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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54화 (54/155)

54화.

* * *

여러 가지 일로 바쁜 와중에 결혼식까지 준비하게 되었지만 튜린의 식솔들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불평을 하긴 했다.

그러나 릴리엔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일주일은 너무 짧아요. 여염집생일잔치도 이렇게 번갯불에 콩볶듯 하진 않을 거예요.”

헤이워스 부인이 총대를 메고 나서서 만류했지만 릴리엔은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리 호소해도 미안한 듯 웃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단호히 굴 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완벽한 결혼식이 아니에요.”

세드릭도 꺾지 못한 의지였다.

결국 헤이워스 부인이 눈물을 찍어 내며 물러서는 걸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이슬라르의 고집쟁이 핏줄 같으니! 결국 아가씨마저 이 핏줄을 물려받고 말았군요.”

그래서 모두들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튜린이 전의를 불태울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는 이슬라르가 고용인의 명예를 걸고 가장 완벽한 결혼식을 선보인다. 알겠나?”

“예!”

아마 릴리에이 예전의 릴리에이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열성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병을 앓고 난 뒤 릴리 엔은 변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나마 안주인 대리로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무슨 대단히 거창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낮 시간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그녀로선 뭘 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릴리엔에게는 돈이 있었다.

여동생 사랑이 지극한 오라버니로부터 이런저런 명분이 생길 때마다 받아 버린 처치 곤란한 재력!

처음에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특별 간식을 돌리는 걸로 시작했다.

큰 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차가운 물로 빨래를 하고 나서 혹은 불철주야 번을 서고 있을 때 '아가씨께서 고생이 많다고 고마워하신다.'며 나눠주는 따뜻한 음료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왜 이런 걸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따뜻하니까 좋긴 좋네요.”

사람들은 떨떠름하게 고마워했다. 그만하면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때부터 릴리엔은 조금씩 돈을 풀기 시작했다.

“모두들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여기 신청서를 쓰도록 하세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새책을?”

"아가씨께서 사용인 휴게실 비품 구입비를 넉넉히 쓰라고 하셨대요.”

“어머, 정말?”

“그래, 정말이란다.”

“헤이워스 부인!”

“오늘부터 집에 다녀올 차례가 된 사람은 모두 내게 들러서 휴가비를 받아 가렴.”

“세상에!”

"아가씨께 감사하는 것 잊지 말아야 한다.”

튜린 성에는 그간 제대로 된 안주인이 부재중이었다. 사용인들은 주인으로부터 사소한 인정과 배려를 받아 본 지가 대단히 오래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여주인을 모시는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슬금슬금 죄책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분이신 줄도 모르고…….”

“예전에 아가씨께서 부르는 걸 못 들은 척하지 말 걸 그랬어.”

“난 아프실 적에 꾀병이라고 철석같이 오해했지 뭐야.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근심하던 사용인들은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으니 그만큼 더 충성을 다하자고 결심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릴리엔의 결혼식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합니다.”

“암, 물론이지.”

나이 지긋한 집사와 요리장, 정원사가 한 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은 당연히 황궁에서 하시게 될 줄 알았는데, 허허. 일을 맡겨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구먼.”

“황궁 부럽지 않게 해 봅시다.

감히 오간 손님들이 튜린과 아가씨를 폄하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전의를 불태우는 와중에 누군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결혼식이 끝나면 아가씨는 더 이상 튜린에 안 계시겠죠"

“하…….”

사람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떠나시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이것뿐이고, 뭐…….”

“최선이나 다합시다. 그래서 결혼식이 언제라고요?”

지금부터 일주일 뒤라는 통고가 전해진 뒤 사용인들은 거의 반광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제정신이랍니까?”

“우리 릴리에 아가씨가 번갯불에 볶아 먹는 콩도 아니고!”

“대체 어느 미친놈의 대가리에서 그 양심 없는 일정이 튀어나왔답니까!”

당장에 죽창으로 허공을 찌를 법한 분위기는 ‘그 일정을 결정 한 사람이 바로 댁들의 릴리에 이슬라르다.'라는 한마디에 곧바로 진압되었다.

“아가씨……,어째서…… 일주일…….”

“이건 시험이야, 아가씨께서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시는 거야……. 반드시 성공해야 해....”

“성공하면 뭘 해요……. 아가씨일주일 뒤면 남의 집 식구로 가신다는데…….”

큰 충격을 받은 사용인들은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싹싹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왁스칠을 해서 성을 때 빼고 광냈다.

일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시름에 잠겨 비척비척 다니는 모습은 상당히 기묘해 보였다.

흡사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다만 이 우울한 좀비들은 몹시 근면 성실했다. 뿐만 아니라 특정인들에게만 적의를 보이는 습성이 있었다.

여기서 특정인이란 다미언과 마테오와 아이반을 비롯한 대공 일행을 의미했다.

'우리 릴리에 아가씨를 일주일만에 도둑놈처럼 채 가는 치들!’

'아가씨 같은 여주인을 모시게 되었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 해!'

‘저것들은 무슨 천운을 타고 나서 벼락을 맞지도 않지?'

‘얼른 무릎으로 기어 다니질 않고 뭘 하는 거야? 아가씨 앞에서 두 발로 걸어 다니다니 저 치들이 지금 제정신이야?'

……약간 광적으로 쏟아지는 눈총 속에서 주눅 들지 않고 행복 한 사람은 다미언뿐이었다.

마테오는 제 삼촌의 뻔뻔함에 냉소적으로 감탄했다.

“삼촌이 최전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저 철면피를 아무도 뚫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이반도 질렸다는 듯 동조했다.

어쨌든 일은 모두 다미언의 속셈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커튼을 다리고 장식할 꽃을 준비하고 성이 닳아 없어지도록 박박 쓸고 닦았다.

그중에서도 총 책임자인 헤이워 스 부인이 가장 신경을 쓴 건 주인공인 릴리엔의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사자가 협조적이지 않았다.

결혼식의 모든 면에서 그랬듯 웨딩 가운에 대한 릴리엔의 생각은 심플했다.

“있는 옷을 입으면 돼요.”

“아가씨!”

외마디 비명을 지른 헤이워스부인은 물론 감정 기복이 적은 리타까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주일 안에 옷을 맞추는 건 무리인걸.”

보통 드레스 한 벌을 급하게 맞춘다고 했을 때 3주가 소요된다.

릴리엔은 애초부터 특별한 결혼식용 드레스를 맞출 생각이 없었다.

예전 세상에서 였다면 아무리 무던한 그녀라도 드레스를 입어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실망했겠지만……

'이제 이런 드레스는 매일같이 입고 다니는 평상복이 됐는걸.'

게다가 릴리엔의 세상에는 아직 눈처럼 새하얀 순백의 웨딩드레스에 대한 인식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세상에. 이슬라르의 금지옥엽께서 결혼식 날에 새 옷하나 지어 입지 못하다니…….”

“칸타쿤에 가기 전에 오라버니께서 하도 준비를 철저히 해 주셔서 한 번도 안 입어 본 옷도 많잖아요. 그중에서 하나를 입으면 그게 새 옷인 거죠.”

릴리엔은 태연하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꾸며 봤자 신랑보다 눈에 띄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 릴리에에게는 다른 신부들에게는 없는 약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신랑 되는 남자가 출중해도 너무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눈이 부시는 후광 같은 백금발.

신비롭고 다채로운 보랏빛 눈동자!

어떻게 봐도 경국지색. 섬세한 붓으로 심혈을 다해 그린 것 같은 절세미인이었지만 훤칠하게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전쟁 영웅이라는 타이틀 덕에 결코 여성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크림 같은 피부에 야시시하게 찍혀 있는 점과 사랑스럽게 패여 있는 보조개까지. 못 갖춘 거 없는 다미언의 미모는 과장 좀 보태 무기나 다름없었다.

뒤구르기를 하며 봐도 넋을 잃을 만큼 황홀한 미인 옆에 서면 못생겨 보이느냐 아니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못생겨 보일 만큼의 존재감이라도 확보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된다.

“그,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요.”

직접 젖을 먹인 친자들과 세드릭 바로 다음으로 릴리엔을 사랑하는 헤이워스 부인조차 부정하지 못했다.

'우리 아가씨가 못난 건 아냐!’

가문의 선조들을 두고 맹세코 릴리엔의 탓이 아니었다.

헤이워스 부인의 사심을 빼고 봐도 릴리엔은 준수한 편이었다.

다미언 옆에 서 있을 때 평소보다 못생겨 보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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