다.
'어쨌거나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낫겠지.’
고결한 그의 신부가 너무 많이 받았다며 죄책감이라도 느껴 준다면 그것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받아 두세요. 다미언 루펜바인과 결혼하는 사람은 그 많은 것들을 다 받아야 마땅하니까요.”
다미언은 후일 릴리에이 후회하게 되거든 최소한 그의 돈으로라도 위로를 받길 바랐다.
하지만 릴리엔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불필요한 낭비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돈이 좀 많아서.”
자랑이 아니라 담백하게 사실을 알리는 말투였다. 릴리엔은 할말을 잃었다.
쇄금의 기사, 전前 제국군 전군 총사. 연이어 대승을 거둔 끝에 제국군 편제와 역사 속에 유일무이한 명예직, 대원수로 임명된 사람.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다미언 루펜바인.
그가 전쟁터에서 얻은 건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명예로운 칭호만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승리의 대가는 땅과 보물인 법!
쓰는 데 관심은 없었지만 주겠다는 걸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다미언은 약간 천문학적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릴리엔이 기겁하는 조건도, 사실은 축소된 것이었다.
아이반이 너무 퍼주면 상대방이 의심한다며 죽을 각오로 뜯어 말린 덕분이었다.
다미언이 난처한 척 눈썹을 팔자로 모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이제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어서 새로 계약서를 준비하기엔 너무 촉박합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먼저 제시한 릴리엔은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받아 주세요. 네? 어차피 저희가 결혼하면 제 것이 아가씨의 것, 아가씨의 것이 제것인 걸요.”
다미언은 구슬픈 태도로 입맞춤을 허락받았던 게 생각나 곰살궂게 굴어 보았다.
"음…….”
릴리엔의 얼굴에 난감함이 드러났다.
'어? 통하는군?’
다미언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입술이 사악 호선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게 아직이네요. 그렇죠?"
긴 다리로 훌쩍 낮은 테이블을 건너온 다미언이 릴리에의 옆자리에 앉았다. 의아해하는 릴리에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자.”
“?”
릴리에이 순순히 들고 있던 계약서를 내놓자 그가 계약서를 받아 옆으로 치웠다.
"......?"
계약서를 달라는 게 아니었나?
릴리엔은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다미언의 손동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마저도 예쁘게 생겼다. 길쭉하니 곧은 손가락에 반듯반듯한 손톱, 손등 뼈와 그 사이를 기어다니는 푸른 정맥의 조화가 조각 같았다.
촉.
"아.”
한눈이 팔린 릴리엔의 광대 언저리에 다미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전하, 저기…….”
릴리엔이 당황하며 눈으로 아이 반을 찾았다. 그러나 아이반은 이미 썩은 표정을 하고 뒷걸음질로 사라진 뒤였다.
다미언은 난감해하는 릴리엔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강아지 같은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마치 뭐가 문제냐고 묻듯이.
첫 입맞춤 이후로 다미언은 주기적으로 릴리엔과 접촉하려 했다.
한 번 입술을 맞대는 쾌감을 알고 나니 도무지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무작정 들이대지는 않았다. 다 미언은 마력 전달의 효율성을 근거로 댔고 항상 깨끗하고 담백한 얼굴로 사심 없는 척을 했다.
그가 죽을 만큼 노력한 덕분에 이 정도는 둘 사이에 있을 법한 일이 되었다.
이번에도 릴리엔은 거절하지 못했다. 난감해하면서도 어깨에 힘을 푸는 릴리엔을 보며 교활한 다미언은 생각했다.
"됐다.”
고대하던 대로 입술이 닿았다.
“으음.”
가볍게 입술이 닿았던 예전과 달리 코를 빗겨가며 맞물린 입술은 꽤 깊게 파고 들었다.
다미언은 당황으로 다물린 릴리 엔의 아랫입술을 자기 입술로 아프지 않게 물었다. 입을 벌려달라는 애교스러운 신호였다.
며칠 새 조금 익숙해졌다고, 릴리엔의 입술이 어버버하면서도 얕게 벌어졌다. 그 약간의 허락을 다미언은 놓치지 않았다.
“흡.”
"후으으…….”
아아, 역시 너무 좋다. 어쩌지.
뭉게구름이 머릿속을 덮는 것 같았다. 다미언은 고통을 사그라 트리는 쾌락을 좀 더 맛보기 위해 혀끝으로 길게 입술을 훔쳤다.
입천장을 스치는 간지러운 움직임에 릴리에이 저도 모르게 등줄기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등허리는 이미 바싹 붙어 앉은 다미언의 팔에 옴짝달싹못 하게 안긴 채였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아..'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다미언이 깊어진 입맞춤을 뒤로 물리며 앙, 하고 촉촉하게 입술을 베어 물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이건 좀. 사람을 구제하려는 의료 목적이라기보다 유희 지향적인 움직임이 아닌가?
릴리에이 고개를 살짝 뒤로 빼려는 찰나.
“아읍.”
귀신같은 다미언이 놓치지 않고 따라잡았다. 다시금 입술이 맞물렸다.
으으음, 하는 만족스러운 소리가 다미언의 목 안쪽에서 울렸다.
그는 의도적으로 눈을 반만 감았다. 릴리엔은 자연히 코가 맞물린 채로 가까이서 보이는 보랏빛 색채에 정신을 빼앗겼다.
계산된 행동으로 넋을 빼놓은다미언은 릴리엔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천천히 상체를 밀어붙였다.
그러면서도 입맞춤은 느린 호흡으로 간간히 애교스럽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며 계속되었다.
'?’
완급 조절에 속아 넘어간 릴리 엔은 어느새 긴 의자의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말았다. 다미언이 릴리엔의 허리를 껴안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릴리엔의 시선보다 약간 아래쪽에서 내려다보고 있어서인지 위기감은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힘이 빠져서 뒤로 누웠나봐.'
워낙 자연스럽게 유도된 탓에 릴리엔은 그렇게 착각하고 말았다. 다미언의 계획대로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
“조금 피곤하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릴리엔의 쇄골께로 안겨들었다.
물론 무게감을 싣지 않도록 주의한 움직임이었다.
"곤하신가요?”
"네에.”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다미언이 애교스럽게 코끝을 비볐다.
약초 연기가 몸에 배어서 그런지 릴리에에게서는 언제나 침향목 같은 향기가 옅게 풍겼다.
하지만 한 뼘 거리 안에 들어서서 살갗에 바짝 코를 대면 인위적으로 밴 연기 냄새 대신 릴리 엔이 가진 본연의 고유한 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체온 정도로 달아오른 향기는 조금 따끈하고, 햇볕에 잘 마른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다미언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뱃속에서부터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그 냄새를 아낌없이 폐부로 들이마셨다.
'좋아…….’
뭉게뭉게 멍해진 머리로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그 정도가 다였다. 다미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이 정도 입맞춤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많이 피곤하신가요?”
대답 대신 얕게 치근거리는 행동이 계속 이어졌다.
릴리엔이 눈을 굴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자 다미언의 금빛 정수리가 살랑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매끄럽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었다. 릴리에의 머리카락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차르르 풀어지 는데 반해, 다미언은 모질이 가벼웠다.
잘 눌러서 정리해 두지 않거나, 지금처럼 정리해 둔 게 흐트러지면 금방 포슬포슬해졌다.
'폭신폭신 해 보인다.…….’
릴리에이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다미언의 머리에 툭 얹었다.
"아.”
저지르고 나서야 좀 지나친 행동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미언에게서도 들려오던 편안하고 낮은 호흡이 뚝 멈췄다.
“전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더……."
릴리엔의 목덜미에서 다미언이 웅얼거렸다.
“더 만져도 돼요.”
“예?”
"싫으면 하는 수 없지만.”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듣고 있자면 그런 사실이 없는데도 묘하게 이쪽이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어투였다.
결국 릴리엔은 정직하게 '싫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며 다미언의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댔다. 하지만 아까처럼 대담하게 폭신해 보이는 정수리에 바로 손을 얹지는 못했다.
머뭇거리는 손가락은 다미언의 목덜미 바로 위쪽, 짧은 머리카락이 덮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으으응. 뜻밖의 호재에 다미언은 행복해졌다. 예민한 뒷덜미는 머리카락이 풍성한 정수리보다릴리엔의 손가락이 닿는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행복한 고양이처럼 노골노골하게 구는 다미언의 모습에 릴리에의 마음도 풀어졌다.
결국, 그날 헤어지기 직전에 다 미언은 혼전계약서에 릴리엔의 서명을 받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