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58화 (58/155)

58화.

* * *

결혼식이 끝났으니 초대된 손님들은 먹고 마시고 밤새도록 놀며 흥겹게 축하하는 일만 남았다.

홀의 양옆에 긴 테이블을 놓아음식을 차려 놓고 비어 있는 가운데 공간에서 음악과 춤을 즐긴다.

음식은 질릴 정도로 많게, 춤은 절로 웃음이 터질 정도로 정신없이 추는 게 정통 제국식 연회였다.

연회가 시작되고 흥이 오르다보면 다들 예의니 격식이니 하는 것을 한 꺼풀쯤 벗게 마련이었다.

다만 축하연의 주역은 신랑과 신부가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는 신방에 들어가 함께 밤을 보냄으로서 진정한 부부가 될 의무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제쯤이면 신방에 들어갔을까?”

“솔라리아!”

그렇다고 해도 갓 데뷔한 여동생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일라시아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다들 흥청망청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방정맞게 입을 놀리면 못 써!”

“궁금하잖아. 릴리 언니가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는걸. 튜린 후께서도, 대제후께서도 그렇게 귀애하셨는데.”

솔라리아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금방 아이가 생기면 소로리티모임에도 자주 못 나올 거 아니야. 정말 너무해.”

솔라리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한결같이 릴리엔이 좋았다. 정말 좋아하는 언니, 일라시아와 비슷 한 분위기에 보다 다정하고 엄격하지 않아서였다.

동생의 질문이 부적절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일라시아는 안도했다.

“요즘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방을 차리는 경우는 드무니까, 네가 추측하는 일은 없을 것 같구나.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입을 다물렴.”

제국의 혼인 관습은 원형으로부터 많이 변질된 상태였다. 이유는 바로 빈번한 전쟁 때문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황제의 발밑에 제국이라는 연합으로 묶였으나 결속력은 아직 미약했다.

모든 귀족들은 전쟁을 통해 땅을 차지하고 세력을 넓히고 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서는 꿈을 꿨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은 곧 동맹을 의미했다. 그리고 빈번한 전쟁 속에서 동맹 역시 수없이 깨졌다.

심하게는 아침에 결혼을 했다가 저녁에 이혼을 했고 더 심하면 아침에 결혼한 신랑이 점심에 전사해 저녁에 재혼을 하기도 했다.

제국인들에게 결혼은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만 하는 무거운 맹세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가벼운 약속에 불과했다.

제국의 귀족들 간에는 부부 관계를 아예 가지지 않는 부부도 꽤 많았다.

“정치적 결합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부부간의 밤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게 나아요.”

“그럼요. 상황이 급변할 수도 있는데 재가할 때는 아무래도 아이가 없는 게 덜 복잡하죠.”

“그럼요. 관계는 애인이랑 가지는 게 여러 모로 안전해요.”

부부 관계보다 애인과의 관계가 더 일반적이 되어 버린 시대.

다미언과 릴리엔은 혼인 서약으로 묶였으나 그 결합이 견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추측했다. 아마 다미언은 모든 정략결혼에서 흔히 하듯 빈 신방에 홀로 들어 밤을 보낼 것이다.

“쓸쓸하기도 하지.”

“각자들 애인과 더 불타는 밤을 보낼 수도 있잖아요.”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군.”

귀족들 사이에는 그렇게 반쪽짜리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여기 다미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나는 그만큼 참아야 한다는 거지…….”

다미언은 그렇게 스스로의 욕심을 달랬다. 하지만 짜증이 난 손가락이 습관처럼 칼자루에 매달린 매듭 수술을 만지작거리는 것까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마음이 가라 앉지 않았다. 뜨겁게 들끓는 머릿속에서는 식장에서 서명을 망설였던 혹은 그렇게 보였던 릴리 엔의 모습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공을 들여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젖은 줄도 모르게 스며들려고 그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손에 잡혔던 건 그림자였어.'

평생을 이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걸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 불안한 건 참을 수 있다.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하게 붙잡지 못하는 사이에 릴리에이 떠난다면?

마테오가 무사히 황제가 되고 나서 ‘우리 정략은 이제 의미가 없다'면서 다른 남자와 재혼하겠다고 말한다면?

이를 악무느라 턱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에 핏대가 섰다. 자연 발걸음도 거칠어졌다. 다미언은 그대로 거칠게 신방의 문을 벌컥열어젖혔다. 소리가 좀 크게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빈방일.....!'

…터야 했는데.

"오셨네요?”

빈방이 아니었다.

릴리에 이슬라르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차분하게 웃는 선한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는 맹한 그녀도 긴장을 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릴리엔을 바라보는 다미언의 표정에 겉으로 드러나는 큰 변화는 없었다. 아주 미세하게 살펴보면 동공이 약간 확장된 정도?

침묵 끝에 다미언이 낮게 물었다.

“그 옷은?”

"네? 아, 이거요…….”

배시시. 릴리엔은 어색하게 웃었다. 낯이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전하 것이에요.”

품이 큰 남성용 가운이 릴리에의 가느다란 몸을 전부 감싸고 있었다. 그 밑으로 비죽 드러나 있는 가지런한 분홍빛 발끝만 약간 보였는데…….

다미언은 입술을 약간 축였다.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남자 몸의 기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릴리엔은 다미언의 침묵이 자기 옷을 마음대로 입은 것에 대한 책망이라고 착각했다.

“너무 추워서 잠깐 빌렸어요......"

입술을 오물거리며 변명하는 릴리엔을 바라보며 다미언은 생각했다. 이 한숨인지 눈물인지 하는 따뜻한 시기에 불을 땐 방에서 추워하고 있었다면……. 그건 옷차림의 문제였다.

꿀꺽. 목울대가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다미언은 마지막으로 확인차 물었다.

"어째서 예에 계십니까?”

릴리에이 눈을 굴렸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보아서 당황했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야…… 저희가 부부가 되었으니까요?”

고백하건대 다미언의 이성은 거기서 얼마쯤 끊기고 말았다.

안타까운 점은 릴리에이 순간 굳어버린 다미언의 태도를 곡해 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저는 전하께 부부관계를 강요하고자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제 몸 상태로는 당분간 어려울 테니, 몸을 삼가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렇…습니까.”

“네, 안심하세요. 저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는 환자가 아닙니다. 제가 여기 와 있는 건 다….”

“저희 결합이 밖에 와 있는 제 흥청망청한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보였으면 해서 그러신 거 죠.”

“네, 정확하세요.”

이해해 주시니 기쁘다며 릴리엔은 다미언의 가운 밑으로 드러난 발을 꼼질거리며 웃었다. 다미언은 울고 싶었지만 동시에 웃고 싶어졌다.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마른 세수를 하는 척하며 다미언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췄다.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초대된 손님들에게 금괴라도 하나씩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의심이 저 사심 없는 사람을 신방으로 등 떠민 셈 아닌가!

'다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다미언은 빈정대듯 생각했다.

심정만으로는 '이 결혼이 얼마나 가겠어요 하고 떠드는 얄미운 인간들을 한 명씩 얼싸안고 뺨에 키스라도 날려 주고 싶었다. 덕분에 이 결혼이 보다 오래 갈 것 같다고 예쁘게 웃어 주면서.

“전하?”

기쁨을 감추기 위한 다미언의 침묵이 길어지자 릴리엔은 아차했다.

“불편하시면 따로 잠자리를 만들게 하겠습니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제가 내려가면 돼요.”

"흐음.”

다미언의 표정이 대번 뾰로통해졌다.

“추위를 타는 새신부를 바닥에서 재운 새신랑이 되란 말입니까?”

“벽난로 앞 깔개에 자리를 깔라고 하면 돼요. 더 따뜻할 거예요.”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릴리엔을 보며, 다미언은 이쯤 되면 이 사람이 어디까지 둔할 생각인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자리를 따로 깔게 둘 수는 없지.'

노련한 신랑은 곧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음, 하지만 신방에 이부자리를 나르는 걸 누가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회가 벌어지는 날이다.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손님들이 연회장 안에 얌전히 있기만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릴리에이 시인했다.

“그도 그렇네요.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그래서 좋은데요.”

“네?”

“별말 아닙니다. 어쨌든 이렇게 된 거 별 수 없지 않을까요?”

다미언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상황을 짜증스럽게 받아들이는 기색은 없어서 릴리 엔도 안도했다.

“침대는 넓으니까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이랍니다.”

방긋 웃는 다미언의 얼굴에서 흑심 같은 것은 요만큼도 찾아볼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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