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릴리에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은 멀리서 볼 때는 단순히 손으로 짠 레이스라고 생각한 장식이 실은 자잘한 진주를 레이스모양으로 매단 아주 호사스러운 장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신부는 관습대로 자신을 에스코트할 가장 가까운 남성 혈족, 세드릭에게 사뿐히 다가갔다.
곧 하얗고 기다란 손목이 우아하게 움직여 얼굴을 가린 베일을 살짝 걷어 올렸다.
“……비가 안 그치긴 했지만 계속 기다리게 하기 뭐해서 나왔어요. 그런데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약간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기껏 꾸며 놓은 식장이 무너졌고 결혼식이 망쳐졌다는 소식에 행여나 여동생이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랐지만……
“식장이 무너졌다고요? 벼락 맞은 나무 때문에?"
릴리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람들이 신부가 곧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겠다고 선불리 추측한 순간.
"풉.”
어?
릴리엔의 손 틈으로 새어 나온건 울음이 아니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웃음 같은 작은 소리였다.
아니 세상에, 그럴 리가 없지.
결혼식이 망쳐졌는데 웃는 신부가 어디 있나.
당황한 나머지 기침이 터진 걸 거다. 그렇게 자신들의 청력을 합리화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푸흐, 아하하, 세상에!”
부정할 수 없는 웃음소리였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일어날 수 있죠?”
기가 막힌다는 투였지만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얼이 빠진 세드릭에게 릴리에이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웃어서…….
아니, 비가 올 때부터 엄청 운이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식장까지 무너질 줄은 몰랐어요.”
일이 이렇게까지 망쳐질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고 웃겼다. 마치 시트콤 같았다!
하지만 열심히 준비해 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홀 안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린 신부에게 너무 놀란 나머지 다들 정색을 하고 있었다.
새파래진 채로 고개를 젓는 라니스터 부인 그리고 얼어붙은 일라시아와 솔라리아 자매를 발견하고 나서야 릴리엔은 진정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바로 그때.
끼이익…….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삐걱거리며 돌풍을 견뎌 온 낮은 창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머.”
사람들이 어떻게 뭘 해 볼 틈도 없이 기울어진 창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와장창!
“꺄악!”
그 근처에 서 있던 부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이쯤 되니 릴리에도 얼이 빠져 중얼거리고 말았다.
“망했군요.”
희극적인 광경을 마무리 짓는 완벽한 한마디였다.
"풉…"
그 말을 듣고 만 몇몇 사람들의 입가에 피식피식 실소가 깃들기 시작했다.
"왜 웃어요?”
“신부가 그러는데 이 결혼식 망했답니다.”
“어머.”
사람들은 일단 망극함에 입을 틀어막았다가 생각했다.
…가만, 이거 사실 아주 웃기는 일 아닌가?
결혼식 날에 벼락이 떨어져 가보나 다름없는 나무가 박살이 나고 식장이 무너지고 신부가 웃자 창문이 깨졌다.
그걸 보고 당사자인 신부는 자기 결혼식은 망했다고 총평했다.
……이 정도면 일부러 웃으라고 하는 일이 아닌가?
사실 아까 전부터 손님들은 '남의 결혼식'에 벌어진 이 기묘한 상황에 웃어 버리고 싶은 걸 눈치만 보며 꾹 참고 있던 차였다.
점잖게 수군거리기만 한 건 사실 그들 나름대로 당사자들을 생각한 배려였다.
그러던 중에 가장 속이 상해야 할 신부인 릴리에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인해 버렸다.
이 결혼식 좀 망한 것 같다고.
다들 생각했다.
“그러게.”
"거참.”
“날씨란 놈이 참 눈치도 없어요.”
피식피식하던 웃음이 서로를 찌르며 점점 커졌다.
와글와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웃음소리는 이내 곳곳에서 폭소가 되어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나 원 참, 어떻게 이런 날에 결혼식을 잡는담.”
“어머, 이이가! 남의 일이라고!
그런 말을 대놓고 웃으면서 하면 안 돼요, 실례잖아요!”
“당신이야말로 지금 웃고 있잖아?”
“그, 그치만……!"
망설이던 부인도 결국 남편과 눈이 딱 마주치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허, 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웃어도 되나.”
애써 점잖게 굴려는 신사의 입가에도 이미 웃음이 가득했다.
옆에 선 친구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킬킬거렸다.
“이 사람, 빼기는, 당사자인 신부도 웃었는데 우리가 좀 웃는 게 어떻단 말이오?”
“옳소!”
“하하하!”
마치 누군가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살다살다 정말 별꼴을 다 본다.”며 어쨌든 절대로 이 결혼식을 잊지는 못하겠다고 왁자지껄하게 웃어 댔다.
바로 그때였다.
“어머나?”
깨진 창문가를 용감하게 기웃거리던 한 아가씨가 탄성을 내질렀다.
“비가 그쳤어요!”
아가씨의 높은 목소리에 홀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창문을 바라보았다.
돈이 많은 이슬라르는 현관 한쪽 벽면 전체를 창문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창문에는 이미 맺혔던 이슬이 또르르 흐르고 있을 뿐, 새로운 빗줄기는 없었다.
비가 그쳤다.
“정말이네…….”
“그러게, 게다가 저길 좀 봐.”
누군가가 하늘 한쪽을 가리켰다. 물러가는 재색 구름 사이로 높고 푸른 하늘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늘이 개고 있어…….”
세드릭 역시 그 믿지 못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은사시나무가 싸르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바람이 저 먹구름을 걷어 내고 있었다.
“릴리에, 이게 대체……. 아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세드릭이 중얼거린 순간 릴리엔은 창가에 서 있던 다미언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가 너무 아름다운 데다 오늘의 신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다미언 주변으로 세 걸음 정도 공간을 비워 둔 상태였다.
먹구름이 채 물러가지 않아 실내는 아직 약간 어두웠고 창가 쪽은 밝았다.
다미언은 그 창가를 등지고 서 있었다.
릴리엔은 겨우 다미언의 훤칠한 실루엣만 알아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쳤다고 확신했다.
항상 그와 눈이 마주치면 등줄기에 짜르르 소름이 돋곤 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문득 릴리에이 나직하게 세드릭을 불렀다.
"음?”
“저, 좋은 생각이 났어요.”
* * *
튜린 지방에는 1년에 일주일 정도 가을이 끝날 무렵에 갑자기 날이 따뜻해지는 시기가 찾아오곤 했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겨울이 오는 걸 한탄하는 봄의 한숨이라고 했다.
날짜를 급박하게 앞당긴 결혼식이 우연히 이 ‘봄의 한숨'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에 릴리엔의 결혼식 피로연장은 야외에 마련된 상태였다.
"예? 피로연장을 확인하라니요?”
갑작스러운 릴리엔의 부탁에 헤이워스 부인은 난감했다.
건물이 박살난 마당에 고작 맨땅에 천막을 치고 마련해 둔 피로 연장이 살아남아 있을까?
모두가 회의적이었지만 일단 말을 꺼낸 사람이 릴리엔이었기 때문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하인 몇 사람이 피로연장의 상황을 확인하러 떠났다.
“그렇게 비가 내렸는데 거기가 멀쩡할까요?”
“조용히 해. 어쨌든 아가씨께서 확인해 달라고 하셨으니 가긴 가봐야…… 어?”
모두의 섣부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피로연장은 굳건히 살아남아 있었다.
가히 좀비에 가까운 생명력!
“그…… 멀쩡하네요.”
“그, 그러게.”
“포장을 칠 때 엄청 열심히 하긴 했는데……. 말뚝 한 번 박을 을거 두 번 박고…….
“천막도 새로 싹 기름을 먹이고 밀랍 칠까지 해서 두 겹으로 쳤었죠…….”
아가씨 가는 길에 꽃길이라도 깔아 드리겠다는 일념뿐이었던 순간을 떠올리자 두 사람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갑자기 이 믿지 못할 광경이 몹시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래, 그 정도 공을 들였으면 폭우 정도에 무너지면 안 되지.'
장하다, 우리 작품!
어쨌든 피로연장의 기적적인 생존 소식이 전해지자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인들이 몇 군데 손상된 부분을 손보는 동안 릴리엔은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했다.
“어머, 데운 술인 줄 알았는데.”
“잔이 신기하게 생겼네요. 아기 자기하고 예뻐요.”
“향기로워라…….”
“우유를 넣으니 맛이 색달라요.”
한바탕 웃음으로 유쾌해진 사람들은 생소한 대접도 달갑게 받아 들였다. 특히 귀부인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대화가 평소보다 더 즐겁게 느껴지 네요.”
“전 확실히 좋은 것 같아요. 술기운이 올라 흐리멍덩하게 떠드는 것 따윈 사실 딱 질색이었거든요.”
부인들의 기분이 좋아지니 신사들도 덩달아 유쾌해졌다.
잠시 후 피로연장이 완전히 준비를 마쳤다. 손님들은 삼삼오오짝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봐요, 날씨가 완전히 개었어요!”
“세상에, 거짓말 같아.”
“게다가 어쩜 이렇게 따뜻할까.
수도에서는 다들 털옷을 두르고 다니는데 말예요.”
“튜린에서는 이 시기를 '봄의 한숨'이라고 부른대요.”
“낭만적이어라……. 봄이 한숨을 쉴 때 결혼하다니."
“날씨마저 극적이잖아요. 하늘이 돕나 봐요.”
아까까지만 해도 다 망친 결혼식이었던 게 순식간에 탈바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