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런.”
“솔라리아!”
왈칵 달려들려는 솔라리아의 어깨를 일라시아가 잡아챘다.
“조심 좀 해! 너 이러다가 또 비전하를 쓰러뜨리겠어.”
“이번엔 조심하려고 했단 말이야.”
변함없는 자매의 모습에 릴리에 이 후후 웃었다. 입술을 삐죽이던 솔라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안겼다.
“언니.”
키가 작은 솔라리아의 머리는 딱 릴리엔의 가슴팍에 안겼다.
릴리엔이 너그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솔라리아.”
“왜 또!”
일라시아가 한숨을 쉬며 타일렀다.
“비전하라고 해야지.”
솔라리아가 울상을 지었지만 릴리에도 편들어 주지 못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기본적인 칭호가 지켜지지 않으면, 릴리엔의 위신도 위신이거니와 솔라리아의 평판마저 떨어질 수 있었다.
솔라리아도 그를 알기에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고쳐 말했다.
“비전하."
“잘했다.”
릴리에이 얼른 치하해 주었다.
하는 양이 귀여운 나머지 슬그머니 당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사석에서라면 계속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아.”
릴리엔은 일부러 일라시아와 다른 아가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라시아의 얼굴에도 조심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바쁘실 텐데. 굳이 얼굴을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비전하, 자리를 만들어 드릴까요?”
소피아가 신중하게 권했다. 바쁜 릴리엔을 붙잡게 될까 봐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다들 출발 채비가 늦어지지 않도록 잠깐만 실례할까요."
릴리에이 사양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아가씨들은 굳이 처음부터 릴리 엔의 결혼을 화제로 올리지 않았다. 너무 사적이거나 불편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배려한 것이었다.
소녀 시절을 함께 보낸 열한 명의 아가씨들은 그런 얘기 없이도 얼마든지 화제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서로의 데뷔가 어땠는지 순서대로 이야기하며 한담을 늘어놓다가, 화제는 소피아가 받은 청혼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못했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지만 소피아 양 어머니께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짓궂은 말투에 소피아의 얼굴이빨개졌다. 다들 소리 내서 웃는데 문득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비전하께서 설마 데뷔를 하기도 전에 결혼을 먼저해 버리실 줄은 몰랐어요."
릴리엔의 결혼이 아예 화제에 오르지 않는 것도 이상할 때쯤이었다.
“언제고 결혼을 하실 줄이야 다들 알고 있었지만요.”
“결혼식 정말 멋졌어요. 요새 유행하는 통속 소설에 나오는 완벽한 결혼식보다 더 벅찼다니까요.”
“구텐베르크 경이 통속 소설을 읽으라고 금속 활자를 발명한 건 아니시지만 어쨌든 우리의 윤택한 삶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편이죠. 가장 큰 수혜자로서 하는 말인데 다음 달 신간 여주인공들은 죄다 폭우 속에서 결혼식을 할 걸요. 장담해요.”
가장 성격이 거침없는 뤼슬이 익살스럽게 말하자 다들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결혼식이었는데도 소로리티 동기인 여러분이 마다 않고 참석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어요."
“어머, 저희가 뭘 했다고요.”
사람 심리가 내심 잘했다고 생각한 일도 대놓고 칭찬을 받으면 수줍어지는 법이었다.
“내방해 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에 약소하나마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봤어요.”
리타가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하인들이 똑같이 포장한 상자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선물이요?”
"어머, 바쁘셨을 텐데.”
제국에 결혼 답례품을 주는 관습이 없었다.
하긴, 다 좋았던 이 결혼식에 딱 하나 없었던 게 바로 '전례’아닌가. 아가씨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을 받았다.
“모두 똑같은 선물이에요. 개별로 특별하고 기억할 만한 물건을 드렸다면 좋았겠지만 여의치 않았네요. 그래도 여러분들껜 제가 직접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어머, 무슨 말씀을 하세요."
“이것만해도 어마어마하게 품이 드셨겠는걸요.”
소로리티 동기들이 대화의 때 황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지는 동안 다른 손님들에게도 속속 선물이 도착했다.
"어머나, 이게 뭔가요?"
“대공 전하 내외와 튜린 선제후께서 드리는 답례품입니다.”
“답례품이라고요?”
겪어 보지 못한 일에 역시나 사람들은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선물을 풀어 보자 당황은 감탄이 되었다.
대공령의 보석 광산에서 캔 원석에 돈을 주고도 사기 어렵다는 질 좋은 실크 원단, 좋은 술과 찻잎 같은 고급 특산품들이 비로 드 상자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먼저 반응한 건 신사들이었다.
“이슬라르의 백합 이슬! 이건 정말 좋은 술인데. 손님 대접용으로 딱이겠어.”
손님에게 좋은 술을 대접하는 건 집주인의 면을 세우는 법이었다. 안 그래도 손님 대접할 일이 많은 화의 기간에 유용할 선물이었다.
안주인들의 만족도도 바깥양반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질 좋은 비둘기 실크네요. 당장 가서 새 장갑하고 모자를 만들라고 해야지!”
“보석도 등급이 괜찮은 물건이에요. 안 그래도 알이 굵은 브로 치를 가지고 싶었는데.”
“이건 그때 결혼식 전에 마셨던 차래요. 안 그래도 조금 얻어 갈수 있을까 싶었는데! 구차한 소릴 안 해도 되게 생겼어요."
작정하고 구하려고 들면 구하지 못할 물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잔다란 물건들을 한데 모아 정성껏 포장해서 풀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받는 입장에서야 재미있는 선물이지만 이 많은 손님에게 이걸 하나씩 돌리려면 돈이 엄청 들었겠어.”
"그러게요. 그나저나 메시지 카드가 있네요. 보자, 이건 새 신부께서 보내신 것 같은데.”
성정을 나타내듯 단정하나 약간 힘없이 흐르는 필체로 신부는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았던 자리에 아낌없는 축복으로 화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잘한 물건이나마 기념으로 삼아 제 이상하고 멋졌던 결혼식을 오래 기억해 주세요.]
"어머나…….”
소박하고 겸손하고, 그래서 귀엽기도 했다.
“대부호인 이슬라르치곤 신부의 꾸밈이 좀 실망스럽더니, 결혼식 비용을 죄다 손님 대접에 쓸 요량이었나 봐요.”
그러고 보면 선물뿐 아니라 주연에 나온 음식도 아주 훌륭했다. 형편없는 파티장에서는 레모네이드를 조그만 잔에 반만 채워 주거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음식이나 술의 질이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튜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풍족했고 화려했다.
“이만하면 황궁에서 치르는 결혼식보다 돈이 더 들었겠어요.”
“나쁘진 않아요. 제 말은 그러니까 그 드레스도 사실 잘 어울렸잖아요?”
좋은 음식과 술을 배불리 얻어 먹은 데다 선물까지 들어가니 자연 말이 곱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예리한 귀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새 대공비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네요.”
“연회 내내 소로리티에서도 얼마나 역성들을 들던지.”
“평소에 대공비가 인망이 없었으면 그만큼 나서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이렇게 손이 큰데 인망이 없기가 더 어렵죠.”
“돌아가신 대제후께서 일찍이 대공 전하의 배우자감으로 점찍어 놓고 귀애하셨다잖아요. 그 까다로운 분 눈에 들었다면 보통 내기는 아닌 거죠.”
“화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볼 만하겠어요. 황궁에는 그 여자가 있잖아요?"
귀부인들이 비밀스러운 눈짓을 교환했다. 그래도 아직은 새 대공비보다는 수도에 단단히 파리를 튼 공식 정부의 우세가 유력하게 점쳐진다는 투였다.
각자 계산을 마친 손님들이 돌아간 뒤, 세드릭과 튜린은 오지 않길 바랐고 다미언은 기다려 마지않았던 순간이 왔다.
신부가 자라 온 집을 떠나는 작별의 순간이었다.
"아가씨…….”
헤이워스 부인은 벌써부터 눈물바람이었다.
리타가 친정 시녀로서 릴리엔을 따라가기로 결정됐기 때문에 부인으로서는 한꺼번에 딸 둘을 출가시키는 것 같을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닌 게, 대공비의 시녀로 몇 년 간 따르다 보면 리타는 자연히 대공령의 가신들 중에서 신랑감을 찾게 될 터였다.
물론 릴리엔은 리타와 정든 고향을 함께 떠나게 된 만큼 리타의 혼처에 충분히 신경을 써 줄예정이었다.
“내 정신 봐, 내가 이렇게 울면 안 되는 건데.”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세드릭이 울고 싶을 터였다.
“가여운 가주님, 피붙이라고는 여동생 하나 남으셨는데.”
“오누이가 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서로밖에 없어 정을 붙이고 살던 걸 생이별을 하게 생겼잖아.”
적의가 담긴 시선에 아이반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여전히 무시무시하네요, 진짜.
튜린 사람들의 충심이 뭔지 이번 기회에 아주 제대로 배우고 간다니, 윽!”
투덜대는 수하의 발을 다미언이 야무지게 밟아 놓는 동안 세드릭이 앞으로 나왔다.
“릴리.”
“오라버니.”
생김새로는 전혀 닮지 않은 두오누이였지만, 대신 새하얀 도자기 같은 서늘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똑 닮았다. 아무도 혈연임을 의심치 못할 모습이었다.
“조만간에 황도에서 볼 테니 요란하게 작별하지 않으마. 가볍게 떠나거라.”
세드릭은 최대한 덤덤한 태도를 가장했다. 먼 길을 떠나는 여동생의 행장이 이미 무거웠기에 마음까지 무겁게 할 수 없어서였다.
릴리엔은 그런 오라버니의 일렁이는 푸른 눈빛을 꽤 오래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오라버니의 여동생으로 지낼 수 있어서 행운이었어요. 보호해 주신 덕분에 저는 모진 세파도 모르고 고초도 몰라요. 그러니까…….”
말을 하다 말고 릴리에이 와락안겨 들었다.
세드릭도 놀라고 식솔들도 놀랐다. 릴리에이 저런 식으로 감정을 못 이기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릴리.”
“오라버니의 철모르는 어린 누이로 지내던 시절이 그리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