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그 밤은 릴리엔이 태어나 살면서 겪은 모든 밤 중에 가장 어색한 밤이었다.
공적인 목적이 있다고 쳐도 ‘첫날밤'이라는 상황 앞에서 한 점흔들림 없이 태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인기 척 때문일까. 릴리엔은 속눈썹을 버스럭거리며 조금 일찍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음…….”
릴리엔은 본디 잠에서 명확하게 깨어나는 재주가 없었다. 몽롱한 상태로 그녀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움직이다가 다시 가물가물잠겨들 때쯤…….
“….…일어났어요?”
“!”
귓바퀴 바로 뒤쪽에서 낯선 저음이 들려왔다. 다미언이었다.
“아직 너무 이른데……. 좀 더 자도 괜찮아요.”
“아, 저기…….”
다미언이 릴리엔의 허리를 굵은 동아줄처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관절 마디가 다 녹아 사라진 것 같이 풀어져 있던 릴리 엔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고 다미언의 품속으로 조금 더 깊숙이 안겼다.
‘언제부터 이렇게 안겨 있었지..'
릴리엔은 소리 없이 당황했다.
하지만 잠결인 다미언에게 이것 좀 놓아 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너무 민망할 것 같았다.
'일단 시키는 대로 자는 척 하자.’
다미언의 잠이 깊어지는 대로 품에서 빠져나올 계획을 세우며 릴리엔은 눈을 감았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물론, 잠이 올 리는 없었다.
“으음…….”
가만히라도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다미언이 마치 음미라도 하듯 짙은 감탄사를 내며 뒷덜미로 파고들었다. 지근거리에서 듣기엔 너무 농밀한 목소리였다.
예민한 피부에 난생처음 남의 숨결이 닿는 것도 좀…… 싫다기 보다는 벅찼다. 허리가 짜르르떨리는 것 같아, 릴리엔은 혼자 얼굴을 붉혔다.
“……왜 이렇게 잠을 못 자요? 아직 일어날 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릴리에이 흠칫 굳었다. 가슴 벅찬 귀여움을 참지 못한 다미언이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날이 밝아서 그런 모양인데 커튼을 좀 내리고 올게요.”
다미언이 몸을 일으키자, 빈자리로 즉시 한기가 스며들었다.
릴리엔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등 뒤에서 안정감 있게 저를 받쳐 주고, 온기를 전달해 주고, 꼭 안아서 기분 좋게 압박감을 주던 사람이 자리를 비운 허전함은 생각보다 컸다. 릴리엔은 조금 더 몸을 웅크렸다. 그때였다.
"아.”
"…많이 추워요?”
걱정스럽게 어깨를 짚은 손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갸름한 얼굴에 서늘한 새벽빛이 드리워 있었다. 장난기로 빛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보랏빛 눈동자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아니, 그저 조용하다기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것 같기도 했고……다정한 것 같기도 했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더 누워 있어요.”
“……네.”
얌전히 대답하는 릴리엔을 보며 다미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침대의 커튼 줄을 당기자 순식간에 아늑한 어두움이 두 사람을 감쌌다.
“자.”
다미언이 다시 이부자리 안쪽, 릴리엔의 등 쪽으로 가까이 파고들었다.
"이제 그만 다시 잠에 들까요."
“전하…….”
너무 가깝다. 그렇게 생각한 릴리엔이 입을 열려는 순간, 다미언이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해뜨기 전이라 그런가, 좀 춥네요…….”
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춥다는 사람을 밀어내자니 너무 매정할 것 같아서 릴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기초대사량이 월등하고 신진대사가 활발한 덕에 다미언의 체온은 어린아이만큼이나 높았다. 따끈하고 든든한 품 안에서, 안 그래도 몹시 피곤했던 릴리엔은 금새 풀어져 잠이 들고 말았다.
다미언은 노곤노곤하게 잠이 든 아내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몽롱한 평화로움에 잠기는 듯 했다.
"아, 세상에…….”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절로 신음소리가 끓어올랐다.
역시 이 세상은 잘못됐다. 이토록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도 발을 잘못 디뎌 그 같은 괴물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만, 나는 이 순간만을 아주 간절히 기다려 왔어요.”
굶주린 괴물에게는 과분한 성찬. 몰염치한 괴물은 세상의 부조리가 딱 한 번 허락해 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 부드러운 살과 뼈대부터 연약한 육신, 누구보다 고결한 정신까지.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꼭꼭씹어서 삼켜 버릴 것이다. 체면 차리지 않고, 자존심 세우지 않고,이 세상에 릴리에 이슬라르의 뼛조각 하나, 핏자국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몽땅 삼켜버릴 것이다.
“당신에게는 아마 봉변이겠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평생 모르게는 해 줄게요.”
미안해요.
용서하지 말아요.
9. 다미언은 몰랐다.
튜린은 3일 동안 주연을 배설했다.
신랑과 신부가 신방에 들었다는 소식에도 손님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연극에 꽤나 공을 들이려는 모양이에요.”
“하기야, 이게 대체 얼마짜리 동맹인데요.”
"어쩌겠어요, 장단 맞춰 줘야지.”
다행히 쑥덕거림은 이 정도 선에서 그쳤다.
사람들이 알아서 눈치를 살핀건 아니었다.
“제멋대로 떠드는 걸 더는 좌시할 수 없네요. 대공비 전하는 우리 소로리티 소속이에요."
“동감이에요. 서로 돕고 사는 게 소로리티의 철칙이죠.”
이렇게 마음을 먹은 <은방울꽃소로리티〉가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결혼식 당일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는데도 분위기가 유쾌하게 흘러간 건 이 아가씨들의 덕이 컸다.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릴리엔과 결혼식을 변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호의적인 태도와 웃음을 자연스럽게 전염시킨 그녀들의 활약은 그날 릴리 엔에게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분위기가 호의적이면 뭘해도 되는 법이다.
“안 그래도 비전하께서 우리 소로리티의 격을 높여 주셨잖아요.”
릴리엔의 소로리티 동기들은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앞자리에서 결혼식을 지켜볼 특권을 얻었다.
게다가 릴리엔은 소로리티 아가씨들을 위해 통일된 디자인의 브로치를 선물했다.
새하얗고 흠 없는 진주를 올올이 엮어 은방울꽃 형상을 만들어낸 브로치는 아주 예뻤다. 그 예쁜 브로치를 가슴팍에 일괄적으로 장식한 아가씨들이 앞줄에 가지런히 정리한 색연필처럼 모여앉아 있으니 사람들의 주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저 아가씨들은 대체 뭔가요?”
“대공비 전하의 소로리티 동기들이래요.”
비슷하게 싱그러운 나이의 아가씨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누구하나 못나 보이지 않고 다들 예뻐 보였다.
“세상에, 다들 굉장히 출중한 한 아가씨들이네요.”
자연 어깨가 으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눈에 띈덕인지 바덴 백작의 장녀인 착한 소피아는 이날 밤에 청혼을 받기도 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그분의 명예를 지켜 드려야 도리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은방울꽃 소로리티〉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를 넘는 말들이 오가지 않게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는 릴리엔과 비슷한 시기에 〈은방울꽃 소로리티〉에 데뷔한 동기 아가씨들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선배나 다름없는 귀부인들도 나섰다.
“같은 소로리티 아가씨의 명예가 훼손되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릴리엔과 동기인 딸을 둔 부인들도 열성적이었다.
“비전하께서 우리 딸을 그토록 대우해 주셨는데 어미 된 도리로서 이거라도 보답해야죠.”
부인들과 아가씨들은 너무 심한 말이 나온다 싶을 즈음엔 눈살을 찌푸려 눈치를 주거나 화제를 돌렸다. 아예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대화를 끝내 버리기도 했다.
덕분에 뒷이야기는 가십을 즐기는 선에서 흐지부지 끝났고 신랑 신부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3일간 불철주야 노력한 동기들은 마지막 날에 다시 한번 모였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대선배이신 라니스터 대부인께서도 몹시 흡족해 하셨어요. 이거야말로 소로리티 정신이라고 하시면서요.”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에서 불만스러워 보이는 건 솔라리 아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정말 말을 너무 막 했어. 아직도 생각하면 화가 나.”
아가씨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솔라리아는 예전부터 비전하를 일편단심 좋아했잖아요.”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지.”
차분한 목소리가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솔라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그녀가 처음 눈을 본 강아지처럼 벌떡 일어났다.
“릴리에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