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슬이 영근 풀마다 햇살이 고여 반짝거렸다. 젖은 흙냄새가 상쾌했고 따뜻한 햇살이 훈기를 돋웠다.
그래도 모든 게 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날이 맑기는 했지만 먹구름을 물러가게 한 강풍이 시시때때로 불어 닥쳤기 때문이었다.
“어머, 내 모자!”
형형색색의 리본과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심하게는 헐겁게 고정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결혼식을 다시없을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그런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귀부인들끼리 서로의 옷자락이 날리지 않도록 잡아 주다가 안면을 트고 다정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자를 놓친 아가씨는 모자를 주워 준 청년과 대번에 애틋한 눈빛을 교환했다.
유쾌했다.
장내가 정돈되지 못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신부가 오라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시 등장했다.
못 보던 꽃다발이 그녀의 손에 있었다. 온실에서 정성껏 기른 보기 좋고 값비싼 겹꽃이 아니라 자잘하고 안개 같은 흰 들꽃 다 발이었다.
릴리에이 들꽃 다발을 선택한건 특별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식 내내 무겁고 큰 꽃다발을 제대로 들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였을 뿐이다. 어쨌든 눈썰미좋은 사람들은 그것까지도 눈여 겨보았다.
신부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기 시작하자 너무 신이 난 아가씨들 중 몇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 결혼식에서는 정숙해야 하는데!'
그러나 창피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뒤이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례적인 축복 속에서 베일 안릴리엔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들과 유쾌한 해결 과정.
그리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듯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결혼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까지….….
그때 릴리에의 눈에 단상 앞에서 있는 다미언의 모습이 보였다.
다미언은 독수리 날개를 형상화한 은빛 견장이 달린 검은색 제국군 정복을 날렵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공을 들여 꾸민 것 같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훨씬 더 농익어 흐드러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 회장 안에 그 어떤 누구도 저 미모에 필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베일을 쓰기로 결정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릴리 엔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신부가 전례 없는 베일을 뒤집어 쓴 건 공들인 연출 같은 게 절대 아니었다.
절세미인 옆에서 적나라하게 평가당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뿐!
냉엄한 현실 덕인지 기분이 조금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릴리엔은 자기가 여태 조금 들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이런.
삽시간에 손이 차갑게 식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유쾌한 분위기에 휩쓸려서 스스로를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생각해 버린 게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이제나마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릴리엔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그저 결혼일 뿐이야.'
서로에게 좋은 인상 외에는 아무 감정도 없는 두 남녀가 만나서 정치적 유대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협력 관계에서 더 발전할 여지는 없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겠다고 스스로의 입으로 저 남자에게 약속했다.
“릴리, 괜찮으냐?”
“……네.”
릴리엔은 평소대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괜찮아야만 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세드릭이 다미언의 손 위에 릴리엔의 손을 건네주었다.
마음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했던 거대한 착각이 너무 부끄러웠던 나머지 릴리 엔은 저도 모르게 팔을 흠칫 움츠리고 말았다.
"!”
그러나 릴리에이 손을 빼는 것보다 다미언이 그녀의 손을 아프지 않게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게끔 움켜잡는 게 더 빨랐다.
릴리엔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초대된 손님들 앞에서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다미언의 대응에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단상 앞에 성직자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일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긴장한 릴리엔은 다미언이 손을 빼려는 몸짓과 이어진 한숨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성직자가 물었다.
“사람, 다미언 발미에라 에른스트 루펜바인과 릴리에 마리 에스타드 이슬라르는 오늘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엄위하신 신의 종인 저, 로드릭 에스타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 분의 관계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약간 긴장하고 있던 릴리에이 다미언보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성직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견습 성직자가 벨벳을 씌운 증서 하나를 가져왔다.
튜린의 제후, 세드릭 이슬라르의 이름으로 발행된 혼인 허가증이었다.
먼저 다미언이 펜을 들어 서명을 남기기 시작했다. 다미언의 공식 칭호가 워낙 휘황찬란한 덕에 서명을 다 마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루펜바인의 대공, 헤멘린나 선제후, 헤멘린나의 공작, 알트 해의 대선장, 팔미앵의 백작, 명예로운 제국군 대원수, 철사자 기사단장이자 쇄금의 기사, '임페라 토르 레옌그라드’ 다미언 발미에라 에른스트 루펜바인.]
…다미언이 빠르게 서명을 휘갈겼음에도 마지막 방점까지 찍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서명을 마친 다미언이 직접 펜을 건네주었다. 릴리엔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이제까지 그녀는 그저 튜린의 레이디 릴리에 이슬라르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었다.
긴장된 상황에서 낯선 이름을 서명으로 남기려니 자연 머뭇거리게 되는 릴리엔을 다미언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곧 릴리에도 서명을 시작했다.
[루펜바인의 대공비, 헤멘린나의 레이디, 튜린의 레이디, 헤멘린나의 공작 부인, 알트 해의 여주인, 팔미앵의 백작 부인…….]
거기까지 적었을 때 다미언이 갑자기 귓가에 속삭였다.
“……라고 적어요.”
“........”
흠칫 놀랐으면서도 릴리엔의 손은 빠르게 움직여 다미언이 불러 준 한마디를 더 추가했다.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 릴리엔 마리에스타드 이슬라르 루펜바인.]
마침내 그렇게 혼인 증서에 마지막 방점이 찍혔다.
“이로서 두 분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두 분, 신실한 관계에 대한 약속으로서 서로에게 입맞춤을 하셔도 좋습니다.”
다미언이 말없이 릴리에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전쟁에 능숙한 남자의 손이 조금만 힘이 들어가면 찢기고 말섬세한 베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리고 마침내 신부와 마주한 순간 사람들이 감탄을 흘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미언은 신부의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신부. 이제 명실상부하게 그에게 속하게 되어 버린 가엾은 릴리에.
광폭한 환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다미언의 입가에 천천히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전하..
“가여운 내 아가씨.”
말로는 가엾다지만 눈빛이 조금 무서웠다. 본능적으로 흠칫하는 릴리에에게 다미언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무르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릴리에이 ‘뭘요?'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다미언이 성큼 거리를 좁히는 게 더 빨랐다.
“흡.”
창졸간에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사락, 하고 베일이 다미언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때마침 적절하게 바람이 불어 긴 베일이 두 사람을 완전히 덮었다.
덕분에 다미언이 인내심 없는 입맞춤으로 허겁지겁 릴리엔을 집어 삼키는 모습이 얼마쯤은 가려졌다.
“응……. 음.”
이렇게 긴 입맞춤은 조금………
외설적이지 않나?
릴리에이 콧잔등을 설핏 찌푸리 는데 그제야 겨우 젖은 입술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베일 안, 연푸른 눈과 보랏빛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미언이 먼저 웃었다. 담뿍 머금은 눈웃음은 다정하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아무 데도 못 가.
순수란 희열이 기저에 깔린 목소리에 릴리엔은 이유 모를 선뜩함을 느꼈다. 스스로가 다미언을 상대로는 유독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왜일까. 생각에 잠겨 그를 바라보는 릴리엔의 입술에 다미언이쪽 하고 애교스럽게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오해가 엉망진창으로 달리는 기관차처럼 서로를 엉뚱한 목적지에 데려다 놓은 채.
결혼식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