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세드릭은 습해지려는 숨을 참았다. 그리고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말했지, 릴리. 네 심장은 튜린에서 태어났다고.”
"......”
“그러니까 어딜 가든 잊지 마라. 넌 튜린의 릴리엔이야. 이 성은 언제든지 네 집이다.”
세드릭이 부드러운 손길로 품에서 릴리엔을 떨어트려 놓았다.
그가 먼저 여동생을 떼어 놓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검집 채로 다미언을 향해내밀었다.
“칼의 맹세를 청합니다, 전하."
제국 사람들은 절대로 깨트릴 수 없는 약속을 두고 '칼의 맹세’라고 불렀다.
세드릭은 자세한 맹세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충분히 전해졌다.
어차피 세드릭이 요구하지 않아도 다미언은 릴리엔을 지킬 생각이었다. 승자가 된 마당에 이까짓 맹세 하나쯤 장단 맞춰 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다미언도 검을 풀었다. 릴리에의 눈에 어딘지 익숙하게 보이는 남빛 매듭이 매달려 있었다.
예의 그 검이 세드릭의 칼자루와 맞물렸다.
“맹세하지.”
* * *
릴리에, 다미언 그리고 마테오를 포함한 일행은 곧장 황도에 있는 사저로 향했다.
보통 결혼을 하면 본령까지 순방을 가서 가신들을 만나고 하례를 받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의를 앞두고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거니와 대공령을 거치는 일정이 릴리에에게 부담이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생략되었다.
어차피 화의 참석차 다들 수도에 모일 거고 하례야 그때 받아도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릴리엔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공가 가솔들에게 릴리 엔의 몸이 약하다는 소식부터 전해졌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신행에 본령까지 순방을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하시다고요?”
순식간에 다들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다미언 루펜바인은 처지가 위태로운 황태자의 하나뿐인 방패였다. 방패는 전쟁터에서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아 내는 위치인 법이다.
그 옆에 서야 하는 사람인데 순방을 돌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하시다니.
“큰일이구먼.”
“얼핏 듣자 하니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셨다던데, 예민하고 까다로운 분이 아니실까요? 원래 건강한 애들이 성격도 좋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까다로운 법이잖아요.”
“비전하에 대한 기대감이 컸는데………"
“내정을 직접 꾸려 나가기는 하실까요? 설마 지금까지처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다미언의 가솔들은 이도에 선황을 가까이서 모시던 이들이거나 전쟁터에서 다미언으로부터 직간 접적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다들 진심으로 다미언과 마테오를 염려하고 있었다.
“걱정이네요. 대공 전하께서 무력으로는 견줄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내정에는 통 관심이 없으시고 뭐든 대충인 면도 있으셔서…."
하녀장 모린 부인은 선황의 가솔 출신이었다. 이래저래 다미언을 오래 봐온 아랫사람답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비전하는 그런 점을 보충해 주실 만한 분이었으면 했어요.”
모린 부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총관 역시 후우 한숨을 쉬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강하셔야 감당하실 수 있는 중역이긴 하지.
하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니 너무 속단하지는 맙시다. 아랫것들 입단속도 철저히 하고.”
"예에.”
비록 비전하에 대한 기대감은 바닥났지만 충실한 하녀장은 사저의 내외부 갈고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주인이 없는 동안 집안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순 없어!'
어쨌든 새 여주인을 뵙는 자리가 아닌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했고 좋은 인상도 주고 싶었다.
다만 일을 지휘하다가 문득문득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색이 화려하거나 돈이 많거나 매력이 대단하길 바란 것도 아닌데.’
다만 심지가 굳고 책임감이 깊은 안주인을 모시게 되길 바랐다. 성격이 두루 원만해서 매번 으르렁대는 다미언과 마테오 사이에서 완충지대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에휴, 하긴. 그런 좋은 성품을 갖추는 게 미모나 재력을 소유하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몰라.”
처음부터 바람이 과했을지도 모른다. 모린 부인은 실망감을 애써 추슬렀다.
* * *
개인적인 실망감과는 별개로 모린 부인의 일처리에 빈틈은 없었다.
“이건 좀 과한 거 아니오?”
“모르는 말씀 마세요!"
총관의 지적에도 부인은 단호했다.
“튜린 본성에서만 나고 자란 분이시라면서요! 튜린 선제후 일가가 하나같이 청렴결백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야 그렇지만…….”
“성 안을 금으로 발라 놨을지 누가 알아요.”
“저택 내부에 금칠을 하는 건 아무리 대공 전하라고 하셔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렇게 쓸고 닦는 것 아녜욧! 바쁘니까 이제 그만 입좀 다물어요. 아니면 거들든가!"
덕분에 안 그래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저택은 그야말로 광이 날 지경이 되었다.
“언제쯤 도착하신대요?”
“늦은 밤에 들어오실 거래!”
“등유는 넉넉해요? 등갓의 그을 음은 다 닦았고요?”
“누가 난간에 왁스칠 좀 다시 해 봐!”
“석탄 좀 조심해서 날라! 카펫에 검댕이 떨어지면 끝장이야!!”
마지막까지 전쟁 통이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은 모린 부인의 기준을 통과할 만큼 깨끗해졌다. 커튼에 먼지 한 올안 묻어 있는 건 정도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새 주인을 모시는 자리에서 흠을 잡히는 것보다야 나았다.
마지막으로 하솔들이 모두 옷을 갈아입고 현관홀에 사열했다. 모린 부인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옷차림을 점검하고 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일 어려운 일만 남았군.”
“뭔데요?”
“기다리는 거!”
말 그대로 꼼짝 않고 서서 주인을 기다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저녁을 지나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대공 일행이 수도의 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총관은 시계를 확인했다. 잠시 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대문을 열어라!”
"예!"
대문이 열리자마자 곧이어 마차 한 대가 길에 깐 자갈을 사방으로 튀기며 질주하듯 들어왔다.
다급한 기세에 사람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총관이 마차의 문을 열려고 화급히 다가갔지만 그보다 안에서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전하?”
“비의 침실은 준비가 되어 있나?"
“예, 그렇습니다만…….”
“먼저 가서 문을 열어 둬라.”
“알겠습니다."
돌아서기 전에 총관이 본 건 다 미언이 마차에서 축 늘어진 누군가를 안아 내리는 모습이었다.
'어이쿠, 이거 큰일 났군.'
점잖은 총관이 서둘러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주인 내 외를 처음 맞이하려던 모린 부인 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총관?”
총관이 손을 휘저어 사열한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왜 갑자기 사람들을…….”
“지금 인사를 올릴 때가 아니 오.”
상황 설명을 할 틈은 없었다.
대공이 열린 현관으로 비를 안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오지도 못하는 새 신부를 보고 모린 부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확실히 인사를 올릴 때가 아닌 게 맞았다.
“이쪽입니다, 전하!”
모린 부인은 총관의 안내를 따라 의식을 잃은 여자를 안고 올라가는 다미언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깨에 걸쳐진 희고 가는 팔이 불길하게 덜렁거렸다.
'세상에나.'
경악한 부인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건드렸다.
"에그머니!”
“이 댁 하인들 일손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짐마차에서 약재 상자를 내려야 해서요.”
“누, 누구신데요?"
불퉁한 얼굴을 한 덩치 큰 남자가 어깨의 가죽 가방을 고쳐 매며 대답했다.
“의사입니다. 가주님, 그러니까 튜린 선제후 각하의 명으로 당분간 아가씨, 그러니까 비전하를 돌보기 위해 왔습니다.”
“예에?”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의사라니. 새 신부가 혼수로 의사를 데려왔으면 사실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말 다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 * *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릴리에의상태가 안정되었다.
“괜찮소?”
총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모린 부인은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대공 전하께서는요?”
“비전하의 침실에. 나가 보라고 하시더군.”
“세상에, 아이고…….”
모린 부인이 마른세수를 했다.
총관이 부인을 달랬다.
“우리 같은 아랫사람들이 주인을 골라 가며 섬길 처지는 아니지 않소.”
“그야 그렇지요, 맞는 말이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성심을 다해야 하는 게 맞아요. 엘런, 나도 알아요. 근데 나는 두려워요.”
“무엇이 말이오?”
“새 비전하께서 …….”
모린 부인이 망설인 끝에 이렇게 물었다.
"…혹여 아라티네 황후 폐하같은 분이면 어쩌지요?"
“그건…….”